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39화 (339/372)

339화

어쩐지 좀 쓸쓸한 눈빛이었는데, 일터에서 보니 새삼 세비스가 성숙해진 게 확연히 느껴졌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게 뻗은 체형이며 드레스 셔츠가 터질 것 같은 단단한 가슴팍, 바지 천으로 언뜻 비치는 허벅지 근육의 윤곽이 그랬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세비스의 모습을 감상하던 실비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제 눈깔을 세게 내리쳤다.

‘악! 내가 미쳤나? 뭘 또 자세히 보고 자빠졌어. 이놈의 눈깔을 쳐버리든가 해야지!’

그녀는 찰싹찰싹-소리를 내가며 정신없이 눈두덩을 때렸다. 눈앞에 별이 번쩍하더니 사후세계 입구가 보였다.

요란한 소리에 뒤돌았다가 길 한복판에서 자해를 벌이고 있는 실비아를 발견한 세비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비아 님! 눈은 왜 그렇게 때리고 계세요? 모기가 있나요?”

“으윽, 아냐. 아우, 눈이 안 보여. 잠시만 기다려줘.”

실비아는 헤롱헤롱하며 벽에 손을 짚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시야가 다시 밝아지고 세비스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실비아를 내려다봤다.

“모기가 있긴 했나 보군요. 눈이 완전 퉁퉁 부었어요.”

“아냐, 이건 힘 조절을 안 하고 때렸더니…. 어휴, 일단 복지과로 가자.”

너무 세게 때린 탓에 다래끼가 난 것처럼 눈이 부풀어 올랐다. 실비아는 주머니와 미니백을 뒤적이다가 혹시나 해서 <마법의 물주전자>를 불러냈다. 차가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대자 부어올랐던 눈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오, 역시. 이거 완전 의외의 꿀팁이네.’

주전자를 눈에 대며 걷는 실비아를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이상하게 힐끗대며 지나갔다. 뜨거웠던 기운이 가라앉는 것 같자 실비아는 물주전자를 인벤토리에 넣곤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세비스, 봐봐. 좀 괜찮은 것 같아?”

“…괜찮네요.”

세비스가 바닥을 보면서 낮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비아는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세비스를 흘겨보며 부루퉁하게 뺨을 부풀렸다.

“뭐야, 보고 말해. 눈이 가라앉았냐니깐?”

“뭘 계속 물어봐요. 물 주전자를 한참 댔으니 당연히 가라앉았겠지.”

실비아가 얼굴을 들이밀자 세비스가 고개를 아예 반대편으로 홱 돌려버렸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뭐야, 왜 저래. 눈이 아직 흉한가? 만져보니 가라앉은 것 같은데….’

사실 세비스는 뒤늦게 그녀의 시녀복 차림을 보곤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쫑긋한 귀가 달린 머리띠에다가 푹신한 꼬랑지라니. 완전히 취향 저격이었다.

‘너무 귀여워. 그리고….’

귀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엄한 상상이 드는 게 문제였다. 며칠 만에 황궁으로 출근한 세비스는 친하게 지내는 수인 시종들과 함께 점심을 먹은 뒤 간단하게 차를 마셨다.

그 자리에서 세비스가 성체가 된 기념으로 시종들이 성교육을 가장한 적나라한 경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비스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 살을 잔뜩 붙여서 자극적인 얘기를 해댔다.

대부분의 얘기는 수인끼리의 일화였기에, 세비스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실비아와 연관 지어 생각하진 못했다. 그중 하나가 수인끼리 교미를 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는데, 애인의 꼬리를 올려서 이렇게 저렇게 했다는 말을 들은 세비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었다.

그 얘길 듣고 애써 잊어먹고 있었건만, 실비아의 시녀복에 달린 귀여운 꼬리를 보자마자 자동으로 야한 장면이 연상된 것이다.

‘왜 저런 꼬리를 시녀복에…. 저러면 이상한 생각이 들잖아. 진짜 수인들은 다 꼬리를 감추고 다니는데.’

실비아가 프릴 달린 시녀복을 입은 것만 해도 갓 성체가 된 상상력 풍부한 세비스로선 퍽 곤란한 일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꼬리가 달려있다니. 점심에 들은 얘기와 결합된 야한 상상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시녀복을 입은 실비아를 침대에 거칠게 던진 뒤, 치마를 걷고 꼬리를 올리면….

세비스는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저절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나가는 망상의 끝엔 실비아를 안는 제 모습이 존재했다. 여기는 일터다, 여기서 세우면 정말 끝난다고 여러 번 자기암시를 걸어봤지만, 점점 아래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망했다. 여기서 세웠다간 내가 그동안 쌓아둔 사회적 체면이….’

아래가 제대로 기립할 것 같은 위기에 세비스의 관자놀이에서 진땀이 흘러내렸다. 실비아가 옆에서 뭐라 뭐라 꿍얼댔지만, 위기가 닥친 세비스의 귀엔 그냥 스쳐 갈 뿐이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두리번거리다가 공용망토가 있는 탈의실을 번뜩 떠올렸다.

“복지과가 이쪽인….”

“저기, 실비아 님! 여기 카운터 앞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세비스는 대답도 듣기 전에 쌩하니 가버렸다. 실비아는 우사인 볼트처럼 뛰어가는 세비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왜 저래?’

“아이고! 세비스 씨. 제발 노크 좀 합시다.”

“죄송합니다. 급해서요.”

탈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세비스는 헐벗고 있는 사용인과 마주치곤 급하게 사과했다. 그는 후다닥 뛰어가 옷걸이에 걸려있는 공용망토를 걸쳤다.

‘왠지 앞으론 이 망토를 매일 입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어차피 날씨도 점점 쌀쌀해지겠다, 이상해 보이진 않겠지.’

세비스는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힌 채 탈의실 전신거울을 살폈다. 무릎까지 오는 풍성한 벨벳 망토 덕에 가장 가리고 싶었던 곳이 완벽하게 가려졌다. 민망함에 괜히 앞머리를 다듬은 그는 천천히 실비아에게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아래가 가라앉아서 어기적거리며 걷지 않아도 됐다.

“뭐야, 급하게 뛰어가길래 뭐 하나 했더니 망토 때문이었어?”

“네.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콜록. 요즘 날씨가 오락가락하잖아요. 실비아 님도 탈 나지 않게 따뜻하게 입으세요.”

“이런 건 언제 산 거야?”

실비아가 망토를 손가락으로 잡곤 펄럭였다. 옷이 날개라고 하던가. 세비스가 입으니 흔한 벨벳 망토도 명품 옷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세비스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뇨. 이건 사용인들 공용망토예요. 황궁 내에서만 입을 수 있어요. 아마 여자 탈의실에도 있을걸요?”

“아, 정말? 산 건 줄 알았어. 근데 오늘 날씨가 망토까지 걸칠 정도로 춥진 않은 것 같은데….”

실비아의 눈이 창문 밖으로 향했다. 비가 오긴 했었지만, 사용인들 옷 자체가 긴 소매의 가을옷이었기에 굳이 외투를 걸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 지레 찔린 세비스는 눈치를 보다가 한 번 더 기침 소리를 냈다.

“콜록, 켈룩!!”

“아오, 조심해. 감기 걸린 것 아냐? 우리 식구 둘 다 감기에 걸리면 답도 없어. 돈 벌 사람이 없다구. 자가격리라도 시켜야 하나….”

“아직 감기는 아녀요. 따뜻하게 입으면 금방 나을 거예요.”

아래를 완벽히 가린 덕에 세비스의 발걸음이 위풍당당해졌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서도…! 괜찮다! 일차로 바지가 가려주고, 이차로 망토가 가려주니까.

세비스는 실비아를 데리고 복지과에 도착했다. 둘의 사용인 등록증을 확인한 복지과 직원은 잠시 수정구 앞에 머무르더니, 팸플릿에 이것저것 적어서 건네주었다.

“부싯돌 대출하시게요?”

“아뇨. 당장은 아니고요. 일단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보려고 온 겁니다.”

직원의 물음에 답한 세비스는 팸플릿으로 눈을 내렸다. 방긋 미소 지은 직원은 팸플릿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일단 두 분 모두 황궁에서 일하신다니 최우선 순위세요. 물론 최우선 순위가 몇천 명 있긴 합니다만…. 뒤에 수만 명을 제쳤으니 유리한 셈이죠.”

“유리? 유리한 건가요. 몇천 명이면 해볼 만한 것 같기도….”

세비스가 옆에 멀뚱히 서 있던 실비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가 팸플릿의 한 군데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일 년간 무이자라는데요?”

“허얼?! 대박이네. 근데 몇천 명이면… 많은 거야, 적은 거야? 어쨌든 잘 됐다!”

무이자로 일 년이라니. 완전 거저였다. 실비아의 눈앞에 근사한 마구간이 있는 벽돌집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푼 가슴을 안고 직원과 눈을 마주쳤다.

“저기, 부싯돌 대출 경쟁률이 얼마나 되는 건가요?”

“음, 대출 조건에 부합하는 집이 많진 않아서요. 한 100대 1 정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되세요.”

“아아….”

100대 1이라니. 순간 충격을 먹었지만, 무이자라는 파격적인 조건치곤 경쟁률이 낮은 것 같기도 했다. 일 년간 공짜로 사는 셈이니 누구나 신청하려 들지 않을까.

“그럼 마구간이 있는 벽돌집 같은 경우는 경쟁률이 더 세겠네요?”

“아, 그건…. 현재 반려마를 키우고 계신가요?”

“네. 키우고… 아니, 키우고 있다가 잠시 출타 중인데요.”

림보는 현재 황궁에서 잡부로 일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비아가 함께 가자고 하면 따라나서지 않을까 싶었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아니, 아무리 말귀를 잘 알아먹는다지만 얘기가 통하려나.

결국 데려올 테니 이걸 키우고 있는 거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거리던 실비아는 결국 출타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직원의 눈에 의문이 차올랐다.

“출타 중이란 건 결국 안 키우고 계신단 말이죠? 마구간이 있는 집의 경우엔 반려마가 있는 가정에 우선순위가 있어요.”

“아! 그런…. 반려마가 있단 걸 증명해야 하는군요.”

“네. 수도 제국민 센터에서 반려마를 등록하시면 됩니다.”

그럼 당장은 대출 신청을 할 수가 없었다. 설명대로라면 적합한 집을 우선 고르고 난 뒤 신청을 해야 하는 거니까. 실비아네는 아쉬운 대로 다른 혜택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복지과를 나왔다.

“림보를 다시 집에 데려와야 마구간 있는 벽돌집을 구할 수 있겠구나.”

“그러게요. 감시소에 가봐야 하나….”

세비스는 감시소가 있는 방향을 응시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아직 림보가 감시소에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실비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 아직 모르는구나. 나 오늘 림보 얘기를 전해 들었어.”

“무슨 얘기요?”

“림보가 사실….”

실비아는 시종이 해준 얘기를 세비스에게 전달했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세비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충분히 이해되는 바였다. 저도 처음 들었을 때 무척 놀랐으니까.

“네에?!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황궁에서 잡부가 되길 원했다고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