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뭐야, 생각보다 꽤 하는데? 근데 이거 술래잡기 맞아? 뭔가 이상한… 으아아!”
원래 혓바닥이 길면 제일 먼저 희생양이 되는 법. 다음은 너다. 실비아는 떠들고 있던 기사에게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꿀벌을 공격하는 말벌과도 같았다.
“으으, 잠깐. 거기는, 거기는 안 돼에…!”
“후우, 군침 도는 냄새가 나는걸?”
기사의 단단한 등에 얼굴을 박은 실비아는 숨을 한껏 들이켜며 포식자의 여유를 풍겼다. 그러고는 마찬가지로 말 못 할 이것저것을 행했다…. 그녀가 제 사리사욕을 가득 채우는 광경을 보던 나머지 기사들은 뒤늦게 주춤주춤하더니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여자 뭐야! 이건 술래잡기가 아니라 일방적인… 아흣!”
“가만히 있어!”
세 번째 사냥감이 잡혔다. 귀엽고 순진해 보이던 그녀가 기사들을 도륙(?) 내는 광경에 흰둥이 기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거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데….”
“이번엔 너다!”
이미 눈깔이 제대로 뒤집힌 실비아는 감독이고 뭐고 구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희번덕거리다가 얌전히 있던 흰둥이 기사를 덮쳤다. 공격 대상이 될 줄 몰랐던 흰둥이 기사는 당황해서 크게 버둥거렸다.
“앗! 저는 감독관인데요! 하지, 하지 마세…. 흐으!”
감독관조차 가리지 있는 최상위 포식자!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웃음이 싹 사라진 기사들이 허둥지둥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재미로 시작했던 술래잡기인데 어쩐지 재미는 저 여자 혼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공통된 생각이 하나 자리 잡았다.
‘당했다!’
뭘 당한 건진 모르겠지만 제대로 당한 기분이었다. 감독관인 흰둥이가 실컷 뭔가를 당한 뒤 옆으로 버려지는 모습을 본 기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완전히 눈깔이 돌아버렸는데요?”
“그만하자고 해야겠어. 우리를 상대로 저 정도면 훈련에 방해는커녕 상당한 실력자일 테니까.”
제안을 수락했던 기사가 눈깔이 돌아버린 실비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가 훈련장을 함께 쓰는 걸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다른 데 있었으니까. 결국 불쌍한 기사는 먹잇감을 찾아 산기슭을 찾아 헤매던 하이에나의 레이더에 딱 걸려버렸다.
“이제 충분합니다! 술래잡기는 이제 그만…. 아앗, 그마안!”
갈색 피부의 기사는 단장이었다. 단장조차 당하자 패닉에 빠진 기사들로 훈련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실비아는 눈도장을 찍어놨던 기사들이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차례차례 한 명씩 실컷 …해버린 뒤에 구석탱이에 던졌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홉 명을 채웠다.
“와, 이게 무슨 술래잡기…. 뭐, 뭐야. 언제 온 거야.”
다부진 덩치에 안 맞게 순하게 생긴 기사 한 명이 구석에 숨어 있다가 실비아에게 발각당했다. 그녀는 혀로 입술을 갈급하게 핥은 뒤 부드럽게 눈웃음을 쳤다.
“금방 끝나니까 떨지 마세요.”
“저기, 그렇게 말하니까 좀 기분이 이상… 하읏!”
도합 열 명을 다 채우면서 실비아의 욕망 채우기 미니 게임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구석에 널브러진 기사들이 훌쩍이는 소리가 훈련장에 조그맣게 울려 퍼졌다.
“흐윽, 나 뭔가 소중한 걸 잃은 것 같아.”
“나도 그래. 엄마…!”
그 들을 뒤로한 실비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행복한 술래잡기였어. 앞으로 훈련을 같이 할 테니 이런 놀이를 자주 하면 좋겠다. 훈련 후에 같이 등목도 하고 여차하면 합숙 훈련도 하면 꿩 먹고 알 먹고지. 그러다 보면 샤워도 같이 하게 될지도? 등도 좀 같이 밀어주고 하면 좋을 텐데…. 하하, 이건 너무 갔나.’
촌놈에겐 웃어주지도 말라고 했던가. 너무 앞서가다 못해 혼자서 기사들과 결혼식하고 손주 보는 상상까지 하고 있던 실비아는 뒤늦게 처참한 기사들의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가련하게 훌쩍이는 모습이 약간의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조금 심했나. 어떻게 보면 치한이나 마찬가지잖아. 훈련만 하던 순수한 기사들을 내가….’
그때, 그녀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미니 게임 성공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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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사욕 채우기 게임 성공! 실비아의 레벨이 1 올라갑니다.]
[축하합니다! 레벨 70을 달성하셨습니다. <레벨 70 달성 기념 보물상자>를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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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얏호! 순수고 뭐고 알 바야. 레벨이 올라가면서 보물상자도 얻었잖아! 기분도 좋아지고, 보물도 얻고 술래잡기 최고!’
이런 게임으로 레벨이 오른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더 할 수 있었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띤 실비아가 두둠칫거리며 댄스를 추는데,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끄응…. 저기요. 저기, 우리가 졌습니다….”
“아? 네. 좋은 승부였어요.”
뒤를 돈 실비아가 엉망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입가에 흐른 침도 꼼꼼히 닦았다. 나름대로 이미지관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애석하게도 기사들에게는 악마의 웃음으로 보였지만.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갈색 피부의 기사는 구사일생으로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다른 이가 건넨 옷을 입곤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술래잡기를 가장한 인간사냥의 희생양 중 한 명이었기에 머리가 엉망이었다. 붉어진 눈가를 문지른 그가 애써 신사다운 미소를 지었다.
“엄청난 실력자시군요. 제가 당신을 잘못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 정도 실력자라면 훈련에 방해가 안 되는 건 물론이고 함께 대련을 해도 비등하게 겨룰 수 있을 것 같군요.”
“과찬이세요. 저는 그냥 술래잡기에 집중했을 뿐이랍니다.”
“…정말 술래잡기에 집중하신 겁니까?”
실비아가 양손으로 치마를 잡으며 정중하게 인사하자 기사가 의문을 표했다. 눈앞의 여자가 과연 순수하게 술래잡기를 한 걸까. 술래잡기를 가장한 즐거운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닐까 싶은 합당한 의심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찼다.
기사의 질문에 초록빛 눈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깜빡였다.
“네?”
착각인 건가. 술래잡기에 열중한 것일 뿐인데 너무 과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미치지 않은 이상 이 작은 여자가 기사단 전체를 어떻게 해보려고 할 리는 없으니. 기사는 머릿속에 드는 망상을 고개를 휘저어 물리쳤다. 그러곤 땀이 밴 손바닥을 옷으로 닦곤 실비아 쪽으로 내밀었다.
“아닙니다. 제 이름은 데이입니다. 그쪽은?”
“저는 실비아라고 합니다. 그럼 이제 이 훈련장을 짬이 날 때 이용해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죠.”
데이는 실비아와 악수를 나눈 뒤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피해자들, 아니 기사단들을 뒤돌아봤다. 뒤늦게 옷을 다 추스른 기사들이 쭈뼛쭈뼛 실비아에게 다가와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난 이제 몰라, 크흑.”
“잘 부탁드려요. 저를 책임져… 아, 아닙니다.”
“잘 부탁합니다, 실비아 님.”
처음 겪는 생경한 경험에 큰 충격을 받은 기사 몇몇이 인사 사이에 이상한 소리를 섞는 사소한 해프닝이 발생했지만, 실비아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렇게 다들 어른이 되어가는 거지, 뭐.
‘옷을 단단히 챙겨입은 건 좀 아쉬운걸. 앞으로 저렇게 조신해지면 안 되는데. 사람이 좀 흐트러질 줄도 알아야 건강하게 자라는 법인데 말이야…. 적당히 할 걸 그랬나.’
실비아의 시선이 가슴팍에 닿자 기사 한 명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제 옷깃을 더 단단히 여몄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일반인들 기준으로는 못 할 짓을 많이 저지른 실비아가 억울함을 삼키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살벌한 데드엔딩을 가진 남주들만 보다가 대놓고 터치가 허락되는 파라다이스를 맞이하는 바람에 오랜만에 고삐를 너무 푼 듯했다. 이러다가 본의 아니게 자유분방했던 기사단을 유교 보이들로 만들어버릴까 봐 걱정되는 와중에, 흰둥이 기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감독관인 저까지 잡아버리시다니. 술래잡기 열정이 엄청나시군요. 제 이름은 샤이입니다. 저희는 황태자 저하의 제2 직속 기사단입니다. 저는 부단장이고, 여기 데이는 단장이죠.”
“아, 그렇군요. 반가워요.”
실비아는 호들갑을 떨며 샤이의 손을 잡았다. 샤이는 부끄러워하며 손을 물렸는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데이가 충격에 빠진 기사단들을 위로하는 사이 샤이가 훈련장 내부를 간단하게 소개해주었다. 별다른 건 없었고, 목검이나 보호구가 있는 곳과 간단하게 손을 씻고 쉴 곳을 안내해 주는 정도였다.
실비아가 제 이름과 황태자 저하의 반려마 돌보미라는 것까지 소개하자 샤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설마?! 그, 공연 때 불 훌라후프… 불라후프 맞죠!”
“앗, 네. 맞아요. 공연 보셨나 봐요?”
차차 친해지고 나서 밝힐 생각이었는데. 샤이가 알아봤으니 어쩔 수 없었다. 실비아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양 뺨을 붉히자 샤이가 흥분한 채 다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네. 황태자 저하를 호위해야 하니까, 좌석에 앉아있진 않았지만, 공연장 뒤에서 봤죠.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옷차림이 완전히 달라져서 몰라봤어요. 그때는 워낙 훌라후프며 공이며 온통 불타고 있어서 얼굴이 잘 안 보이기도 했고…! 와, 실비아 님이 그 불라후프였다니, 술래잡기는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거였네요.”
“하하, 죄송합니다. 뭔가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미리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기사분들이야 저 같은 사람보단 훨씬 강한 분들이실 테니까요.”
“앗, 그러고 보니 던전 공략 경험자 아니신가요? 그때 황제 폐하랑 대화하시는 걸 들었었거든요. 안 그래도 저희가 지금 던전 유경험자가 필요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