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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42화 (342/372)

342화

참담함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던 실비아는 입술에 피를 철철 흘리며 포리쉐의 목에 목줄을 매주었다. 발에 치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포리쉐 뒤로 걸어간 실비아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줄을 흔들었다. 그러자 포리쉐가 신났는지 히잉- 하고 힘차게 울면서 즐겁게 달리기 시작했다.

“아우, 이런…. 포리쉐에~ 작작 달려. 도가니 나갈라. 언니 시체 치우고 싶니.”

포리쉐는 신나고 실비아는 헐떡거리는 죽음의 레이스가 시작됐다. 아무리 그녀가 던전 공략자 출신으로 체력이 좋다지만, 일반 말보다 뛰어난 외제마의 체력을 따라잡긴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포리쉐를 산책시키는 건지 끌려다니는 건지 모를 정도로 겨우 뛰어가며 씹어뱉듯 말을 내뱉었다.

“아우, 이, 망할…. 허억, 허억. 어우, 포리쉐야. 정말 잘 달리는구나. 너무 열심히 달리진 마. 활성산소 많이 나와서 쉽게 늙어! 마라톤 오래 한 사람들, 헉, 알지? 얼굴이 쪼글쪼글, 헉, 헉. 쪼글쪼글해질…헉. 해져라! 에라이….”

실비아는 헉헉대며 소심하게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마지막에 ‘에라이’라는 단어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포리쉐는 달리기에 정신이 팔려 저주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였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고 포리쉐의 달리기 속도가 여유로워질 즈음, 실비아는 둘을 바라보는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 흠칫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어디서 많이 본 말머리 하나가 기둥 뒤에서 보였다.

‘림보구나. 역시 시종의 말대로 포리쉐를 좋아한 게 맞았구만.’

기껏 숨는다고 숨었지만 커다란 말 몸뚱이가 기둥에 가려질 리가 없었다. 림보는 촉촉한 눈으로 포리쉐를 바라봤는데,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이 너무 또렷해서 짐승인데도 사랑에 빠진 게 확실히 보였다. 뒤에서 죽어가는 제 주인은 안 보이는지 검은 눈망울이 신나서 달리는 포리쉐에게만 집중됐다.

‘말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옛말 하나 그른 게 없구나. 주인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사랑에 정신이 팔려서는!’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못마땅해하던 실비아는 잡부가 된 림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그런 일까지 자처할 정도면 단단히 빠진 거겠지. 그녀의 입에서 쯧쯧-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얼마나 좋아하면 저렇게 정신이 팔렸을까 싶어 안쓰러워서였다. 그녀는 림보가 자신을 알아보길 바라며 수차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검은 눈망울은 여전히 포리쉐에게만 향했다.

“어휴, 림보! 이놈아! 허억, 네 눈엔! 고생하는, 헉. 나는 안 보이니!”

“…….”

“단단히 맛이 갔네, 갔어.”

실비아가 뭔 소리를 하든 림보는 여전히 아련한 눈으로 포리쉐만 쳐다보고 있었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눈먼 사랑이란 게 바로 저런 것일까, 저절로 혀를 차게 되는 넋 나간 모습이었다. 오히려 실비아의 외침에 포리쉐가 놀라서 달리기를 멈췄다.

“히잉?”

“아이고. 그래, 포리쉐야. 이 정도면 충분히 달렸어. 이제 우리 쉬자.”

실비아가 반색을 하며 포리쉐의 모가지를 끌어안았다. 뭐가 됐든 더 달렸다간 ‘포리쉐와의 지나친 산책으로 싸늘한 주검이 되다.’ 같은 데드 엔딩을 보게 될 것 같았다.

포리쉐는 수건을 가지고 온 실비아가 땀을 닦아주며 정리해주는 와중에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얘가 또 왜 이러지. 이상행동을 보이는 포리쉐 때문에 당황하던 실비아는 불현듯 림보가 있던 기둥 쪽을 쳐다봤다.

혹시, 림보를 찾는 걸까? 실비아의 시선을 따라 포리쉐도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흥! 하고 다시 시선을 돌려버렸다. 겉보기엔 림보를 무시하는 것 같았지만, 포리쉐의 행동이 아까와 달라졌다. 뭔가 림보 보라는 듯이 일부러 말갈기를 우아하게 털고, 결 좋은 속눈썹을 찰랑거리며 눈을 깜빡거리는 것 같았다.

‘설마, 포리쉐도 림보를 좋아하는 걸까?’

그러면 진작에 잘 돼야 했는데, 왜 림보는 짝사랑하는 남자처럼 저렇게 기둥 뒤에서 아련한 눈빛을 하는 걸까. 포리쉐의 행동을 지켜보던 실비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겠다. 새침데기 같은 포리쉐는 좋은 티를 잘 안 내고, 림보는 황궁에서 기가 많이 죽어 적극적으로 굴지 못 하는 것 아닐까.

‘뭔가 강력한 계기만 하나 있으면 둘이 잘 될 것 같아. 애초부터 황태자가 림보와 포리쉐가 맺어지길 원치 않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예뻐하는 반려마라면 원하는 대로 짝을 맺어줄지도 모르지. 으휴, 내가 어쩌다가 말들의 사랑을 진지하게 분석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실비아는 고개를 젓곤 포리쉐의 고삐를 잡았다. 더 이상 달리기에 흥미가 없어 보이는 포리쉐를 끌고 달리기장으로 나오자 림보가 화들짝 놀라며 말머리를 숨겼다. 그래봤자 몸뚱이가 다 보였지만.

입을 가리고 숨죽여 웃은 실비아는 포리쉐를 데리고 기둥 쪽으로 걸어갔다. 살랑거리는 베이지색 꼬리를 톡, 하고 건드리자 림보가 놀라서 돌아보았다.

“림보, 너 여기서 뭐하고 있어. 일은 다 끝났나 보네.”

“히잉!”

“흥!”

림보가 놀라는 모습에 포리쉐가 ‘흥!’거리더니 멀찍이 물러섰다. 그 모습에 림보는 더욱 기가 죽고…. 거참, 말들의 연애도 인간 못지않게 힘들구나. 도도한 포리쉐를 어떻게 하면 림보랑 이어줄지 실비아의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제 포리쉐를 집으로 데려가야 하거든. 림보 네가 함께 가줄래?”

포리쉐의 집이 있는 동산을 가리키며 손을 포개 잠자는 모션을 취하자 림보가 활짝 웃었다. 반면에 포리쉐는 고개를 휘젓더니 입으로 실비아의 손에서 고삐를 뺏곤 혼자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림보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얼른 쫓아가라고 말했다.

“포리쉐 집 가는 길 배웅해줘!”

림보는 멍하니 눈을 꿈뻑이더니 실비아의 재촉에 포리쉐의 옆을 함께 걸었다. 실비아는 단둘이 놔둘까 하다가, 혹시나 관리 태만으로 경고를 받을까 봐 몇 발짝 뒤에서 말들의 뒤를 쫓아갔다.

림보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던 포리쉐는 어느 순간 옆을 힐끗 보더니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말소리라서 실비아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으음, 조만간 말 커플이 하나 탄생하겠는걸.’

아주 조금만 등을 떠밀어주면 되는 건데, 그 조그만 용기가 없어서 림보가 계속 삽질을 한 것 같았다. 실비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어색하게 교감을 나누는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포리쉐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준 실비아는 림보를 보낸 뒤 털을 또 빗겨주고 목욕시중까지 들고 나서야 퇴근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휴우, 엘리셔스 월드 인턴 때는 칼퇴한다는 기쁨이 있었건만…. 이게 퇴근 후 자격증 시험 준비하는 직장인의 괴로움, 뭐 그런 걸까.’

탈의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실비아는 무거운 몸을 애써 바로 하며 훈련장으로 향했다. 내일 보자고 인사를 나누며 퇴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현생에서는 프리랜서로 주 3회를 자율적으로 일하며 노닥거렸었는데, 어쩌다가 제 신세가 이렇게 처량해진 건지.

‘이렇게 노력했는데 만약 천국에서도 일해야 한다면 정말 괴로울 거야.’

세비스는 얼마나 행복할까. 혼자서 즐겁게 퇴근한 뒤 발 씻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있겠지. 깊은 한숨을 쉬고 터벅터벅 걸어간 실비아는 훈련장에 가까워질수록 눈빛이 점점 맑아졌다. 저기에 실비아의 기사들(?)이 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울끈불끈한 기사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하루를 보내는 것, 인생 뭐 별거 있나, 이런 낙에 사는 거지.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진 실비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어서 사랑스러운 기사들과 함께 지독하게 얽히고 싶었다.

그러나 훈련장 앞에 선 그녀의 눈에 실망이 감돌았다. 낮과 달리 기사들이 웃통을 까긴커녕 갑옷까지 단단히 입고 훈련하고 있었다. 줄 맞춰 서서 구령을 외치는 것을 보니 저번과 달리 정식 훈련인 모양이었다.

‘뭐야, 저렇게 제대로 훈련 중이면 내가 끼어들기 좀 그런데?’

실비아는 나무 뒤에 숨어서 훈련장을 관찰했다. 숨어야 하는 이유가 딱히 있는 건 아니지만, 웃통을 벗어서 친숙했던 기사들이 중무장한 걸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황궁은 현재 데드 엔딩 지뢰밭이나 다름없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어, 저 사람은….’

아니나 다를까, 은색 머리카락이 보인다 싶더니 데드 엔딩 제조기 황태자가 훈련장에 있었다. 그는 행렬의 맨 앞에서 훈련을 지켜봤다. 그의 옆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는데, 실비아는 남주를 만나서 군침이 돌긴커녕 뒷덜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저 사람들은 우라엘 황태자를 지키는 7인 뭐시기 아냐? 좀 위험해 보이는데. 오늘만 날이 아니니 그냥 갈까.’

굳이 7인의 흑기사들이 대놓고 철통 수비 중인 곳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입맛이 싹 달아난 실비아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치고 있는데, 뒤에서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흰둥이를 닮은 샤이였다.

“실비아 님, 저희랑 함께 훈련하러 오셨군요. 안 그래도 우라엘 황태자 저하께 이미 보고해 두었습니다. 저하께서 실비아 님과 함께 하는 첫 훈련을 보러 오셨어요.”

“네에?! 아, 저는 오늘 속이 좀 안 좋아서….”

“그건 걱정 마세요. 훈련장 한편에는 의무실이 마련돼 있으니까요. 배탈약을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저는 현대 의학을 별로 믿지 않아서…. 어엇.”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은 샤이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실비아의 등을 밀었다. 약을 안 먹겠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훈련장 안으로 샤이와 실비아가 들어서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애초부터 황태자가 그녀도 훈련에 참여한단 걸 이미 보고받았으니, 들킨 이상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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