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외제마요? 지금은 딱히 감시소에 있는 것도 아니고 황궁에서 일할 뿐이니 근무 시간에 마주칠 수도 있겠어요. 가끔 그 외제마가 포리쉐를 도와 함께 산책을 하기도 하거든요. 퇴근하고 나서 따로 마구간에 찾아가 보는 방법도 있죠. 근데 그건 왜요?”
“아, 그냥 좀 궁금해서요. 안쓰럽기도 하고요.”
포리쉐와 함께 산책한다니, 잘된 일이었다. 그럼 굳이 찾아 나설 필요도 없이 조만간 만나게 될 터. 잡부가 된 림보 신세에 절망하던 실비아의 눈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산책을 도와준다니, 근무하다 보면 만나게 되겠군요.”
“그럼요. 조만간 마주칠 거예요. 실비아 님은 포리쉐를 돌보시니까요. 그건 그렇고 다른 얘기를 하자면….”
실비아는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일단은 얌전히 말을 경청하기로 했다.
“일주일 일정을 간략하게 말해드릴게요.”
“간략하게요….”
“샵은 포리쉐의 몸을 살핀 뒤 들리면 되고, 그 외에 건강검진과 가끔 포리쉐가 입맛이 없을 때 밥을 같이 먹는 일정이 있습니다. 황태자 저하가 한가할 때는 포리쉐와 함께 식사를 하시니 참고하시고요.”
“그렇….”
“그리고!”
끝난 줄 알았더니 아직 아니었나 보다. 시종은 숨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정을 떠들었다.
“평소에는 전용 달리기장에서 마음껏 뛰는 걸 좋아하기에 그곳으로 데려가면 되지만, 황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산책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어요. 네발 달린 반려동물들은 대부분 야외 산책을 좋아하잖아요, 아시죠?”
“네에….”
“포리쉐가 뭐든 쉽게 질리는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장소를 바꿔가며 야외 산책도 자주 시켜줘야 합니다. 가끔 황태자 저하의 허가를 받고 황궁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요. 그리고 퇴근 전에 포리쉐의 머리를 빗겨주고 목욕시중을 해주시면 끝입니다. 간단하죠?”
일주일 업무를 다 들은 실비아의 눈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간단하긴 개뿔이, 대체 어디가 간단하단 말인가. 저를 놀리는 건가 싶어 몰래 시종을 째려본 실비아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줄 알았더니, 자세히 들어보니 할 일이 많네. 현생의 재벌가 3세도 이런 럭셔리 라이프를 살진 않겠어. 황태자의 반려동물로 사는 게 어찌 보면 제국 최고의 출세 아닐까.’
이참에 우라엘 황태자의 반려동물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공략 시도하다가 데드엔딩을 여러 번 겪는 것보단 반려동물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엘리셔스 제국의 정점에 서는 더 빠른 길로 보이니까. 목줄만 채워주면 웬만한 개보다 더 잘 짖을 자신 있는데….
잠시 잡생각을 하던 실비아는 시종이 걸음을 옮기자 얼른 뒤따랐다.
“말로만 들으시면 할 일이 엄청 많이 보이지만, 실제론 아닙니다. 실비아 님은 포리쉐 비서처럼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일정을 살펴주기만 하면 되세요. 지금처럼 포리쉐가 샵에서 관리받고 있을 때는 다른 업무가 없다면 황궁 내 휴게실에서 잠시 쉬셔도 됩니다.”
“아,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근무 중에 쉬는 시간이 있다니, 완전 좋아요!”
실비아는 두 팔을 번쩍 들곤 복도에서 깨춤을 췄다. 순간 너무 까분 것 같아 바로 행동을 멈췄지만. 다행히 시종은 아무렇지 않은 눈빛이었다.
“괜찮아요. 사용인들끼리 있을 때는 춤을 추든 바닥에서 헤엄을 치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황태자 저하 앞에서만 조심해 주세요. 보다시피 이렇게 근무 환경이 좋기 때문에 다들 황궁에 취직하고 싶어 하죠. 제국 내에서 가장 높은 분들이 계신 곳이니 영광스러운 자리이고, 다른 곳보다 복지도 월등하게 좋고요. 능력에 따라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 말이죠.”
“그러게요. 정말 꿈만 같아요.”
아까 봤던 어린 하녀처럼 시종도 황궁에서 근무하는 데 무척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나니 그럴 만도 했다. 여기다가 곧 확인할 황궁 사용인 자가 대출 혜택도 있었지. 시종은 설명이 끝났다며 퇴근하기 전에 복지과에 가보라고 말해 주었다. 포리쉐는 세 시간 동안 마사지를 받을 테니 점심시간 후에 이 복도에 다시 오면 된다고 한다.
2층에 있는 직원 휴게실 앞까지 그녀를 안내한 시종은 그럼 나중에 보자며 몸을 돌렸다. 실비아는 꾸벅 인사하다가 잊고 있던 게 생각나 시종을 불러세웠다.
“시종님! 잠시만요.”
“네?”
“하나 여쭤볼 게 있어요. 혹시 휴식 시간에 황궁을 구경해도 될까요?”
실비아의 질문에 시종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요. 황태자 궁 근처라면 상관없습니다. 너무 멀리 가진 마세요. 황궁이 워낙 넓어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간혹 위험한 장소도 있으니까요. 계약서 끄트머리에 생명 포기 조항이 있는 건 이미 읽으셨겠죠.”
그딴 거지 같은 조항은 발견 못 했지만, 보나마나 돋보기로 봐야 할 만큼 깨알만 한 글씨로 적혀있었을 것이다.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닌 실비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네, 감사합니다. 그럼 혹시 기사님들 훈련장은 어디 있는지 아세요?”
“훈련장은 왜요?”
“아, 제가 던전 공략 경험자잖아요. 구경하고 싶기도 하고 혹시나 제 경험이 그분들께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던전 공략 안 할 때는 훈련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몸도 풀 겸….”
시종이 잊고 있었다는 듯 아! 하고 크게 입을 벌렸다. 그가 창문 가까이 가더니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샛길 보이시죠? 저쪽으로 들어가시면 푯말이 보이실 겁니다. 그 푯말을 따라서 쭉 가면 훈련장이에요.”
“아아, 네. 알겠어요.”
목을 빼 내려다보니 정원 뒤편에 샛길이 보였다. 쉬는 시간이 주어졌으니 지금 가면 딱이었다.
시종은 감탄사를 흘리며 실비아를 칭찬했다.
“캬, 그나저나 정말 부지런한 분이시군요. 황궁 업무 외에도 기사님들을 돕겠다고 나서시다니. 앞으로가 기대되는 인재네요.”
“하하, 과찬이세요. 그럼 있다가 점심시간 후에 봬요!”
시종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확인한 실비아는 휴게실 문 앞에서 잠시 고민했지만, 훈련장을 가기로 했다. 마음 같아선 지금은 쉬고 퇴근 후 훈련장에 들르고 싶었지만, 퀘스트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빨리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잠은 죽어서 자라는 격언도 있지…. 정작 나는 죽어서도 못 자고 있지만 말이야.’
실비아는 부지런히 걸어 샛길로 향했고 푯말을 따라 열심히 또 걸었다. 게으른 욜로족이었던 제가 휴식을 마다하고 퀘스트를 위해서 열심히 움직이다니. 새삼 스스로의 변화가 놀라웠다.
‘휴, 나태 지옥이 대단하긴 대단해. 그러고 보니 걔는 요새 안 보이네. 안 보여서 참 좋긴 한데.’
루카 형을 안 본 지 꽤 된 것 같았다. 루카가 주위에 있을 때만 나타났던 걸까. 아니면 저번에 해골바가지의 옥수수를 터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바빠진 걸까. 도통 모를 일이었다.
‘안 나타나면 나야 좋지.’
실비아가 루카 형의 탄탄한 가슴팍을 떠올리는 와중에 멀리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얍! 얍!”
기사들이 기합을 넣는 소리로 보아 훈련장이 지척인 듯했다. 저곳에 가면 퀘스트를 할 수 있지. 황궁 최초의 퀘스트를 앞두고 실비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훈련장 앞에 다다른 실비아는 퀘스트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대박….’
운동장처럼 뻥 뚫린 훈련장엔 아주 많은 남성들이 웃통을 벗은 채 훈련에 몰두 중이었다. 가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춥지도 않은지 너도나도 시원하게 벗어젖힌 모습이 훈훈했다. 슬랜더 체형, 다소 우락부락한 마초 체형, 정석적인 보디빌더 체형 등 멋진 몸이 바글바글해서 어디다 먼저 눈을 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음, 오길 잘했어. 이런 눈 호강이 있을 줄이야. 휴게실에서 쉬는 것보다 더한 힐링이 되고 있군.’
초록빛 눈이 희번덕거렸다. 싱글벙글한 실비아는 훈련장 입구에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구경했다. 혹시나 눈빛을 들킬까 봐 뒤늦게 가방에 든 설명서를 꺼내 햇빛을 가리는 척, 불순한 시선을 숨기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간 그녀의 눈에 대치 중인 두 기사가 보였다. 균형 잡힌 훌륭한 근육을 가진 기사가 손을 까딱하며 구릿빛 기사를 도발했다.
“자, 먼저 들어오시지.”
“간다!”
‘내가 들어가면 안 될까나.’
너무 집중한 탓에 기사들의 단단한 몸에서 맑은 땀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펼쳐졌다. 검이 정신없이 부딪치기도 잠시, 정식 대련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둘은 무기를 집어 던지고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단순히 재미로 하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훌륭한 근육들이 이리저리 뒤엉켰는데, 그건 또 그거대로 보는 맛이 있었다.
‘내가 왜 이걸 몰랐지. 훈련장이면 당연히 이런 흐뭇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는 건데 말이야. 크, 귀찮아서 안 왔으면 어쩔 뻔.’
실비아는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가 그들이 하나(?)되는 모습에 집중했다. 격한 몸싸움 중에 둘은 서로의 엉덩이를 쥐기도 하고 허벅지를 어루만지기도 했는데, 그럴수록 실비아의 코에선 뜨거운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쌀쌀해지는 가을, 백 번 따뜻한 음식을 먹는 것보다 한 번의 훈련장 구경이 최고의 보양식이었다.
‘참 좋은 힐링 센터, 아니 훈련장이다.’
어느새 설명서로 눈을 가리는 척도 관둔 실비아는 뒷짐을 진 채 감시자처럼 기사들을 지켜봤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훈련하던 기사 중 한 명이 뒤늦게 그녀의 끈적한 시선을 눈치챘다.
“저기요! 사용인인 것 같은데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네? 저요?”
실비아가 저를 가리키며 묻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슨 용무가 있어서 찾아오신 건가요? 그게 아니면 훈련을 지켜보실 수 없습니다.”
“아….”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구경해보겠다는 생각만 앞서 할 말도 생각하지 않고 훈련장 안으로 걸어왔다. 도와주겠다고 말하면 선뜻 좋다고 대답하려나?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치마를 펼치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