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두 손을 모은 실비아가 감탄하는 눈빛을 보내자 우라엘 황태자의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더니 그의 반듯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올라갔던 입꼬리는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바로 내려갔는데, 실비아는 제가 제대로 본 건지 헷갈려 눈을 비볐다.
‘방금 웃은 것 같은데? 아닌가? 그냥 찬 바람에 잠시 입꼬리가 경련한 건가.’
황태자가 건넨 망치를 다시 받자 그가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던전에서 하듯이 가볍게 휘둘러 봐. 아까 보니 요령 없이 무기를 다루는 것 같던데.”
“네? 아, 맞아요. 저는 망치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거든요.”
실비아가 자세를 잡자 기사들이 멀리 물러났다. 멀리 던질 생각은 없는데…. 그녀가 허공에 대고 망치를 휘두르자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그때 황태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실비아의 손목을 잡았다. 경악한 그녀가 얼음처럼 굳었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이상하군. 이 정도 무게면 이 손목이 버틸 수가 없을 텐데. 본인이 손목을 꺾는 버릇이 있는 건 알고 있어?”
“…모, 몰랐어요.”
실비아는 더듬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황태자는 전혀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망치 잡는 법을 설명했지만, 제대로 들릴 턱이 없었다. 황태자가 먼저 터치를 시도할 줄 몰랐던 실비아의 머릿속은 완전 패닉 상태였으니까.
그녀는 황태자에게만 정신이 쏠려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지만, 기사들도 황태자의 처음 보는 모습에 크게 경악했다. 물론 함부로 티 내진 못하고 속으로들 놀라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한테도 저런 살가운 태도를 보인 적이 없는 황태자였다. 사실 살갑다고 하기엔 오뉴월 서리가 내릴 것처럼 차가운 표정이었으나, 그들의 기준에선 그랬다.
우라엘은 실비아의 손목을 잡은 채 이것저것 설명했으나 실비아의 귀는 이미 녹아버린 후였다.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황태자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그녀는 황태자가 이끄는 대로 끈 달린 인형처럼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한참 그러고 있으려니 귓가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있는 건가?”
“…네?”
실비아가 멍하니 되묻자 황태자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지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내려다봤는데, 빡대가리를 보는 것 같은 표정에 실비아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아니, 그러게 잘생기지나 말던가. 번쩍거리는 게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며 손목까지 잡는데, 어떻게 정신을 차리겠냐고.
실비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황태자가 답답했던지 그녀의 등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그러더니 망치를 함께 쥐었다.
“!”
“이렇게 해. 그래야 손목이 안 다쳐.”
“네, 네에….”
기사들은 뭔가 남의 썸을 지켜보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우라엘 황태자가 일개 사용인을 상대로 수작을 부릴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한창나이의 남녀들이 저러고 있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 터였다. 던전 공략자 중에 저렇게 가녀린 여자는 기사들도 물론이고 황태자도 처음 보는 거니 호기심에 그러는 거겠지.
그들은 애써 머릿속에 드는 가정을 지워버렸다. 모두가 놀란 상황에서 황태자만 태연한 표정이었다.
‘으으, 손목이 불탈 것 같아. 거기다가 몸을 이렇게 맞대고 있다니. 바로 위에서 숨결이 느껴지는데.’
우라엘 황태자의 몸에선 고급스러운 향기가 났다. 보통 신분이 아니니 최고급 향수만 뿌리겠지. 게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숨결에서는 한 치의 구린내도 나지 않았다. 남주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워낙에 과묵한 편이라 침 냄새라도 날 줄 알았건만. 어쩜 체향조차 이렇게 완벽할까 싶었다.
얼굴도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데다가, 흑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였을 때는 몰랐는데 나름대로 체격도 탄탄했다. 우락부락한 건 아니지만, 힘숨찐의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게임에 빙의한 이래로 남자들의 맨몸을 질리도록 많이 봤기에, 옷을 벗겨보지 않아도 대충 가늠이 됐다.
이제 입맛이 싹 사라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오전의 술래잡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라엘을 가까이서 봐서 그런지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 한 치도 허술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완전무결한 미인이 가까이 와있으니 사라졌던 입맛이 돌아오는 건 당연할지도.
실비아의 체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 와중에, 우라엘 황태자는 정조를 잃을 위험을 본능적으로 느낀 건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놔버렸다. 그러곤 고개를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예? 뭐가요?”
실비아는 남주들이 질색했던 경험을 숱하게 겪었으므로 우라엘이 왜 그러는지 짐작이 갔다. 불길한 예감인가 뭔가를 느꼈겠지. 이 망할 놈의 게임 세계는 가만히 있는데도 그녀를 치한으로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내가 뭐 했다고! 쳇! 뭐라도 했으면 몰라.’
기껏 먼저 다가온 우라엘이 이대로 다시 물러나면 곤란했다. ‘해치지 않아요, 난 안전하답니다.’라는 표정을 지은 실비아가 스멀스멀 다가가자, 우라엘 황태자가 주춤거리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뒤늦게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냐. 몸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같군.”
“저하!”
흑기사 중 한 명이 기겁하더니 황태자에게 다가와 안색을 살폈다. 그는 물을 주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며 마치 황태자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실비아가 보기엔 아주 신생아를 다루는 듯한 과잉 대응이었다.
‘내가 무슨 독 품은 두꺼비냐고. 접촉 좀 했다고 몸 상태가 안 좋아지게.’
“어머머, 어째. 황태자 저하! 괜찮으신가요?”
실비아는 못마땅한 마음을 애써 감추곤 황태자에게 재차 다가갔다. 그러나 흑기사에 의해 바로 저지당했다. 황태자는 이미터 가까이 되는 검은 갑옷들한테 둘러싸여 머리털 하나 안 보였다. 이렇게 줬다 뺏는 법이 어딨단 말인가.
걱정하는 척 발을 동동 구르는 연기 중인 실비아는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방금의 밀접 접촉이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흑기사들을 옆으로 비켜서게 한 황태자는 처음의 차가운 얼굴 그대로 돌아왔다. 그는 실비아를 힐끗 보더니 입술을 뗐다.
“그대들은 항상 날 과하게 염려해. 이제 나도 성인인데 말이야.”
“저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희는 다만 저하의 건강이 염려되어서….”
“내가 괜한 말을 해서 걱정하게 했군. 이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실비아는 과잉 대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적절한 대응을 취한 것이었다. 작은 몸짓 하나에도 움직이는 기사들이니 황태자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에 놀랄 만도 했다. 거기다가 황태자는 오늘따라 유독 말이 많았다. 잘 모르는 실비아가 보기엔 여전히 과묵해 보였지만, 오랜 시간 봐 왔던 그들은 그의 변화를 금방 알아차렸다.
“앞으론 일주일에 한 번, 내 개인 훈련장에서 보도록 하지. 여기서 가르쳐주다간 기사들의 훈련을 방해하는 게 될 것 같으니.”
“앗, 네. 알겠습니다.”
실비아가 머리를 조아리자 그가 경악한 기사들의 면면을 살폈다. 너무 놀라서 표정 관리도 못 하고 있던 기사들은 황태자의 시선이 닿자 모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는 주변 시선이 뒤늦게 신경 쓰였는지 말을 덧붙였다.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하는데. 망치를 다루는 전사는 처음 봐서 흥미가 생긴 거니까.”
“앗, 네에. 아유! 오해라뇨.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오해 같은 거 안 하긴. 실비아는 벌써 황태자와 애 낳고 영어유치원 보냈다가 운동회에서 이인삼각도 같이한 뒤, 결혼식 혼주석에 앉으며 눈물을 훔치고 손주 재롱에 즐거워하는 상상까지 끝마쳤다. 별 노력도 안 했는데 황태자가 넝쿨째 굴러들어오다니, 완전 횡재였다.
‘아니지, 어떻게 보면 직원 휴게실에서 쉬지 않고 훈련장을 찾은 것 자체가 노력이 아닐까? 그 덕분에 우라엘 황태자와 더 일찍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거고 말이야. 상태 창의 호감도가 가려져 있으니 확신할 순 없는 거지만.’
개인 훈련장이면 좀 더 긴밀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실비아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후후, 훈련하다가 아이코, 하면서 넘어지면 괜찮아? 라고 물으며 황태자가 다가오는 거지. 너무 아파요- 라고 징징대는 순간 황태자가 무릎에 입맞춤하며 이런 상황에서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사실 네가 좋아, 아기 새. 앞으로 평생 안 아프게 해줄게- 라고 말하고…. 서로의 입술이 가까워지고 으슥한 장소로 향하고…. 아이, 몰라!’
개인 훈련장에서 황태자와 가까워지는 상상을 하던 실비아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무심결에 눈을 돌렸다가 실비아의 꺼림칙한 미소를 발견한 기사 중 한 명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볼 일이 다 끝난 황태자가 떠날 기미를 보이자 흑기사단이 양옆을 호위했다. 그는 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사용인은 내가 직접 가르칠 테니까 그대들은 손대지 않아도 돼. 그럼 이만.”
흑기사단을 대동한 황태자가 훈련장을 떠난 뒤 기사들은 경악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 모두가 황태자의 처음 보는 특별대우에 놀란 상태였다. 하지만 실비아가 훈련장에 남아있기에 함부로 놀란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데이 단장이 샤이와 함께 헝겊 인형을 들고 와 훈련장에 배치했다. 단장은 단상에 오르더니 산만해진 기사단을 진정시켰다.
“자자, 이상한 생각들 하지 말고 훈련들 합시다.”
“넵!”
기사단들이 우렁차게 대답하자 단장이 구석에 멍하니 서 있던 실비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황태자와의 밀접 접촉 부작용으로 선 채로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실비아 님도 훈련 더 하다가 가실 거죠?”
“…네?”
실비아는 제 온몸을 팔로 감싸며 황홀해하는 자세를 취하다 그대로 굳었다. 황급히 몸을 바로 하고 데이 단장을 보자 그가 침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훈련 더 하고 가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