353화
어느새 밤이 꽤 깊었기에 상점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가고 있었다. 훈련장에서 오만 난리를 다 피운 데다가, 뒤뜰에서 연거푸 두 번이나 신나게 역할극을 했더니 근육통으로 안 쑤신 데가 없었다.
어깨를 주무르며 집안으로 들어선 실비아는 깜깜한 거실을 더듬거리며 들어가다가 악, 하고 조그맣게 소리 질렀다. 소파를 삐죽 튀어나온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기 때문이다.
‘뭐야, 세비스? 얘가 왜 여기 누워있어?’
은은한 스탠드 등을 켜보니 세비스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조그만 무릎담요를 배에 덮고 있는 모습이 웃겼다. 성체가 된 세비스는 아담한 소파에서 다리를 쭉 뻗고 자기엔 지나치게 컸다.
이 소파가 이렇게 작았었나? 불편할 텐데 어떻게 잠들었담. 보아하니 팔걸이에 다리를 뻗고 누웠다가 그대로 잠든 것 같았다.
재밌는 장난을 떠올린 실비아는 세비스의 얼굴 쪽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그러곤 음산한 목소리를 꾸며내 속삭였다.
“세비스, 자네. 이제 갈 시간이네. 난 자네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라네. 세비스스스….”
“으음….”
세비스는 잠결에도 소름이 돋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난칠 맛이 나는 반응에 신난 실비아는 한 번 더 음산하게 속삭였다.
“자네는 죄를 많이 지었지. 쉬려는 주인에게 청소를 시킨 죄, 쓸데없이 부지런한 죄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세비스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입술이 벌어졌다.
“…참나.”
여전히 눈꺼풀을 굳게 닫은 세비스가 한숨과 비슷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다시 침묵. 잠꼬댄가? 실비아는 다시 한번 귓가에 손을 모은 뒤 입술을 열었다.
“일어나게 자네. 이래 보여도 난 정말 바쁜 저승사자거든… 엇!”
실비아는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세비스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기 때문이다. 놀란 그녀가 세비스의 표정을 살폈지만, 여전히 눈꺼풀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에잇! 손을 빼내려고 팔을 흔든 실비아는 이어지는 세비스의 행동에 소리도 못 내고 경악했다.
쪽.
그가 실비아의 손을 가져가더니 가볍게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뜨거운 입술의 감각이 생생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실비아의 얼굴과 손이 불타는 고구마가 돼버렸다. 당황해서 굳어있는 사이 그가 실비아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더니 아예 입술을 묻어버렸다.
‘으아, 이게 뭔 일이야.’
손가락 사이로 촉촉한 입술이 생생하게 느껴지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녀는 힘을 줘 손을 빼보려 했지만, 세비스는 깊이 잠이 든 건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 뭐야. 저번처럼 또 잠꼬대야? 잠버릇 한번 고약하네!’
당황한 실비아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흔들었다. 이 상황이 어색하고 숨이 턱 막혔다. 심장박동이 저절로 빨라질 즈음, 실비아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손가락에 닿은 입술을 꼬집어버렸다. 힘을 주다 못해 손톱 끝을 세우자 세비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야…!”
“죽을라고! 어디서 개수작이야!”
실비아는 일부러 험한 말을 쓰며 잡힌 손을 빼냈다. 사실 너무 당황해서 말을 고를 틈도 없었다. 그녀가 씩씩거리기도 잠시, 세비스의 눈꺼풀이 걷히고 붉은 눈이 드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잠결인 듯 행동이 느릿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얘가 참 은근히 위험한 구석이 있었다. 실비아는 별말 없이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세비스를 내려다보며 과장스럽게 훈계했다. 뭔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아무리 잠결이라도 그렇지, 어? 주인 손을 막 잡고 말이야. 이, 입술을…! 어휴, 남사스러워라.”
“…실비아 님, 이 시간까지 훈련하신 거예요?”
세비스는 제가 한 짓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 없이 다른 말을 꺼냈다. 여전히 나른한 빛을 띠는 붉은 눈이 천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민망했던 실비아도 방금의 해프닝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그의 질문을 얼른 받았다.
“으응. 어쩌다 보니? 그리고 운동 좀 할 겸 몇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어왔어. 평소에 체력을 단련해야 더 빨리 강해질 테니까…. 이게 다 하루빨리 늑대 왕국을 가기 위해서지. 하하.”
세비스는 배를 덮은 무릎담요를 움켜쥐며 상체를 일으키더니 어색하게 소파에 웅크렸다. 은은한 조명이 반사된 붉은 눈에 순간 음울한 빛이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하아,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실비아가 은은한 스탠드 등만 켠 게 다행이었다. 거실이 환했다면 세비스의 붉어진 목과 어색한 하체를 바로 들켰을 테니까. 방금 그는 무척 비겁한 짓을 저질렀다. 자는 척하면서 실비아의 손에 입을 맞추고, 그걸로도 모자라 뻔뻔하게 모른 척했다. 다행히 실비아는 민망했는지 더 따지지 않고 바로 말을 돌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개수작’이라는 단어에 심하게 찔렸던 세비스는 순간 얼어 있었다. 다행히도 실비아가 먼저 ‘잠결’이라고 언급하는 바람에 뻔뻔하게 표정 관리할 수 있었다.
만약 실비아가 제 입술을 꼬집지 않았다면 그는 이성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대로 손을 잡고 당긴 뒤에 손등이 아닌 입술을 삼켜버렸을지도. 세비스는 무릎담요를 더 단단히 덮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또 섰잖아…. 개수작이란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지. 방금 내가 한 건 정말 개수작이 맞으니까. 후우, 기왕 하는 거 개수작을 더 부릴 걸 그랬나.’
따뜻한 손등이 입술에 닿았던 감각이 아직 생생했다. 저 조그만 입술은 손등과는 비교도 안 되게 달콤하겠지? 세비스의 목울대가 순간 꿀렁였다. 포기하겠다는 다짐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뇌의 명령을 무시한 몸은 기회가 오자마자 착실히 개수작을 부렸고, 그걸로도 모자라 괜히 입맛을 다셨다.
‘진정하자, 지금은 잠결이란 변명도 안 통해.’
세비스는 끝없이 부푸는 야한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입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목을 우둑-소리가 나게 여러 차례 꺾은 그는 표정 관리를 마친 뒤 실비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거짓말을 한 탓에 찔렸던 실비아는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며 툴툴거렸다.
“어휴, 근데 매일 이렇게는 못 하겠어. 몸이 여기저기 안 쑤신 데가 없어.”
“정말 열심이시네요, 실비아 님. 처음과 비교도 안 되게 강한 기운이 느껴져요. 예전엔 동네 양아치들한테도 한주먹거리로 보일 만큼 약했는데, 지금은 황궁의 기사들과도 견줄 만하겠어요.”
“그래? 확실히 예전보단 훨씬 강해진 것 같긴 해. 처음엔 네 말대로 동네 양아치들도 날 우습게 봤대도. 아우, 삭신이야. 좀 무리한 것 같긴 하지만, 이대로 꾸준히 단련해야….”
세비스의 칭찬에 기분 좋아진 실비아가 팔을 빙빙 휘두르다가 몸을 웅크렸다. 근육통 때문이었다. 오늘 여러모로 몸을 너무 혹사했다. 자기 전에 인벤토리에서 <새살이 솔솔 연고>라도 꺼내서 발라야 하지 않을까.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주무르자 세비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실비아 님, 아프세요?”
“어, 말했잖아. 오늘 너무 열심히 했나 봐.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푹 자면 나을 거야….”
힘없이 대답한 그녀가 욕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세비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실비아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왜, 왜 그래?”
“…전에 제가 마사지해드린 거 기억나세요? 오늘도 해드릴까요? 이대로 주무시면 잠을 설치실 것 같은데.”
야밤에 뜬금없이 마사지? 실비아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러고 보니 게임 초기에 세비스가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었다. 던전 안에서 해줬는데, 조그만 손인데도 무척 야무지고 기술이 좋았었다. 온몸이 시원해지는 감각을 떠올린 실비아의 표정이 저절로 노곤해졌다. 지금은 손도 훨씬 커졌고 힘도 세졌으니까 그때랑 비교도 안 되게 환상적인 마사지를 받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으음, 방금 잠결이지만 좀 어색한 일도 있었고, 몸을 맡기기가 좀 그런걸. 뭔가 찝찝한 게…. 에이, 도끼병이 싹 나았는 줄 알았더니 다시 도졌나? 이러다가 또 망신당하지.’
아무렴, 세비스가 24시간 변태 같은 생각을 하는 저처럼 음흉한 의도가 있을까. 실비아는 머릿속을 자욱하게 채우는 망상을 떨쳐버렸다. 세비스의 마사지를 받을 기회는 흔치 않았다. 평소의 그는 너무 바빠 보여서 마사지를 부탁하기가 미안하기도 하고, 이런 성가신 일은 한가할 때도 먼저 권하지 않는 이상 부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기회가 왔을 때 덥석 잡아야지.
결심한 실비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세비스가 기뻐하며 소파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 모습에 실비아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여기 앉으세요. 등이 보이게요.”
“으응. 그런데 피곤하지 않아? 아까 기절한 것처럼 자던데. 조금만 주물러 줘도 돼.”
“네. 안 그래도 길게는 안 하려고요.”
잠결인 척 만지면 범죄지만, 허락하에 만지는 건 범죄가 아니었다. 밤도 늦었겠다, 조명도 은은하겠다 세비스는 하체가 명령하는 개수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입이 저절로 요사스러운 말을 내뱉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실비아의 나긋한 등이 눈앞에 보였다. 그는 진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숨이 점점 가빠지고 손이 떨려왔다.
정말 마사지만 하는 거야, 마사지만…. 침을 꿀꺽 삼킨 세비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모아 쥔 뒤 앞으로 넘기며 속삭였다.
“실비아 님, 머리카락이 엄청 부드럽네요. 저랑 같은 샴푸 쓰는 거 맞아요?”
“응. 알면서 뭘 묻고 그래. 같은 냄새 나지 않아?”
“아, 그런가요.”
세비스는 등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쥐곤 고개를 내렸다. 코끝에 감도는 샴푸 향은 분명히 제 머리에서도 나는 향이 맞는데, 묘하게 더 향긋했다. 그는 불규칙한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 숨을 고르곤 대답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