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왜 그렇게 놀라? 종달새로 가면 문제 없지 않나? 난 유리창을 깬 범인도 아니잖아. 사실 이대로 가도 될 것 같긴 한데, 혹시나 그 친구랑 얘기하다 보면 드래곤이란 걸 설명하기 곤란해지니까…. 안 돼?”
“오늘은 밤이 너무 늦었으니까….”
“응. 그래서 다음에! 다음에 놀러 갈게.”
거절할 만한 핑계 없으려나. 실비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작정 안 된다고 하면 블루가 괜한 의심을 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다음에 올 거라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미리 세비스의 성별을 말해두는 게 낫겠지.
침을 꿀꺽 삼킨 실비아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달싹거렸다.
“후우, 그게 있잖아. 놀라지 마. 사실 별 건 아닌데 말이지.”
“으응. 뭔데, 말해 봐.”
“같이 사는 식구는 사실 식구라기보단 집사거든? 여기서 살면서 집사를 데리고 있단 게 좀 웃기긴 한데….”
세비스가 남자란 걸 밝히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이상하게도 가타부타 말이 점점 길어졌다. 거기다가 집사라니. 보통 집사는 호화저택에 사는 귀족들이 거느리는 관리인이지, 제가 데리고 있을 건 아니었다. 실비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블루가 검지를 휘저었다.
“아냐. 뭐 어때. 길거리에 사는 노숙자도 집사를 가질 수 있는걸? 충분히 가능하지. 근데 왜 집사 눈치를 본 거야?”
노숙자도 집사를 가질 수 있단 건 너무 편견 없는 말인데. 하지만 그의 대답에 실비아의 낯빛이 편해졌다. 중요한 건 집사가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질 말이지만…. 그녀는 주먹을 꼭 쥔 채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냥 오래 알고 지내다 보니 식구나 다름없거든. 우리 집의 모든 걸 관리하니 집사가 맞긴 한데, 친구처럼 친하다고나 할까. 설명하자면 복잡해. 하여튼, 그 집사가…. 휴우, 남자야. 정확히는 수컷 늑대 수인….”
“뭐?! 같이 사는 집사가 수컷 늑대라고?”
감색 눈이 본 적 없이 커졌다. 이렇게 크게 놀라는 블루의 모습은 처음이기에, 실비아는 지레 겁을 먹고 파드득 떨었다. 엄청 화내겠지? 하지만 금방이라도 큰 소리를 낼 것 같았던 블루는 감정을 누르려는 듯 거칠게 심호흡하더니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후우…. 그래? 좀 놀라긴 했는데, 상관없어. 나, 너희 집에 놀러 갈래. 오늘은 밤이 너무 늦었다고 했지? 그럼 이번 주에 당장.”
“어? 이번 주에 당장? 그, 그건 좀….”
차분한 표정의 블루는 대놓고 화내는 것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이거 뭔가 실수한 것 같은데. 이대로 블루가 집에 놀러 온다면 베란다 유리창이 한 번 더 박살날 것 같았다. 늑대와 드래곤의 싸움으로 이번엔 와장창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가루가 되어버릴지도.
‘괜히 미리 말했어. 아니지, 애초부터 그냥 어떻게든 집에 놀러 오지 못하게 핑계를 댈 걸 그랬나. 하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잖아. 루카와 노엘은 세비스의 존재를 다 알고 있는데 말이야….’
잠깐, 맞네. 이미 두 명은 세비스의 존재를 안다. 근데 블루에게 못 보여줄 이유가 있나? 자신이 어째서 계속 눈치를 보고 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성별이 남자라고 해도 세비스는 정말 집사이고, 실비아와 이성적인 관계가 전혀 아니었다. 근데 왜 이렇게 숨기려 들고 싸움이 일어날 거라 예상했던 건지, 이러면 제가 꼭 켕길 짓이라도 한 것 같지 않나.
스스로의 이해 못 할 생각이 웃겨진 실비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블루야. 혹시나 네가 오해할까 봐 남자라고 말하지 않은 거야. 그리고 세비스는 정말 우리 집 집사가 맞아.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난 신탁을 받은 영웅…이거든. 그래서 날 도우라는 신탁을 받은 세비스가 집사 일을 자처하고 있는 거고.”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미안. 수컷 늑대와 같이 살고 있다니까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그만….”
실비아가 차분히 설명하자 블루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래,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 걸 괜히 지레 걱정해서 쪼는 바람에 상황이 어려워질 뻔했다. 실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냐. 나라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세비스랑 나는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냐. 그냥 대의를 위해서 함께 하는, 하지만 함께 있다 보니 친해진 그런 가족 같은 관계야. 이제 좀 안심이 됐어?”
“응. 그 친구 이름이 세비스구나? 사실, 아무 관계 아니란 걸 말해도 남자와 함께 살고 있단 것만으로 불안하긴 해. 실비아는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어떤 남자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으니까.”
“풉, 아니, 무슨…. 에이,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런 말 하면 나 도끼병 걸린다구!”
블루의 낯뜨거운 칭찬에 실비아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감싼 뒤 몸을 비비 꼬며 팔꿈치로 블루의 가슴팍을 쳐댔다. 격앙된 실비아의 몸짓에 블루가 사레가 들려 컥컥거렸다. 블루가 급소를 맞아 얼굴이 파래지는 상황에서도 실비아의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아잉, 몰라 몰라!”
“커헉, 실비아. 나 명치가 아려.”
뾰족한 팔꿈치를 잡은 블루가 애원하자 실비아의 명치 가격이 멈췄다. 블루는 시선을 들어 실비아네 아파트를 응시했다.
“그 집사를 한번 보고 싶어. 늑대 수인이라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거든. 그래도 되겠지?”
“음….”
실비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세비스가 블루를 좋아할까, 싫어할까? 그녀의 머릿속에 개판 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희미한 기억 속 세비스는 날아다니는 블루를 보고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또렷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말이다.
‘블루는 드래곤이니 수인인 세비스와 의외로 잘 맞을 수도 있겠어. 하지만…. 우리가 특별한 관계란 걸 세비스가 알아채면 나중에 아주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세비스는 노엘과 루카가 자신과 무슨 관계란 걸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날의 대화를 들었던 것 같으니까. 초록빛 눈이 옛 기억을 떠올리듯 가늘어졌다. 관심 없는 일은 곧잘 잊어먹는 단순한 머리통인지라, 기억이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블루까지 소개해주게 되면? 날 세상 문란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진짜 변태도 자신이 변태란 게 소문나는 건 싫은 법이다. 같이 사는 세비스에게 이성 관계가 복잡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었던 실비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블루에게 부탁했다.
“사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거든? 일하면서 밤낮으로 던전 공략 궁리만 해도 모자란단 말이야. 지금은 신탁이 내려오지 않아서 황궁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노닥거릴 틈이 없어.”
“응, 그래서?”
“세비스는 옆에서 날 도와주기로 했는데, 연애하느라 정신 파는 걸 알면 좀 미안해질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 사이를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여러모로 찔리는 게 많았기에 실비아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블루는 곧잘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꼭 비밀로 할 필요가 있나? 그 세비스란 집사가 네가 연애하는 걸 싫어해?”
“아니이. 그런 건 아니야. 음, 비유하자면 조별 과제를 같이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조원이 과제를 내버려 두고 몰래 게임을 하고 있단…. 아니지, 그래. 동료 노예가 같이 수레를 끌고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걔는 힘을 주지 않고 농땡이를 치고 있었단 걸 알아봐. 너는 온종일 수레를 끄느라 죽을 맛인데, 걔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새참을 얻는 거지. 완전 열 받지 않겠어?”
조별 과제를 예로 들던 실비아는 감색 눈에 물음표가 떠오르자 얼른 이해하기 쉬운 예시로 바꿨다.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블루가 진저리치며 주먹을 쥐었다.
“으으, 생각만 해도 화나. 일 제대로 못 했다고 채찍도 같이 맞을 거 아냐.”
“그래. 그런 느낌이야. 세비스 입장에선 내가 그 농땡이 부리는 노예인 셈이지. 그래서 비밀로 해달란 거야.”
“그래. 그런 거라면 말하지 않을게.”
블루는 완전히 납득이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한 실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음, 금요일 어때? 그때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거야.”
“좋아. 가이드 일도 주 5일제니까…. 반차 써서 서둘러 날아올게.”
“가이드도 반차가 있구나….”
“으응. 당연하지.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까 정말 갈게. 빨리 들어가, 감기 걸릴라.”
늦은 밤의 길가는 한적했기에 블루는 종달새로 폴리모프한 뒤 날아올랐다.
“실비아, 그럼 금요일에 봐.”
“어어. 잘 가!”
멀어져 가는 새 꽁지를 바라보던 실비아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 뭐가 문젠가 싶어서 블루를 집에 초대하기로 했지만, 잘한 일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였다.
‘괜한 걱정인 걸까. 딱히 꺼려질 건 없긴 하지만… 없는 것 맞지?’
복잡한 심경으로 터덜터덜 걷던 실비아는 앗, 하고 멈췄다.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줬으니 씨앗이 꽤 늘지 않았을까.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록 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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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섹스계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런 건 저도 예상 못 했어요. 더럽고 화끈한 역할극을 보여준 공로로 x5의 씨앗을 얻습니다.]
[앵콜 공연도 엄청나네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시상식을 열어 모두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훌륭한 리플레이로 x4의 씨앗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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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역시! 한꺼번에 9개의 씨앗을 얻다니. 이게 바로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일석이조?!’
씨앗 획득 메시지를 확인한 실비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로써 블루의 씨앗은 이제 30개. 역할극 자체로도 만족했건만, 노력에 따른 넉넉한 보상까지 받으니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섹스해야지. 신난 실비아는 어깨춤을 추며 들썩였고 대체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구경꾼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던진 동전으로 그녀는 간식값을 획득했다.
‘공연할 생각은 없었건만, 이제 몸만 흔들어도 간식값이 나오네.’
실비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동전을 주섬주섬 주웠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 그녀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블루를 집에 초대하다니, 재앙을 자초하는 셈이 아닌가 싶어 점점 걱정됐다. 블루나 세비스 입에서 나오면 안 될 말이 나오면 어쩌지? 뭐 들켜봤자 문란 여주밖에 더 되겠냐만, 그래도 좀….
‘블루가 놀러온단 걸 미리 말해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