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실비아가 말없이 눈을 굴리자 블루가 한 번 더 다그쳤다.
“말해 봐. 다른 얼굴을 한 나랑 하고 싶은 거냐고.”
“아, 아냐. 어휴, 그냥 물어본 거야. 뭔 말을 못 하겠네!”
어차피 겉모습이 달라도 블루는 블루니까, 그냥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어서 내뱉은 말인데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이야. 진짜 다른 남자라면 실비아도 사양이었다. 아까도 정말 치한이었다면 한 방 먹여줬겠지만, 블루란 걸 알고 즐겁게 역할극을 했던 거니까.
‘그래. 난 정말 다른 남자는 사양이라고. 공략 대상이 아닌! 다른 남자는 사양이야. 내 맘속엔 다섯 명밖에 없어. 나머지는 그냥 못 먹는 감일 뿐이지. 시간이 부족하지만 않았다면…이 아니라! 음, 하여튼 아니야.’
실비아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있는 블루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다른 얼굴이라도 그건 어차피 너잖아.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어. 화 난 거 아니지?”
“아, 그런 거였어? …화는 무슨, 고작 그런 걸로 화낼 리가 없잖아.”
“화 안 났다니 다행이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실비아의 곧은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른 얼굴을 하라는 것만 해도 이렇게 기분 나빠하는데, 만약에 다른 남자랑 실비아가 함께 뒹구는 모습을 들킨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다시 분위기가 밝아지자 실비아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블루는 며칠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했다. 나이 든 드래곤이 오랜만의 유희에 신이 난 바람에 입이 쉴 틈이 없었다나. 그래도 물개가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여행을 한 건 처음이었기에 재밌었다고 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블루는 말미에 인간 여자는 물론, 성별이 암컷인 종족들에겐 눈길도 안 줬다고 덧붙였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실비아를 직접 보러 갈 생각에 버텼다고 말한 그는 방긋 미소 지으며 그녀를 껴안았다.
“그래도 엘리셔스 월드랑은 달리 이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먼저 보러 올 수 있어서 행복해. 가이드 일을 하면서 제국어도 더 유창해졌고, 인간 세계의 문화도 더 깊이 알게 됐어. 이제 인간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잘 됐다! 잘 해낼지 걱정했었는데.”
기뻐하던 실비아는 우선 블루를 데리고 황궁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했다. 자리를 옮기기 전에 블루에게 주변 정리를 위해 목걸이를 써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침에 뒤뜰이 엉망이 된 것을 누군가 본다면 범인 색출을 한다고 난리가 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블루가 몰래 황궁에 들어오기 힘들어질 터였다.
‘황궁은 경비가 삼엄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허술하네. 아니면 드래곤이라서 감시망을 뚫은 건가? 여기엔 엘리셔스 월드처럼 드래곤의 힘을 막는 보호 마법 같은 건 안 걸려있나 봐.’
황궁 전체에 보호 마법을 걸어두고 감시자를 숨겨둔다면 경비가 어마어마하게 들 것이다. 소도시만큼 넓은 황궁을 다 신경 쓰는 건 여러모로 낭비였기에, 황족들이 사는 곳과 감시가 필요한 일부 장소에 국한해 보호 마법과 감시의 눈길이 있었다. 저번 황궁 개방 축제의 경우엔 외부인들을 감시하느라 그림자들이 활동한 것이었지만, 실비아가 그런 것까지 알 순 없었다.
목걸이 마법을 사용한 블루는 투구를 다시 썼다.
“잠깐만. 빌린 갑옷 좀 놔두고 올게.”
“어, 어어…. 난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갑옷을 다시 갖다 놓으러 황궁 안으로 간다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혹시나 공범으로 잡혀 물고를 당할까 봐 겁이 난 실비아는 허둥지둥 입구로 향했다. 조금 치사한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블루는 드래곤이라서 어떻게든 도망치겠지만, 실비아는 참수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건 비겁한 게 아냐. 현명한 거지.’
급하게 입구로 나온 실비아는 경비병에게 붙들려 잠시 한 소리 들어야 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안에서 뭐 했냐는 거였다. 훈련장에서 훈련했다는 말과 함께 미심쩍으면 우라엘 황태자에게 확인해 보시라는 말을 덧붙이자, 더 이상의 대거리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얘는 황궁 사용인 등록증도 없을 텐데, 경비병한테 붙잡히는 거 아냐? 큰일이네.’
최악의 경우에 튈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다른 입구에서 무사히 통과하며 인사까지 받는 블루가 보였다. 기가 막힌 광경에 실비아가 경악하고 있는데, 블루가 가까이 다가와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왜 그래? 뭐 이상한 거라도 봤어?”
“어? 뭘 보긴, 너 때문이지. 어떻게 입구를 통과한 거야?”
“쉿.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쉬는 동안 또 뭘 본 건지 블루가 드라마 남주 같은 표정을 짓더니 실비아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정류장에 정차 중이던 마차를 탄 그들은 실비아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블루는 그녀를 데려다줄 셈인 듯했는데, 대체 데려다주고 나면 어떻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지 의문이었다.
“나 데려다주려고? 원래 있던 곳엔 어떻게 가게? 날개로?”
“아! 말해준단 게 깜빡했네. 잠시만….”
불투명한 칸막이로 가려진 마부석 쪽을 힐끗 본 그는 실비아에게 잠시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잠시 후 눈을 뜬 실비아는 옆에 있던 블루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기야, 여기 실비아!”
“어머!”
밑으로 시선을 내린 실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조그만 종달새가 블루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종달새가 어깨를 으스대며 부리를 열었다.
“짜잔. 종달새로 폴리모프 하는 데 성공했어. 내가 가이드하는 드래곤 아저씨가 가르쳐줬거든. 어때, 귀여워?”
“아유, 너무 귀여워! 완전 최고야.”
실비아는 귀여움을 참지 못하고 종달새를 손으로 감쌌다. 나른해진 표정의 그녀가 뺨에 대고 부비부비하자 블루가 짹짹거렸다.
마차가 잠시 덜컹, 하고 멈추더니 불투명한 마부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가 들어왔나요?”
“아, 아니에요. 마부님!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실비아의 외침에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블루한테 쉿 하는 제스처를 한 실비아는 조그맣게 웃었다. 손안에서 폴짝 뛰어내린 블루는 잠시 실비아한테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한 뒤 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봤지? 방금 봤던 모습으로 돌아갈 거야.”
“대단해. 종달새로 변하면 어딜 날아다녀도 문제가 없겠네. 마법이 많이 늘었구나.”
실비아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블루가 뿌듯해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까 네가 물어본 거 있지? 열심히 연습하면 나중엔 다른 사람과 비슷한 모습으로 폴리모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말이야.”
“어머, 정말? 익히게 되면 꼭 나한테 말해주기야?”
블루는 고개를 끄덕이곤 실비아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녀는 블루의 폴리모프 실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이러다가 나한테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 모습으로 변신해서 오면 어쩌지? 잘못하면 말실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에이, 설마. 블루의 말론 정말 열심히 해야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복잡한 생각을 관두곤 블루와 수다를 떨었다. 황궁에서 실컷 역할극을 한 덕에 순수해진 뇌로 건전한 대화가 가능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서 마차가 서고, 실비아와 블루는 아쉬움 가득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다시 올 테니까 편지는 따로 안 해도 돼.”
“으응. 근데 그럼 퍼랭이는 뭐 하고 지내는 거야? 걔가 하는 일이 전서구잖아.”
“어…. 네가 저번에 말한 단어 있지? 뭐더라. 아, 군식구! 군식구가 됐어. 아니다, 식충이가 맞는 단어이려나. 그래, 식충이 겸 군식구가 됐어.”
“그, 그래? 그건 뭘 하고 있다기보단 안 하고 있는 상태에 가까운 것 같은데….”
실비아가 말끝을 흐리자 블루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뭐라도 하는 게 어디야. 그러고 보니 퍼랭이가 실비아 너희 집을 그리워하더라. 참둘기랑 놀던 날이 좋았다고 가끔 모이 그릇 앞에서 한탄하던데? 그래서 말인데, 우리 퍼랭이를 다시 한번 초대해주면 안 될까?”
식충이 겸 군식구에, 밥상머리 앞에서 한탄까지 한다니. 그놈의 앵무새 영 못 쓰겠구나…. 실비아는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건 좀…. 다음에 참둘기와 함께 바깥에서 보는 자리를 만들게.”
실비아는 루카의 편지를 떠올리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퍼랭이가 실비아네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참둘기와 함께 루카의 저택에서 호화롭게 놀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비스 말로는 앵무새가 집에 있는 줄도 몰랐다지 않았던가. 그러니 저번엔 초대받았다기보단 무단 침입을 했단 말이 알맞았다.
‘심지어 마지막엔 배은망덕하게도 유리창을 깨고 나왔지. 짐승이 뭘 알겠냐만 엄연히 피해를 입힌 건 사실이니까. 우리 집에서 퍼랭이는 요주의 새로 낙인찍혔다고.’
그녀의 거절에 블루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짧은 시간 동안 함께 했지만 그사이 완전 식구가 다 된 모양이었다.
“아쉽네. 퍼랭이는 매일 실비아네 얘기를 하던데.”
“음, 그건 우리 집이 아니라…. 하여튼 초대는 안 될 것 같아. 같이 사는 식구가 유리창을 깬 범인을 잡으려고 벼르고 있거든.”
“아! 같이 사는 식구가 벼르고 있어? 에이, 그럼 퍼랭이는 됐고. 이제 종달새로 변신할 수 있으니까, 내가 실비아네 집에 놀러 갈래.”
“허억. 뭐?”
갑작스러운 블루의 발언에 실비아는 화들짝 놀랐다. 종달새로 변신한 블루가 집에 놀러 온다니, 세비스와 그녀가 별 사이는 아니지만, 같이 사는 식구가 수컷 늑대 수인인 걸 안다면 블루가 길길이 날뛸지도 몰랐다.
좋아할 줄 알고 꺼낸 말이었건만, 실비아가 헉하더니 안절부절못하자 블루의 눈에 의문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