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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40화 (340/372)

340화

“으응. 시종님 말로는 그렇다네. 림보를 직접 만나봐야 더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노는 걸 좋아하는 림보가 스스로 잡부가 되길 자처하다니…. 뭔가 착오가 있는 것 아닐까요.”

세비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림보를 만나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

시종에게 듣기론 오늘 파티 도우미를 한다고 했었다. 세비스는 지나가던 사용인에게 물어 파티가 열리는 장소를 알아냈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실비아의 소매를 잡았다.

“점심시간 지나기 전에 잠시 가 보죠. 지금 쉬고 있을 테니까 얘기할 짬이 날지도 모르겠어요. 전 오늘 황궁 견학 온 아기들한테 타코야키를 만들어 줬었는데, 아마 그거 말고 다른 파티가 있었나 봐요.”

“그래. 시간이 아직 남아있으니까 얼른 가 보자.”

둘은 사용인이 말한 장소로 빠르게 뛰어갔다. 파티 장소는 야외. 황궁 안이 워낙 넓은지라 일부 장소는 고위 귀족들이 허가를 받고 파티를 열기도 했다. 악기 연주와 함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잔잔히 들리는 파티 장소에 도착한 둘은 커다란 나무 뒤에 숨었다.

“초대받은 객들이 아니면 파티장에 들어갈 수 없어요. 함부로 들어갔다간 파티 방해로 참수당할 수도 있거든요. 여기 숨어서 림보를 찾아보죠.”

“뭐?! 그럼 그냥 다음 기회를 노리자. 황궁에 있다 보면 림보를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실비아가 뒷걸음질 치자 세비스가 그녀의 퇴로를 막았다.

“최악의 경우에 그렇단 거죠. 안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는 한 목을 날리기야 하겠어요? 하지만 귀족이 주최한 파티인 만큼 함부로 굴었다간 무거운 처벌을 받긴 할 테니, 여기에 숨어서 림보를 찾아보죠.”

“그, 그래. 참수당한다니, 농담이 참 심해! 농담이지?”

실비아의 물음에 세비스는 대답하지 않고 나무에 바짝 붙었다. 그는 고개만 살짝 내민 뒤 파티장 안을 훑었다. 그를 따라서 실비아도 고개만 빼꼼 내밀어서 파티장을 주시했다. 림보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초록빛 눈이 곧 커다래졌다.

“저기…! 림보 아냐?”

실비아가 다급하게 속닥이며 한 곳을 가리켰다. 파티장 한 편에 마련된 나무 무대에서 림보가 왕자 옷을 입은 배우를 태운 채 공연 중이었다. 왕자역 배우가 우렁차게 대사를 치자 림보가 힘없이 앞발을 들며 연기를 해냈다.

“세상에! 굶기는 것 아냐? 저 힘없는 연기를 봐. 흑, 가엾은 림보!”

“쉿. 굶기는 것 같진 않지만, 확실히 힘없어 보이긴 하네요.”

실비아가 울먹거리자 세비스가 입에 손가락을 대며 주의시키곤 대답했다.

림보는 저번에 감시소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얼굴에 고생한 티가 났다. 윤기가 좔좔 흐르던 털이 억세졌고 눈 밑이 푹 가라앉았다. 사실 멀리서 봐서 정확하진 않지만, 림보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실비아 눈엔 그래 보였다.

짝짝짝!

잠시간의 여흥이었는지 공연은 금방 끝났고, 무대에서 내려온 림보가 힘없이 구석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세비스와 실비아는 눈빛을 주고받은 뒤 림보가 가는 곳으로 얼른 뒤따랐다.

가까이서 본 림보의 모습은 더 안쓰러웠다. 땀이 났는지 사용인이 림보의 목에 수건을 걸어주더니, 주먹밥이 담긴 접시를 땅에 놓고 갔다. 림보는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주먹밥을 먹어 치웠다. 실비아의 눈엔 그 모습이 마치 고된 노동을 마친 노예가 새참을 먹는 것처럼 보였다.

“안 되겠어. 림보랑 얘기를 해봐야…!”

눈물이 그렁그렁한 실비아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세비스가 그녀를 제지했다.

“제가 할게요. 실비아 님은 아예 말이 안 통하시잖아요.”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실비아에게 나무 뒤에 숨어 있으라고 한 세비스는 조심스럽게 림보에게 다가갔다. 늑대로 변하면 림보의 말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데. 고민하던 세비스는 덩치가 커서 눈에 더 띌 것 같아 이대로 다가가기로 했다.

실비아는 나무 뒤에 숨어 둘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세비스가 나타나자 림보가 깜짝 놀랐다. 그러다가 고개를 젓기도 하고, 은은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잠시 뒤 림보가 파티장 안으로 들어가자 세비스가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림보가 뭐래?”

“일단 가면서 얘기하죠.”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들은 걸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세비스가 나타나자 깜짝 놀랐던 림보는 다시 차분해졌다고. 얘기 다 들었다고, 왜 감시소를 나와서 황궁에서 머무르고 있냐며 누군가의 강압이 있었냐고 묻자 림보는 다 자기 선택이었다고 했단다. 림보 스스로 남기를 결정했다던 시종의 말은 사실이었다. 세비스가 무슨 이유 때문이냐고 물었지만, 림보는 뜻 모를 소리만 했다는 것.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던 실비아가 그를 재촉했다.

“뜻 모를 소리? 무슨 소리를 했는데?”

“가랑비처럼 스며들고 싶다고….”

“뭐?”

실비아는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세비스는 한 번 더 림보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가랑비처럼 스며들고 싶다니. 정말 뭔 소린가 싶었다. 애초부터 말이 시적인 문장을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식을 한참 벗어났지만, 상식을 벗어난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실비아는 놀라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풍나무에서 쓸쓸히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잡고는 중얼거렸다.

“림보가 못 보던 사이 시인이 다 됐구나. 맞다. 저번에 사랑이 어쩌고 하지 않았나? 림보가 좋아하는 말이 여기 있는 것 아냐?”

“어? 그렇네요. 사랑에 빠진 게 아니면 황궁에서 굳이 버틸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황궁에 있는 말과 사랑에 빠진 걸까요?”

“음, 그럴 수도 있겠어. 일단 지금은 림보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자. 어차피 황궁에 있으니까 위험하진 않겠지. 조금, 험하게 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본인이 선택한 거니…. 엇, 맞다!”

실비아는 잊고 있던 얘기를 번뜩 떠올렸다. 시종이 림보가 포리쉐한테 반해서 황궁까지 쫓아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땐 시종의 주관이 들어갔다고 생각해서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종합해보니 아귀가 딱 들어맞았다.

“포리쉐인 것 같은데?! 황태자 저하의 반려마 말이야. 시종 말로는 림보가 포리쉐한테 반해서 황궁까지 쫓아왔다고 했었거든!”

“그래요? 거참, 림보는 왜 하필이면 황태자 저하의 반려마한테 반해서…. 쉬운 상대가 아니잖아요.”

세비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말하다 보니 제 처지랑 림보의 처지가 흡사한 것 같아서였다.

‘누가 같이 살던 식구 아니라고, 사랑도 비슷하게 하는구나.’

실비아는 옆에서 걷는 세비스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어쩌겠니. 좋다는 걸 어떻게 말려. 사랑이란 참 놀라워. 노는 걸 좋아하던 림보를 저렇게 노역하게 만들다니.”

“네. 놀랍죠. 사랑은 나를 나답지 않게 만들잖아요.”

갑자기 떨어진 낙엽을 주운 세비스가 가을 타는 남자처럼 쓸쓸한 눈빛을 하더니 시 같은 문장을 구사했다. 늑대도 사람처럼 가을을 타나? 실비아는 소리 내지 않고 몰래 웃었다.

“…그것참 노래 가사 같네. 엄청 낭만적인 말이야. 아! 림보의 사랑이 이뤄지면 좋겠어. 가끔 림보가 포리쉐 산책길에 동행한다니까, 내가 둘이 이어지게 도와줘야지.”

가을 타는 사람 앞에서 웃어버리면 실례다. 진지한 표정을 한 실비아는 세비스의 낭만을 칭찬한 뒤 림보의 사랑을 이뤄주겠다고 다짐했다.

실비아의 말에 어쩐지 세비스의 표정이 더 쓸쓸해졌다. 그는 먼 곳을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도와준다고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포리쉐가 일단 림보를 좋아해야 하겠지만, 잘 되면 좋겠네요.”

“아, 그렇지.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직접 봐야 판단이 되겠어. 정말 아니다 싶으면 림보가 포기하게 만들어야지.”

실비아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세비스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갔다. 그는 림보한테 감정이입을 제대로 해버렸다.

“…그래요? 정말 안 된다 싶으면 포기하게…. 그렇죠.”

“응. 정신 차리라고 해야지.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대시하는 건 잘못된 집착이야.”

야무지게 말하는 실비아에 세비스가 흐릿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죠…. 아니다 싶으면 저한테 말해 주세요. 림보는 제가 아주 반 죽여 놓을게요. 정신 차릴 때까지 혼쭐을 내겠어요….”

“응? 반 죽일 필요까지야. 뭐야, 너 왜 그래.”

앞을 보며 얘기하던 실비아는 과격한 말에 뒤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세비스는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건지 길가에 서 있는 조각상의 머리통에 멍하니 이마를 맞부딪치는 중이었다. 연거푸 약하게 이마를 부딪친 세비스는 영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조각상과 눈싸움을 시작했는데, 모르는 이가 보면 주정뱅이인 줄 알까 겁났다.

“세비스, 왜….”

“포기해, 림보 이 자식아. 포기하라고!”

이제 세비스는 조각상이 림보로 보이는지 어깨를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조각상이 부서질까 기겁한 실비아가 그의 곁으로 뛰어갔다. 자세히 관찰한 실비아는 안도했는데, 그가 앙탈 부리듯 조각상을 약하게 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액션만 과격하지, 주먹이 조각상과 닿는 순간에는 파워를 줄였다.

‘세게 내려치진 않네. 뭘 해도 손해는 안 볼 애로군.’

다행히 자본주의에 지배당한 세비스의 뇌가 고가의 조각상이 파괴되는 걸 막았다. 하지만 약하게 힘 조절하며 때리니 조각상은 멀쩡한 데 반면, 세비스의 맨주먹엔 점점 생채기가 생겨났다.

‘뭐야? 대낮에 술을 먹었나? 아무리 그래도 상처가 날 때까지 조각상을 때리다니.’

이대로 놔둬선 안 되겠다. 실비아가 뒤에서 허리를 부여잡고 말리자 그의 몸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세비스는 몸에 닿는 온기에 정신을 차리곤 소스라치듯 놀랐다. 시선을 내린 그는 제 허리를 잡은 실비아의 팔에 경악하곤, 활어처럼 몸부림치며 손을 떼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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