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네? 네…. 혹시 모르니 늘 들고 다니면서 자주 읽어 볼게요.”
실비아는 매고 있는 가방에 설명서를 집어넣고는 벌떡 일어났다. 시종은 따라오라고 손짓하더니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저하께서 매우 바쁘신지라 저녁쯤에나 다시 뵐 수 있을 겁니다. 설명서를 보는 걸로는 부족하실 테니 직접 할 일을 보여드리죠. 절 따라오세요.”
“아, 네!”
우선 업무 설명을 다 들은 뒤에 훈련장이 어딨나 물어봐야지.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코너를 몇 번 돌고 나니 핑크빛 카펫이 깔린 복도가 나타났고, 첫 번째 방부터 시종이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여기는 손톱 관리샵, 여기는 미용샵, 여기는 마사지샵, 여기는….”
“황태자 저하께서 미용 관리를 철저히 하시나 보군요.”
무슨 놈의 샵이 이렇게 많은지, 복도에 줄지어 서 있는 샵들이 다 미용샵이었다. 황태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좔좔 흐른다 싶더니 역시 그냥 되는 건 아니었다. 그 정도 미인이 되려면 타고나는 것만으론 안 되는 건가.
실비아는 까칠해진 제 얼굴을 쓰다듬으며 집에 있는 쌀이라도 갈아서 팩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의 말에 시종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포리쉐 전용 샵들입니다. 포리쉐의 몸 상태를 매일 살핀 뒤 그 아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면 됩니다.”
“예에?! 아, 그렇군요.”
실비아는 경악했다가 가까스로 진정했다. 너무 놀란 티를 내는 게 촌스러워 보일까 봐서였다. 반려동물에게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게 주인의 마음이라지만, 이 정도면 웬만한 귀족보다 더 호화생활을 누리는 것 같았다.
“놀라셨죠? 처음 황궁에 들어온 사람들은 여기가 어디냐고 묻다가 다들 경악하곤 합니다. 포리쉐가 외제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미모가 뛰어난 데다가, 황태자 저하께서 포리쉐를 워낙 아끼는지라 궁 여기저기에 포리쉐를 위한 장소를 만들어 놓았죠.”
“그렇군요. 아, 외제마. 외제마는 수도에서도 많이 귀한가요?”
실비아는 감시소에서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아마도 마음 한구석에는 서러움을 삼키고 있을 림보를 떠올렸다. …서러워하고 있는 것 맞겠지? 아마도 맞을 것이다. 세비스와 함께 찾아갔을 때 서러워하며 환풍구까지 기어 올라왔으니까.
워낙 그날 본 광경이 놀라웠던지라 림보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외제마인 포리쉐의 초호화생활을 보니 상대적으로 림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질문에 시종이 격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요. 바깥에서 외제마 흔하게 보셨나요? 아마도 별로 못 보셨을 겁니다. 외제마들은 바로 티가 나죠. 때깔 좋고 덩치도 보통 말들보다 살짝 크고요. 무엇보다 자율주행이랑 터보 주행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가끔 일반마에게 마도구를 달아주어 터보 주행을 시키는 불법 개조자들도 있지만, 그래도 외제마는 못 따라가죠.”
“아! 귀하다니 다행이네요. 사실은…. 아, 아니에요.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포리쉐는 암말이 맞죠?”
실비아는 감시소에 있는 림보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으려다가 말을 삼켰다. 감시소에 반려동물이 수감 중이라는 얘기를 출근 첫날부터 하기엔 좀 그래서였다. 시종은 그녀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 하지만 외제마는 암수 상관없이 몸단장을 좋아하는지라 외형으로는 구분이 불가능합니다. 포리쉐가 수컷이었다고 해도 이런 몸단장을 열심히 했을 겁니다. 외제마들은 자기 몸단장은 물론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을 좋아하죠. 더러운 환경에서는 우울증에 걸리기도 해요. 그래서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어 일반 가정집에서는 기르기 힘들죠.”
“암수 상관없이 몸단장을 좋아하는군요. 깨끗한 환경이라….”
숲을 닮은 초록빛 눈동자가 아련하게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오두막집에 처음 왔을 때 충격받아 철푸덕 주저앉았던 림보가 떠올랐다. 그가 한동안 제 침대에서 자는 바람에 찬 바닥에서 자느라 몇 번 입이 돌아갔던 악몽….
악몽도 지나가면 추억이 된다더니 딱 그랬다. 그것과 함께 유기농 당근과 티라미수 케이크를 구하느라 안 그래도 폭망한 가세가 기울다 못해 백팔십도 돌아갔던 추억이 차례차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림보 입장에선 오두막집에서 매일 지내는 게 지옥이었겠어. 그래도 어떻게 보면 오두막집에서 적응훈련을 한 덕에 감시소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만….’
림보가 격하게 보고 싶어진 그녀는 점심을 먹고 세비스를 만나 감시소 면회 얘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시종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창문을 열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참새 한 마리를 붙잡았다. 붙잡힌 참새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놀라지도 않고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얘 왜 이렇게 위기감이 없어?”
“전서구 이용하시게요? 이걸 먹이면 될 겁니다.”
“앗, 감사합니다.”
시종이 가방에서 조그만 봉지를 하나 꺼내더니 실비아에게 건넸다. 모이주머니였는데, 그 안에 든 걸 참새에게 먹이자 단춧구멍 같은 눈이 번쩍 떠지더니 눈빛이 용맹해졌다.
“가랏!”
점심 먹고 나서 센터 앞에서 만나자고 적은 쪽지를 참새의 발에 묶은 그녀는 황궁 타코야키 요리사 세비스에게 가라고 명령했다. 비실비실 날면서도 눈빛 하나는 또렷한 게 멀리는 못 가더라도 황궁 내에서 전서구로 쓰긴 퍽 괜찮았다.
“저 모이가 뭐길래 먹자마자 눈빛이 또렷해졌죠?”
“음, 별 건 아니고 기분이 좋아지는 약입니다. 실수로라도 드시진 마세요. 조금… 아, 아닙니다. 쓸데없는 건 알 필요 없죠. 그 모이주머니는 가지세요. 센터에서 모이를 달라고 하면 언제나 주니까요.”
“그, 그렇군요. 와, 잘 날아간다!”
뭔지 몰라도 대단한 성분이 든 모이인 모양인데 무척 수상했다. 참둘기에겐 절대 먹이지 말아야겠어. 그녀는 급하게 대답한 뒤 어느새 저 멀리 날아간 참새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기뻐했다.
‘독과일이나 수상한 모이나 이놈의 황궁 알면 알수록 정상이 아니네. 아무렴, 이 게임 내에서 정상적인 곳이 있을 리가 없지. 뭐가 됐든 황궁 내에 있는 아무 새나 붙잡아서 전서구로 쓸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혜택이야. 참둘기는 노엘과 루카에게 편지를 가져다주느라 바쁠 테니까.’
루카의 편지를 전달하려고 사막 한가운데에서 신기루를 보며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참둘기를 잠시 떠올린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은 남 걱정보단 황궁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게 먼저였다.
복도에 있는 샵 설명을 마친 시종은 턱을 쓰다듬더니 과거를 회상하는 듯 먼 곳을 바라봤다.
“샵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생각나네요. 몇 주전이던가. 포리쉐한테 반해서 황궁까지 쫓아온 외제마가 한 마리 있었죠.”
“네? 황궁까지 외제마가 쫓아왔다고요? 그래서요? 어떻게 됐나요?”
실비아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몇 주 전에 황궁까지 쫓아온 외제마라니, 림보 얘기가 틀림없었다. 그녀의 다급한 물음에 시종이 몸을 뒤로 물리며 대답했다.
“아이고, 왜 그렇게 놀라세요. 누가 보면 아는 말인 줄 알겠어요. 사람도 아니고 보기 드문 외제마가 쫓아오니까 황태자 저하가 해치지 말라고 해서 다들 가만 놔뒀죠. 그렇게 황궁에서 며칠 지냈던가? 어느 날….”
“어느 날 어떻게 됐는데요?!”
실비아는 두 손을 모은 채 절실하게 시종을 바라봤다. 시종은 진정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이고,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그 외제마가 야외 파티 음식으로 준비해둔 디저트를 다 먹어 치워버렸어요. 그래서 그날 파티가 취소되는 사태가 일어났죠.”
“그런…. 그래도 한낱 동물이 뭘 알겠어요!”
“아유, 엘리셔스 월드에서 인턴 하셨으니까 아시죠? 흉악 범죄를 저지른 동물들은 수용소에 갇히잖아요. 그 외제마는 그런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가벼운 죄라도 황궁 내에서 일어나면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는 규칙이 있기에 결국… 감시소에 갇혔죠. ”
“세상에나….”
실비아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황궁 내에서 파티라면 주최자는 황족일 텐데, 파티가 취소될 정도로 디저트를 많이 먹어 치웠으니 감시소에 갇힐 만했다. 그래도 그렇지 한 달 내내 가둬놓다니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흉악 범죄도 아니고, 이제 풀어줄 만하지 않나요?”
“안 그래도 지금은 풀린 걸로 압니다. 밖으로 나갈 건지, 아니면 여기 계속 있을 건지 선택권을 줬더니 황궁 내에서 일하겠다고 의사 표현을 한 것 같더군요. 그 외제마는 지금 황궁에서 잡부로 일하고 있어요.”
“네? 뭐요? 잡부요?”
감시소에서 풀려났다고 해서 안심한 것도 잠시, 지금 황궁에서 잡부로 일하고 있다는 시종의 말에 실비아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잡부라니, 대체 왜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데도 잡부가 됐단 말인가. 감시소에 면회 간 뒤에 한 선택이니 림보는 실비아와 세비스 대신에 황궁을 택했다는 말이 된다.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예. 가끔 잔디 심을 때 소 대신에 잔디도 갈아주고 황궁 내에 밭이랑 논도 갈아주고요. 그 외에도 많은 일을 하죠. 아! 오늘은 파티장에서 공연 도우미로 일하고 있겠네요.”
“아….”
저절로 침음이 흘러나왔다. 일하지 않고 집에서 노닥거리다가 가끔 실비아와 세비스를 태워주는 게 제일 고강도 노동이었던 림보가 온갖 궂은일을 하는 잡부로 전락하다니. 심지어 그게 본인 선택이라니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실비아는 할 말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혹시 그 외제마를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