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제이처럼 너도 실비아라고 부르도록 하지.”
“아! 저하, 감사합니다.”
황태자는 실비아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망토를 휘날리며 척척 걸어갔다. 그러자 어디에 숨어있었던 건지 7인의 흑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저 사람들은 어디 있었던 거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뒤에서 나타났으니 동산 안에 함께 있었단 소리였다.
대기 중이던 다른 사용인들도 그 뒤를 우르르 따랐는데, 무슨 황제 폐하 행렬 뺨치는 엄청난 행렬이었다.
“엇….”
포리쉐의 고삐를 쥐고 그 뒤를 따라가려던 실비아는 다른 사용인들의 제지에 발을 멈췄다. 화려한 행렬이 사라지고 실비아는 멀뚱히 서서 포리쉐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흑기사단은 어디서 나타난 거람? 쩝, 포리쉐와 황태자가 온종일 함께 있는 건 아니라고 했었지. 낮부터 동산에서 포리쉐랑 노닥거리길래 한가한가 했더니, 한량 백수는 아니었군.’
누가 알면 큰일 날 생각을 하던 실비아는 이제 뭘 해야 되나 싶어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다가 곁에 있는 시종에게 말을 걸었다.
“시종님. 그러고 보니 제 업무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습니다. 뭘 하면 될까요?”
“아, 다들 자기 일이 바빠서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나 보군요. 잠시만요.”
시종은 바쁘게 뛰어가더니 잠시 후 갈색 숄더백 하나를 들고 왔다. 그 안엔 자수가 새겨진 고급 손수건 여러 개와 기타 소모품이 들어있었다. 보아하니 포리쉐를 돌볼 때 필요한 물품들이었다.
“손수건은 일회용입니다.”
“네에?! 엄청 비싸 보이는데…. 알겠습니다.”
아무렴 황태자의 반려마인데 고급진 것만 써야겠지. 잠시 놀라던 실비아는 이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이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가방을 뒤적였다. 그는 손수건을 하나 꺼내서 포리쉐의 말발굽을 다 닦은 뒤, 가방 구석에 있는 비닐봉지에 넣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해냈다. 귀족이라서 그런가, 손짓 하나하나에 품격이 느껴졌다. 발이 말끔해지자 포리쉐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과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림보 발 닦을 때처럼 빡빡 닦아주면 되는 거 아닌가? 림보에게 많이 해봐서 익숙해. 일회용 손수건이 아니라 삶아 빤 손수건을 썼지만 말이야.’
그 외에 이것저것 조심할 것을 들은 뒤에야 설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돌보미는 원래 따로 있지 않았어요. 그동안은 제가 포리쉐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명서를 따로 전해드리라고 센터에 말해뒀는데, 제대로 전달이 안 됐나 보네요.”
“…별 사고 없이 이제라도 받았으니 다행이죠.”
사소한 사망사고가 한 번 있었으나 다시 살았으니 됐다. 실비아는 예의 바르게 대답한 뒤 비어있는 의자에 앉아 설명서를 펼쳤다. 시종은 아직 업무 숙달이 안 된 실비아를 위해 오늘만은 포리쉐 돌보기를 도와주기로 했다. 설명서를 읽고 있으라고 말한 시종은 포리쉐를 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별 내용은 없네. 아주 대략적인 내용만 들어있어. 정말 필요한 건 저주 걸린 과일나무 같은 위험한 것에 대한 정보인데 말이야.’
곰곰이 생각하니 그런 정보를 고작 사용인이 보는 설명서에 적어놨을 리가 없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황궁의 군사 기밀 같은 거니까. 그런 미친 나무가 동산에 있었던 건 황태자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닐까. 암살자가 할 일 없이 과일이나 따 먹고 있을 리가 없지만, 황태자가 주로 머무는 곳이니 낯선 이가 숨어있을 때를 위한 대비책일 수도 있었다. 정작 피해는 암살자가 아닌 가엾은 소시민 실비아가 받았지만 말이다.
‘아냐.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어. 암살자를 대비해서가 아니라, 그냥 나 죽으라고 시스템이 심어둔 것 같은데.’
이 가정이 훨씬 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 뭔 이유를 찾고 있어. 저가 데드 엔딩 지뢰를 밟기만 기다리는 시스템이 심어놓은 거였다. 그러니 독이 아니라 자그마치 ‘마나 역류 저주’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화려한 황궁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여기서 넋 놓고 있다가는 역대급으로 많이 사망하는 것 아냐?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어느새 사망에 대한 면역력이 생겼기에 두렵다거나 도망치고 싶단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딴 면역력이 생기다니, 어이없어. 근데 황태자를 어떻게 공략하지? 말수가 적어서 친해지기 어려운 데다 단둘이 있을 기회가 거의 없을 것 같은데.’
시종이 늘 곁에 있는 건 둘째 치고 7인의 흑기사단까지 그림자처럼 지키고 있는 듯했다. 단둘이 있어야 뭐라도 해볼 것 아닌가. 실비아는 레벨이 상당히 오른지라 희미한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 황태자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질 때마다 그 살기는 더 또렷해졌었다. 지금 보니 아까의 흑기사단이 내뿜은 살기임이 분명했다.
‘내 참, 이래서 레벨 80이 필요하다는 건가? 지키는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쟁취해야 하는 남주라니. 첩첩산중이로구만.’
이래서야 호감도를 채우기 전에 손이나 한번 잡아볼 수 있으려나. 막막한 마음에 실비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죽음을 불사하고 개수작을 계속 부려야겠지. 호감도도 숨겨져 있어서 쉽지 않을 것 같지만, 하다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늘 그래왔으니까.
‘이딴 걸 죽을 각오로 덤벼야 한단 게 어이없네. 이런 각오로 현생에서 일했다면 나 벌써 떼부자 됐을지도.’
그때, 실비아의 앞으로 근육질의 남성들이 웅성거리며 지나갔다. 로비에는 시녀복을 입은 실비아 혼자 있었기에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눴다.
“오늘 훈련이 뭐더라?”
“던전 공략 대비 훈련이라나 봐. 던전 경험이 있는 상관들은 대부분 다 실전에 투입됐는데, 우리끼리 훈련해봤자 소용 있나 모르겠어.”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 만에 하나 수도 한가운데에 던전이 생길지도 모르니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단장님이 말씀하셨잖아.”
‘경험자 여기 있는데.’
대화 내용으로 미뤄보아 기사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끼어들어서 일거리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출근하자마자 쓸데없이 잔기술을 뽐내는 바람에 돌보미 업무 외에 밀크티 휘젓기 업무도 추가되지 않았나. 직장생활에서는 맡은 일만 하면 되지, 괜히 유능함을 뽐내면 안 되는 법이다. 실비아는 혹시나 공연에서 저를 본 이가 있을까 봐 얼굴을 설명서에 깊숙이 파묻었다.
그때 실비아의 눈앞에 반투명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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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강한 자가 되자.
황궁에는 강한 기운을 가진 이가 잔뜩 있다. 이곳에서라면 레벨 80을 달성하는 건 꿈이 아닐지도? 어떻게 수련을 할지는 플레이어 본인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강한 이뿐인가, 소도시 하나랑 맞먹는 넓은 황궁에는 오래 근무하던 사용인들도 모르는 미지의 장소가 여러 곳 존재한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레벨 업을 해보는 건 어떨까?
단, 누군가와 대련을 할 시에 질 경우, 한 번 실패로 간주한다.
성공 보상 : 레벨 상승, 미지의 스킬 획득, 업적 <황궁 지박령>
실패 시 : 3번 이상 대련에 패배할 시, 제국 병원에서 한 달 입원 확정. <여기가 병원인지 도떼기시장인지> 병문안 이벤트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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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퀘스트 창! 역시, 예상대로 황궁 안에서 레벨 업을 할 수 있구나.’
아마도 방금 지나간 기사들의 대화를 들은 덕에 퀘스트 창이 열린 것 같았다. 엘리셔스 월드에서처럼 황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레벨 업을 할 수 있단 거겠지. 미지의 장소가 있단 건 던전 얘기일까? 가령 미궁이나 마탑 같은 곳 말이지.
실비아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콩콩거리며 뛰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 새로운 장소를 탐험한다는 건 무척 흥분되는 일이었다.
‘대련이라, 이기면 레벨 업이 되려나? 짬 날 때 훈련장에 가봐야겠어.’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해서 피하려고 했지만, 퀘스트가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저는 던전 공략 경험자이니 기사들의 훈련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궁에서 일할 수 있었던 이유도 황제 폐하가 제 던전 공략 능력을 탐내서였으니, 기사들도 환영할 터였다. 훈련하면서 황궁 내에서 입지를 다지고 퀘스트 내용대로 여러 가지 보상을 받을 수도 있으니 딱 좋았다.
‘조금 맘에 걸리는 건 성공 보상에 있는 업적과 실패 시 발생하는 이벤트인데….’
<황궁 지박령>이라니. 업적 명부터가 무척 꺼림칙했다. 성공 보상이니 죽는단 소리는 아니겠고 아마도 레벨 업을 하다 보니 황궁에서 거의 살다시피 해서 저런 업적을 얻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돌보미 일을 하는 근무 시간에 퀘스트를 수행할 수 없으니 퇴근 시간 후 고생해야겠지.
‘실패 시 발생하는 이벤트도 문제야.’
세 번 이상 대련에 질 경우에 한 달간 병원 신세라니. 아마도 세 번 지는 과정에서 치명상을 입는 건 아닌가 불길했다. 거기다가 한 달, 게임 내에서의 한 달은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남주 세 명을 공략하고 메인 던전 세 곳을 갔다 오는 동안이 고작 두 달 남짓 걸렸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시간이 중요한 게임에서 한 달이나 쉬어버린다면 거의 게임 오버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병문안 이벤트 명을 봐. 도떼기시장이라고 적혀있는 것 보니 저번처럼 한꺼번에 남주들이 들이닥치기라도 하나 본데.’
한 달 동안의 입원 기간이면 루카, 노엘은 물론이요, 블루도 깜짝파티로 나타날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여러 다리 걸친 걸 제대로 걸려 영영 병원에 입원하게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들이 날 공격할 리는 없지만, 없겠지? 블루가 슬퍼서 뺨만 한 대 때려도 난 창문 밖으로 날아갈 거야. 인생은 늘 최악의 가정을 염두에 둬야 하는 법이지.’
쓸데없이 상상력이 풍부한 실비아는 괜히 끔찍한 미래를 생각하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뺨을 맞아 창문 밖으로 튕겨 나간 뒤 마차에 치여 열 바퀴 구른 뒤 강물에 빠지는 등 안 좋은 상상을 한창 이어가고 있는데, 시종이 멀리서 나타났다. 포리쉐는 어디 놔두고 온 건지 혼자였다.
“돌보미님, 설명서는 잘 숙지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