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앗, 잡지 마세요.”
급히 뒤로 물러난 세비스의 얼굴이 여러 이유로 빨개졌다. 림보한테 동질감을 느껴서 울컥했었는데, 본의 아니게 추태를 보인 것 같았다. 그리고 실비아가 백허그를 하는 순간 따뜻한 온기에 또…. 망토를 입어서 망정이지,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하다가 망토 자락을 잡는 실비아의 손에 흠칫했다.
“저 멀쩡해요, 실비아 님. 이거 놓으세요.”
“누가 봐도 안 멀쩡해 보였어. 이제 안 하는 거지?”
실비아가 망토를 흔들자 세비스가 몸을 파드득 떨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옷자락만 스쳐도 선다는 그런 건가.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반응하는 제 몸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네. 제 몸에… 아니에요. 점심시간 다 끝나가요, 빨리 갑시다.”
“으응, 그래.”
세비스는 몸에 손대지 말라고 실비아에게 말하려다가 참았다. 너무 차가워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실비아가 손대는 게 싫지 않기도 했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지. 손대지 말았으면 좋겠지만, 한편으론 격하게 손대줬으면 좋겠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마음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실비아가 뒤에서 졸졸 쫓아갔다. 세비스는 기다리지도 않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는데, 그의 속을 모르는 실비아 입장에선 많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애써 세비스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세비스가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 성체가 돼서 그런 걸까.’
저번의 개망신 사건 이후로 실비아는 세비스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성체가 된 세비스가 뒤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나- 생각할 따름이었다. 천천히 성장하는 인간이랑 달리, 세비스는 성장통을 겪으며 가재가 탈피하듯이 한꺼번에 자랐으니 여러모로 예민할 터였다. 그게 아니면 세비스의 이상한 행동을 설명할 다른 이유가 없었다.
사용인 센터에 도착하자 세비스가 평이한 얼굴로 뒤돌았다. 아까와 달리 한결 차분해진 표정이었다.
“실비아 님, 그럼 퇴근 후에 봐요. 같이 집에 가실 거죠?”
“아, 잠깐. 나 사실 훈련장에서 기사분들이랑 함께 훈련하기로 했어. 알지? 축제 때 던전 공략자인 걸 좋게 보신 황제 폐하 덕에 내가 황궁에 취직하게 됐잖아.”
“네. 아, 그러셨구나….”
세비스는 가슴에 둔탁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억누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훈련하는 게 뭐 어때서, 라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함께 퇴근하지 않는 실비아에 대한 서운함과 그녀와 함께 훈련받을 기사들에 대한 질투심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이런 못난 마음을 티 낼 순 없었기에 세비스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엄청 바쁘겠는데요? 저는 늑대족이라 맨손으로 싸우니까, 기사님들과 함께 훈련할 수 없겠네요. 실비아 님과 함께 퇴근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말하다 보니 결국 아쉬운 티를 내고 말았다. 지극히 충동적인 언사였다. 출퇴근을 함께 할 수 있을 줄 알고 좋아했더니, 실비아는 첫 출근날부터 바쁜 일을 또 만들었다. 아파져 오는 가슴을 다독인 세비스는 실비아가 열심히 사는 모습에 감탄했다.
어쩜 이렇게 열심히 살까? 저도 열심히 살기론 누구 못지않은데 자신보다 더한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집에 함께 있을 땐 세상 게으름보인데, 맡은 일 하나는 성실하게 해내다 못해 초과 업무까지 해내는 게 신기했다.
‘정말 성실하신 분…. 이런 분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
성실한 걸 미덕으로 삼는 세비스는 실비아의 성실한 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곤 했다. 처음 반하게 된 계기도 열심히 사는 실비아를 보며 감탄하다가 감정이 깊어진 거였다. 가끔 말도 안 되게 게으른 모습을 볼 때면 평소 일할 때와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중에 와서는 그조차 반전 매력으로 느껴졌다.
지금에 와서는 처음 반한 계기는 중요하지 않고 실비아라는 사람 그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콩깍지가 한번 끼면 뭔 짓을 해도 소용없다던가. 이제 쉬는 날이면 과자 부스러기를 배에 쌓으며 의미 없이 깔깔대는 게으름보 실비아를 보고도 사랑스럽단 마음이 물씬 드니, 아주 중증도 이런 중증이 없었다.
실비아를 응시하는 세비스의 붉은 눈이 그윽해졌다. 아까부터 미친 것 같더니 이제 뭘 단단히 잘못 먹은 것 같은 세비스의 눈빛에 실비아는 급히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게. 한번 네 얘기도 훈련장에 가서 물어볼게. 함께 못 가서 아쉽지만, 퇴근 먼저 해! 난 밤 되기 전에 집에 돌아갈 테니까! 일 잘하고!”
“네, 아쉽네요…. 집에서 봐요.”
토도독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리고 세비스는 쓸쓸히 뒤돌았다. 황궁에서 함께 일하게 되면 매시간 함께하게 될 줄 알고 좋아했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아니지, 그래도 출근 시간에 함께 하는 게 어디야. 점심시간에도 매일은 못 보겠지만 가끔 보게 됐잖아. 이것만으로도 난 괜찮아.’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안 들리게 될 때까지 세비스는 가만히 쓰린 가슴을 문질렀다. 이 통증은 언제쯤 사라질지, 차라리 제 주인이 눈앞에서 누군가와 이어지는 걸 확실히 봐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샵에서 관리받고 점심을 맛있게 먹은 포리쉐는 오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때깔이 고와 보였다. 안 그래도 하얀 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환상이 보인다고나 할까. 마침 포리쉐는 시종이 설명한 대로 오수에 들 시간이라 실비아도 덩달아 옆에 누워 농땡이를 피우기로 마음먹었다.
‘이거 가만 보니 무척 꿀알반데? 돈 많이 주지, 밥 잘 나오지, 노동 강도도 낮지. 평생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하릴없는 양갓집 규수의 몸종이 이런 기분일까. 아니, 어찌 보면 그 몸종보다 제 처지가 더 좋은 듯했다. 포리쉐는 사람 말을 하지 못하니 저한테 이것저것 부릴 일이 없으니까. 꿀알바를 얻은 기쁨에 한껏 취한 실비아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갔다. 포리쉐 전용 수면실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덕에 무척 따뜻했다. 노곤한 얼굴이 된 그녀는 포리쉐 옆에 웅크리고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늘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 얌전히 잠이 들 것 같았던 포리쉐의 눈꺼풀이 걷히더니 불만이 서린 눈망울이 드러났다.
“히잉!”
“…어? 왜왜. 뭐가 문제야.”
투레질을 한 포리쉐는 벽 한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돌아보니 얇은 이불이 접혀있는 게 보였다. 얼른 이불을 포리쉐에게 덮어준 실비아는 토닥토닥거리며 포리쉐를 재우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말은 불만이 아직 남아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뭐가 문제지…. 아!”
설명서를 급히 뒤적인 실비아는 포리쉐가 낮잠에 들 때 항목을 찾아냈다.
“동물 빗으로 꼼꼼히 그것의 털을 빗겨준다…. 음, 그래. 이제 괜찮니? 옳지.”
급히 손을 비벼 동물 빗을 불러낸 실비아가 포리쉐의 몸통을 빗겨주었다. 그러자 포리쉐가 얌전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손을 떼려고 할 때마다 포리쉐가 계속 깼고, 심지어 점점 까다롭게 온몸을 빗겨주길 요구했다. 농땡이를 부릴 수 있을 줄 알고 좋아했던 실비아는 한 시간 내내 포리쉐의 온몸을 골고루 빗겨주며 땀을 줄줄 흘려야 했다.
‘망할. 그럼 그렇지. 이놈의 게임 세계가 내가 쉬는 꼴을 두고 볼 리가 있나.’
따뜻하다고 느꼈던 방이 찜질방으로 변한 것 같은 착각이 들 무렵, 포리쉐는 기지개하듯 몸을 일으켰다. 설명서를 보니 눈곱도 떼주고, 세수도 시켜주고, 다시 말발굽도 닦아주고 기타 등등…. 이것저것 하다 보니 순식간에 실비아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다.
‘아우, 피곤해. 꿀알바 취소! 림보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차라리 황태자를 돌보는 게 얘 돌보기보다 쉽겠어!’
그 다음은 포리쉐 전용 달리기장으로 데려갈 차례였다. 홀쭉해진 얼굴로 포리쉐를 데려가던 실비아는 점차 무언가 크게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그 생각은 심심해하는 포리쉐를 위해 앞에서 춤을 추며 재롱을 떨면서 시작해, 달리기장으로 향하는 포리쉐 앞에 레드카펫을 깔아줄 때 정점을 찍었다.
‘더럽게 할 일 많네!’
제국의 작은 태양의 반려마를 돌보는 건 상상보다 훨씬 피곤한 업무였다. 외제마 자체가 천성이 무척 개복치 같았던지라 까다로웠는데, 더더군다나 주인인 황태자를 닮은 포리쉐는 보통 외제마들보다 곱절은 더 까탈스러웠다. 림보의 경우엔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을 본 순간 이미 대접받기를 상당 부분 포기했었기에 그녀가 미처 겪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후우…. 이제 달리기장이란다. 자! 마음껏 달리렴.”
실비아는 굽신거리며 달리기장까지 레드카펫을 깐 뒤에 울타리 문을 열었다. 흥흥거리며 도착한 포리쉐와 그녀의 퀭한 눈이 마주쳤다. 눈으로 욕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포리쉐의 눈이 표독스러워졌다. 놀란 실비아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저 까다로운 것…. 말 못 하는 외제마라도 머리가 영특해서 인간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들었다. 눈을 내리깐 실비아는 불평불만도 함부로 입 밖에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꿍얼거렸다.
“힝? 푸르르!”
달리기장에 들어선 포리쉐는 또 뭐가 불만인지 투레질하며 말발굽으로 실비아를 툭툭 쳤다. 뭐 어쩌라는 거지? 실비아가 다 죽어가는 동태눈깔로 여기저기를 돌아보다가 설마? 하며 달리기장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포리쉐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같이 달리자는 건가? 사람인 내가 네 템포에 맞춰 달리라고? 이 망할 외제마 같으니!’
반려동물과 함께 놀아주는 건 주인의 기본 도리. 그렇다고 바쁜 황태자가 포리쉐랑 계속 놀아줄 수 없으니 실비아가 그 고생을 대신 할 수밖에. 그녀가 달리기장 안으로 들어서자 포리쉐가 울타리에 걸려있던 끈을 입에 물곤 실비아에게 건넸다. 자세히 보니 목줄이었다.
‘반려마를 강아지처럼 산책시켜야 하는 건가? 이 달리기장 안에서? 이게 말이 돼? 극기 훈련도 이 정도는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