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그래. 업보를 100이나 줄였으니 남는 장사지. 아, 아니 장사가 아냐. 누군가를 돕는 건 정말 뿌듯한 일이지….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오네.’
나쁜 마음을 먹었다가 줄어든 업보가 다시 늘어날 수도 있었다. 실비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기부의 기쁨을 만끽했다. 저도 모르게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만간 치과를 가야 할지도. 이러다가 어금니 다 없어지겠어. 이제 다음 아이템을 볼까.’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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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살이 솔솔 연고
- 블루가 줬던 연고와 비슷한 원리로 만들어진 연고이다. 찰과상이나 기타 깊은 상처에 효과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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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거 괜찮네. 블루가 줬던 연고라면 여러모로 쓸모가 좋았지. 여기저기 다쳤을 때 쓰면 좋겠어. <매가 약이다> 스킬이 새로 생기긴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망치를 휘두를 순 없는 노릇이니까. 다음은… 쫀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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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쫀듸기
- 맛 좋은 쫀듸기. 보물 상자를 포장하던 인부가 실수로 떨어트린 새참 중 하나. 입도 대지 않았다. 그냥 먹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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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별 게 다 들어있네. 음, 그래도 나름 희귀템이니 맛 좀 볼까.’
실비아는 당장 <쫀듸기>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추억의 쫀듸기 포장지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철없었던 옛날을 떠올린 그녀는 포장지를 뜯곤 쫀듸기를 질겅질겅 씹었다. 달콤한 게 심심풀이로 딱 좋았다.
‘보물상자 구성물이 뭐 그럭저럭 무난하네. 망원경이 좀 괜찮고.’
망원경은 조만간 한번 써봐야겠다 싶었다. 쫀듸기 맛을 음미하며 걷던 실비아는 어느새 구내식당에 도착했다. 휘황찬란한 내부에 눈이 커지기도 잠시, 실비아는 다른 것에 더 놀라버렸다.
‘이게 다 마법으로 만든 건가?’
입구에서 삑-소리와 함께 입장하자 메뉴판 세 개와 함께 설렁줄 세 개가 보였다. 설렁줄 하나를 당기자 식판에 저절로 음식이 담기더니 실비아의 앞에 배달됐다. 그걸 그대로 들고 비어있는 자리에 앉기만 하면 됐다. 마법이 걸린 옷을 지급받았을 때 알아봤어야 했던 건데, 황궁은 엘리셔스 제국 어떤 곳보다 마법화 된 곳이었다.
‘루카 아빠가 자신 있게 말할 만하네.’
황궁 개방 축제 때 다른 나라 사람들 앞에서 무서운 마법을 보여줬던 카를 단장.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조금 재수 없긴 했지만, 제국의 마법사단장이라면 그 정도 패기는 보여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에 봤을 때 저를 완전히 노파로 오해한 건 조금 그렇긴 했지만.
‘굳이 오해를 풀 필요는 없지만, 조금 억울하긴 해. 그러고 보니 황궁의 마법사단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마주치진 않으려나….’
“굳이 이런 일로 제1 마법사단장을 호출하다니!”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던가. 입구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로브를 입은 루카의 아버지, 카를 단장이었다. 그는 호랑이 같은 풍채로 당당하게 식당을 가로지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개방된 주방이었기에 실비아가 앉은 자리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다 들렸다.
하얀 옷을 입은 조리사가 쩔쩔매며 카를 단장을 반겼다.
“죄송합니다. 불 마법의 일인자이신 카를 단장님이 마침 황궁에 계시다기에….”
“문제가 뭔가?”
“여기, 아궁이 불이 완전히 꺼져서요.”
‘얼어 죽을, 무슨 아궁이 불을 마법사 단장보고 피우래?’
먹던 고기가 목에 걸릴 뻔했다. 실비아는 컥컥거렸지만, 카를 단장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그녀가 보기에만 우습지, 생각보다 심각한 사안인 듯했다.
“화르륵-!”
카를 단장이 주문을 중얼중얼 왼 뒤 손을 뻗자 순간 커다란 불길이 주방 천장까지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아마도 아궁이에 불을 붙인 것 같았다. 천장과 근처에 있던 주방 시설에 그을음이 좀 남았지만, 조리사가 손뼉을 짝짝 치는 걸 보니 성공인 듯했다. 애석하게도 주방 모자와 함께 얼마 안 남은 조리사의 머리도 다 타서 없어졌는데, 조리사는 여전히 기쁜 표정이었다. 아직 제 머리에 일어난 비극을 눈치채지 못한 그에게 실비아는 속으로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와, 감사합니다. 불길이 아주 거세네요. 이 정도면 십 년은 끄떡없겠어요.”
“이 불이 왜 꺼진 것인지 모르겠군. 영속성을 걸어놨는데 말이야. 하여튼, 이제 웬만하면 꺼지지 않을 걸세.”
팔짱을 낀 채 담담히 아궁이 불을 바라보던 카를 단장은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으로 조리사의 머리를 가리켰다. 조리사가 ‘네?’라고 하자 카를 단장이 화장실로 가보라고 일러주었고, 잠시 후 식당 구석에서 남자의 커다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인사나 할까? 이 모습으로도 한번 본 적 있잖아. 황궁 주요 인사 중 한 명인데, 눈도장 찍어서 나쁠 건 없지.’
남은 음식을 서둘러 입에 다 털어 넣은 실비아는 식판을 버리곤 입구로 빠르게 뛰어갔다. 어느새 입구를 빠져나간 카를 단장은 루카 아버지 아니랄까 봐 긴 다리로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실비아는 꽁지가 빠져라 급하게 뛰어간 뒤 큰 목소리로 카를 단장을 불렀다.
“카, 카를! 단장님! 헥, 헥….”
“누구….”
저를 부르는 소리에 카를 단장이 뒤돌았다. 그는 가쁜 심호흡을 내뱉는 실비아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술을 뗐다.
“누구야?”
‘저런, 기억 못 하는구나. 그래, 어차피 바라지도 않았어.’
루카도 제 이름을 한 번에 못 외웠던 전적이 있었던 만큼 그 유전자가 어디 가겠나 싶었다. 실비아는 숨을 고른 후 허리를 바르게 펴곤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카를 단장님. 저 기억 안 나시나요? 황궁 개방 축제 때 옷에 사인받았던….”
“응? 아아! 당연히 기억나지. 염색했나 봐? 그땐 초록색 머리였던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찌푸리던 카를 단장이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마주 보며 미소 짓던 실비아는 단장의 말에 시무룩해졌다.
“아뇨. 원래 갈색 머린데요.”
“아아, 맞아. 갈색 머리지. 세리아, 라고 했었나?”
“…실비아입니다.”
머리색도 기억 못 하고 이름도 틀렸다. 정말 아예 기억을 못 하는구나. 본인이 그날 처음 개시한 바바리코트에 사인해버렸단 걸 알고는 있을까? 연속해서 잘못된 제 짐작이 틀리자 카를 단장이 머쓱한지 턱을 천천히 매만졌다.
“끝음절 맞추면 다 맞춘 거지, 뭐. 오랜만이네, 실비아 양. 황궁에서 일한다고 했었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오늘이 출근 첫날인데, 쳇. 이름 끝자리 하나 말고는 맞춘 게 아무것도 없잖아! 실비아는 애써 실망감을 감추곤 목적한 바대로 친한 척을 하기로 했다.
“황궁에 얼마 전에 들어왔습니다. 카를 단장님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게 돼서 얼마나 영광인지 몰라요!”
“그래, 이 구내식당에서 나온 걸 보니 황태자 저하의 사용인이 된 거군. 축하해, 실비아 양. 황태자 저하는 우리 엘리셔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시니 아무쪼록 성심성의껏 보필하길 바라네.”
“네. 일단은 여기서 적응한 뒤에 다른 일도 차차 해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례적인 덕담이 건네지자 실비아가 예의 바르게 화답했다. 카를 단장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음, 그런데 말이야. 자네 혹시 할머니랑 같이 사나?”
“예? 할머니요?”
“그래. 자네랑 되게 비슷하게 생긴 할머니를 봐서 말이야.”
실비아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아마도 카를 단장은 노파 모습의 실비아와 지금의 실비아를 보며 닮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순간 장난이 치고 싶어진 실비아는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요. 저희 할머니는 이 세상에 안 계세요.”
“뭐, 그런…. 내가 실언을 했어. 잊어주게.”
“아닙니다. 닮은 사람이야 충분히 존재할 수 있죠. 많이 닮았나 봐요.”
일부러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우울하게 대답하자 카를 단장이 허둥댔다. 답지 않게 곤란해하는 카를 단장의 얼굴을 보며 실비아가 속으로 키득댔다. 셀프 패드립을 친 셈이었지만, 이미 목숨도 여러 번 버린 마당에 못할 드립이 없었다. 아우, 이거 참 재밌는걸.
카를 단장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많이 닮았…. 잠깐.”
“네?”
실비아가 슬픈 척 표정 연기를 하며 되물었지만, 단장은 혼잣말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여자 이름도 실비아였는데…?”
‘장난은 그만 쳐야겠어. 혹시나 나중에 루카와 함께 보게 되면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실비아는 눈을 옆으로 돌리며 카를 단장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심각하게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제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냈다.
“황태자 저하 소속 사용인 실비아. 난 제1 마법사단장 카를 디 아리센트라고 하네. 뭐,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것도 인연인데 필요한 일 있으면 여기 전서구 둥지로 편지해.”
“앗, 네. 감사합니다. 단장님.”
“그럼 난 이만. 바빠서 말이야.”
카를 단장은 손을 들더니 망토를 휘날리며 급하게 뒤돌았다. 그는 혼잣말로 한 번 더 ‘너무 닮았는데.’라고 중얼거리더니 걸음을 옮겼다.
‘두 번이나 마주쳤으니 이번엔 날 까먹지 않겠지. 위기 상황에 카를 단장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어.’
오늘 인사를 한 덕에 명함까지 받았으니 황궁 주요 인사 중 한 명과 연줄이 닿은 셈이었다. 이건 루카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녀 스스로 한 일이기에 더 뿌듯했다.
실비아는 명함을 단단히 챙긴 뒤 사용인 센터로 향했다. 전서구로 약속을 잡은 세비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용인 센터로 급하게 뛰어간 실비아는 일단 나무 뒤로 숨었다. 하얀 드레스 셔츠와 검은 슬랙스를 입은 세비스가 벽에 기대선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러고 있으니 다른 사람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