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차라리 집에 바로 갔으면 몰라, 어쩔 수 없이 훈련에 참여해야겠네.’
“여기 잠시 계세요. 바로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샤이는 그녀를 훈련장 한가운데 세워두곤 급하게 의무실로 뛰어갔다. 차라리 내가 가면 안 될까? 실비아가 급하게 샤이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는 날쌘돌이처럼 금방 사라져버렸다.
뻘쭘하게 서 있길 잠시, 우라엘 황태자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아, 저요? 엇, 이것 좀 놓고….”
스스로 걸어가려던 실비아는 늘 과잉 대응하는 흑기사단들에 의해 양쪽으로 제압당한 채 황태자 앞으로 끌려갔다. 다시 강조하지만 데려간 게 아니라 끌고 간 게 맞았다.
‘내가 범죄자야? 물론 추후에 황태자에게 범죄에 준하는 짓을 저지를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걸 눈치챈 거라면 감들이 너무 좋은걸!’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끌고 가니 너무 서러웠지만, 신분제 사회임을 감안해 감내했다. 이런 막무가내식 끌고 가기는 로맨스 판타지 막장 소설에서나 본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지엄하신 황태자 앞이니 얌전히 따라야지.
키가 큰 흑기사들이 양편으로 팔짱을 끼니 실비아는 대롱대롱 매달린 셈이 됐다.
“저하, 데려왔습니다.”
실비아를 황태자 앞에 내려놓은 기사들은 여전히 그녀의 양옆을 지키고 섰다. 훈련장에서 엄한 짓을 하는 건 꿈도 못 꾸겠다 싶었다.
‘휴, 끌려오는 찰나 우라엘 황태자와 썸을 타는 상상을 했건만, 일장춘몽일 뿐이었군.’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실비아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우라엘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미간이 살짝 좁아져 있었는데,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기사들이랑 술래잡기를 했다고.”
“네, 네에…. 다들 너무 강한 분들이시기도 하고, 저는 사람을 상대로 싸워본 적이 거의 없어서 대련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술래잡기로 제 실력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기사님들과 함께 훈련장을 쓰고 싶었거든요.”
실비아는 머뭇거리다 차분히 대답했다. 그 소식이 황태자에게 들어갈 줄이야, 설마 검은 속내를 들키진 않겠지. 그렇다면 정말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실비아의 대답에 그의 한쪽 눈썹 끝이 묘하게 올라갔다.
“나한테 말하지, 그걸 굳이 놀이까지 해가면서?”
“그게…. 원래는 구경하러 왔다가 즉석에서 마음먹은 것이라서…. 황태자 저하께 직접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어요. 제 불찰입니다.”
미처 황태자에게 말할 생각을 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낮의 실비아는 웃통을 깐 기사들에게 반쯤 미쳐있었으니까….
실비아의 대답에 황태자는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술래잡기 놀이 자체에 별다른 사악한 의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그는 턱을 살짝 까딱였다.
“그래. 앞으론 무슨 일이든 나한테 먼저 말하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실비아가 조심히 머리를 조아렸다. 생각해 보니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것도 아니고, 황태자 소속의 기사단들과 훈련장을 같이 쓰겠다는 조건으로 술래잡기를 하다니. 지나치게 까불다 못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이었다.
‘여기가 게임 세계지만 내가 빙의해 있는 실제 세상이란 걸 잠시 간과했어. 아무리 세이브 시스템이 있다지만,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실비아가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다짐하는 한편, 흑기사단들은 황태자의 관대한 태도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일개 사용인이 제멋대로 기사단의 훈련에 난입해 술래잡기를 한 셈인데, 처벌은커녕 경고조차 주지 않고 끝낸다니?
평소의 우라엘 황태자라면 상상도 못할 행동이었다. 그는 제 아래에 있는 자가 예측불허의 행동을 하는 걸 무척 싫어하니까. 어릴 때 암살당할 뻔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의 예민함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 바람에 황태자 궁에 유독 숨겨진 보호 마법이 많이 걸려있기도 했다. 흑기사단 모두의 머릿속엔 의문이 가득 들어찼지만, 황태자에게 무언가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다들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기도 했다.
실비아의 정수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그대가 기사단들과 함께 하는 훈련을 보고 싶군.”
“네, 근데 이게…. 사실 저는 남들과 훈련을 한 적이 없어서요. 송구스럽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제가 뭘 해야 할지 알려주신다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팔짱을 낀 황태자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약봉지를 든 채 뒤에 서 있는 샤이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앞으로 나오며 허리를 숙였다.
“네, 저하. 제가 실비아 양에게 훈련을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척하면 척인지 샤이는 황태자의 눈빛만 보고도 뜻을 알아들었다. 황태자가 상석에 앉은 뒤 샤이는 실비아를 데리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가 약봉지를 건네자 실비아는 자연치유를 선호한다고 손사래 치며 극구 사양했다. 멀쩡한 몸에 약을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몸이 괜찮아요. 약은 안 먹어도 돼요.”
“그러시군요.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어떤 걸 도와주셔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던전이 제국 변두리에 계속 나타나다 보니, 기사단들도 그에 대비해서 훈련을 해야 합니다. 현재 던전 경험이 있는 상관들은 모두 국경지대에 투입됐기 때문에 실비아 님의 도움이 절실하죠.”
“그렇군요. 주변 상황이 좀 안 좋은가 봐요.”
실비아는 또다시 던전 공략을 위해 한 달간 멀리 가야 한다던 노엘의 편지를 떠올렸다. 정화와 치유에다가 전투 능력까지 있는 만능 신관인 그가 바쁜 만큼, 다른 전투 가능 인력들도 모두 차출됐겠지. 그래도 아직 유경험자 위주로 부르는 것 보면 생각보다 급박한 상황까진 아닌 것 같지만.
실비아의 말에 샤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네.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주변국에는 피해 소식이 속속들이 들려오고 있어요. 다른 나라에 비하면 인재가 많은 저희 제국은 나름 평화로운 편이라고 볼 수 있죠. 수도를 중심으로 신관, 마법사를 포함 강한 전사들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황궁에 있는 기사들도 던전 대비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떤 것부터….”
그때 그들이 속닥대는 걸 지켜보던 우라엘 황태자의 입이 열렸다.
“뭘 그렇게 길게 말하는 거지? 계속 기사들을 세워둘 참인가.”
“아, 죄송합니다. 저하. 당장 훈련에 돌입하도록 하겠습니다.”
황태자는 무척 언짢은 기색이었다. 훈련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전후 상황 설명을 하며 대화를 하게 된 셈이니 그럴 만도 했다. 샤이는 진땀을 흘리더니 실비아에게 말했다.
“우선 검을 드시죠. 간단하게 짚 인형을 몬스터라고 생각하고 기본 훈련부터 함께 하는 걸로….”
“아, 저…. 저는 검이 아니라 마, 망치를 써요. 어쩌죠.”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두 달 넘게 망치 전사로 잘 살아왔으니 이제 와서 제 망치가 부끄러운 건 아니었다. 기사들과 훈련장을 함께 쓰고 싶다며 훈련을 도와줄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해놓고, 뒤늦게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무기가 다르잖아. 불속성 마법사가 물속성 마법사를 가르칠 수 없듯이 망치를 전용 무기로 쓰는 내가 검을 쓰는 기사들에게 도움이 될까?’
샤이는 잠시 눈을 크게 뜨며 놀라더니 표정이 환해졌다.
“망치를 쓰는 전사는 처음 보는데요. 그건 문제없습니다. 던전 공략하는 법을 한 수 가르쳐주십사 하는 거지, 검을 가르쳐주길 바란 게 아니니까요. 저희는 이미 검술훈련은 충분합니다.”
“정말요? 그건 듣던 중 다행이네요.”
실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샤이가 말을 이어갔다.
“혹시 전용 무기 꺼내실 수 있습니까? 던전 공략자들 중에는 가끔 물건저장이 가능한 이공간을 들고 다니는 분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아, 네! 저도 이공간이 있어요. 그럼 잠시만….”
인벤토리를 열려던 실비아는 어느새 모든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망치’ 얘기를 하고 나서부터 느껴지던 시선은 ‘이공간’이 있다고 하자 더욱 집중됐다.
‘여기저기서 주워듣기론 이공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흔하지 않다고 했던가? 백작가 차남인 노엘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 물론 루카는 내 인벤토리가 불완전할 때부터 명품 시계에 이공간을 넣고 다녔지만, 걔는 제국 재벌급이니까 제외하고.’
주목받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 맛에 명품을 들고 다니는 걸까? 실비아는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을 은근히 즐기며 손목으로 시선을 내렸다. 허공에서 인벤토리를 열면 왠지 기사들이 놀라다 못해 까무러칠 것 같았다. 루카처럼 액세서리에 이공간을 담아둔 것처럼 보이면 되겠지.
차고 있던 팔찌를 괜히 두드리는 척하며 속으로 인벤토리를 불러낸 실비아는 괜히 뒤적이는 척하며 망치를 꺼냈다. 새로 얻은 애물단지 망치가 허공에서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숨죽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은색의 망치에 새겨진 십자가는 실비아가 손을 흔들 때마다 햇빛에 반사돼 눈부시게 반짝였다.
“와, 엄청난데.”
“이야, 망치 때깔 죽인다.”
“쉿, 저하 앞에선 말조심해야지.”
기사들은 최고급 무기로 보이는 세련된 망치에 한번 놀라고, 무거워 보이는 망치를 아무렇지 않게 잡고 흔드는 실비아의 힘에 두 번 놀랐다. 사실 망치 자체에 ‘가벼움의 축복’이 걸려있는지라 들기 쉬운 거였지만, 그들이 이런 뒷사정까지 알 수는 없었다.
우쭐해진 실비아는 내친김에 망치를 들고 프라이팬 뒤집듯이 마구 뒤집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손잡이 끝에 달린 솔을 잡고 쌍절곤처럼 몸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옆구리와 등을 두드리고 심지어 허벅지 안쪽까지. 애석하게도 ‘가벼움의 효과’만 있는 거지, 살상력은 똑같았기에 몸 여기저기서 뼈가 어긋나는 우두둑-소리가 났다.
‘으으윽! 참자, 참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