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이제 내려가지.”
“네.”
실비아는 손수레를 끌려고 했으나 시종이 이미 끌고 내려가고 있었다. 내리막길에서 무거운 손수레를 끌다간 자칫 잘못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는데, 괜찮으려나?
하지만 이어지는 시종의 행동에 실비아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시종은 그녀가 올라온 내리막길이 아닌 정자 뒤의 기둥 사이 공간으로 갔고 잠시 후 띵-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시종은 빈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실비아는 기둥 뒤를 힐끗거리며 물었다.
“저 뒤에 뭐가 있나요?”
“아, 모르셨나요? 수레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안 그래도 수레를 굳이 비탈길에서 끌고 오시길래 놀랐습니다만, 황태자 저하께서 돌보미님이 던전 공략자 출신이라고 하셔서….”
“아아, 네. 이제야 알았네요.”
실비아는 어금니를 악문 채 대답했다. 출근 첫날부터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헛고생을 제대로 했다. 사실 설명을 제대로 안 해준 밑에 사람들의 문제지, 시종과 황태자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녀는 울분을 담은 눈으로 산 아래를 째려봤다.
“그렇군요. 저는 체력 훈련의 일환으로 직접 끌고 올라오시는 줄 오해했네요.”
“그런 건 아녀요. 밑에서 아무도 설명을 안 해주셔서….”
훈련의 일환일 리가 없지. 뭣 하러 업무 중에 개고생을 자처한단 말인가. 실비아의 꿍한 대답에 시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설명서 안 받으셨나요? 제가 센터에다가 얘기해놨는….”
“제이.”
말허리 끊는 게 주특기인 황태자가 이번엔 시종의 말을 끊었다. 나지막한 부름에 시종은 화들짝 놀라더니 그쪽으로 다가갔다.
“황태자 저하, 죄송합니다. 어서 출발하겠습니다.”
“…내가 굳이 입을 열어야 하는 걸까?”
“아, 아닙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황태자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 눈썹을 문지르더니 실비아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 실비아는 얼른 포리쉐의 고삐를 잡고 정자 밖으로 이끌었다.
‘어휴, 생각해보니 방금은 좀 경우가 없었긴 했지. 황태자를 곁에 두고 사용인들끼리 대화를 하다니.’
실비아가 아무리 눈새라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눈치채서 문제지.
말없이 포리쉐를 끌고 가는 실비아, 제일 앞에서 무표정으로 걷는 황태자, 그리고 그런 황태자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걷고 있는 제이. 불편한 침묵 속에서 세 사람은 비탈길을 내려갔다.
“에취, 푸엥취!”
민들레 홀씨라도 코에 들어온 걸까. 간지러움에 재채기하던 실비아는 황태자의 무심한 시선이 닿자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호흡을 억지로 멈췄다. 왜인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실비아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억지로 나오는 기침을 참았다. 그 탓에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그녀의 모습에 우라엘 황태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포리쉐의 분홍빛으로 염색한 갈기를 살랑이고 지나갔다. 말없이 걷던 실비아의 눈이 서서히 주변으로 돌아갔다. 얼핏 보면 자연 그대로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니 사람의 손길이 닿아있었다. 키를 맞춰서 길러놓은 꽃들과 잡초가 아닌 잘 깎아놓은 잔디들이 그랬다.
‘되게 잘 꾸며놨네.’
올 때와 달리 손수레가 없으니 산책하는 것처럼 쾌적하고 좋았다. 첫 출근 날이라 긴장했었건만, 아직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 손수레도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하니 괜히 쓸데없는 노력을 한 셈이고…. 이 정도 노동 강도면 월급을 날로 먹는 것 아닐까 싶었다.
‘어, 과일나무도 있네.’
황태자의 몇 걸음 뒤에서 멀뚱히 걷던 실비아의 눈에 탐스러운 과실이 열린 과일나무가 보였다. 새빨간 사과를 닮은 과실이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엄청 맛있어 보이네. 내가 또 과일을 좋아하지.’
입맛을 다신 실비아는 손을 뻗어 과일을 땄다. 나무가 딱 그녀의 키만 했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 순간, 잠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왜 추워지지? 옷도 따뜻하게 입었는데.’
몸을 떨며 팔을 쓰다듬은 그녀는 과일을 소매로 쓱쓱 닦은 뒤 한입 베어 물었다.
‘아우, 맛있어. 자두 같기도 하고 복숭아 같기도 한 게 황궁에서 자라는 과일은 뭐가 달라도 달… 으윽?!’
“웩!”
뒤에서 들려오는 구역질 소리에 앞서가던 시종과 황태자가 뒤돌아보았다. 실비아는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구역질을 했다. 눈앞이 점점 흐려지고 온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었다.
“아이고, 돌보미님! 대체 뭘 먹은 거예요?”
“이게 무슨.”
놀란 눈의 시종과 굳은 얼굴로 포리쉐 곁에 선 우라엘 황태자의 모습이 생명이 꺼져가는 그녀의 눈에 마지막으로 담겼다.
‘아, <망령의 누런 옥수수> 때문에 소름이 돋았던 건가? 이 아이템 정말 쓸모없다. 죽어서야 알게 되는 아이템이라니….’
배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실비아의 눈이 감겼다. 곧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들을 때마다 화나는 암울한 새드 엔딩 음악이 귓가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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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비범한 제국민1>인 당신은 게임 시작 <71일> 만에 <첫 출근 기념,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경고를 잊고 저주가 걸린 과일을 먹어 마나 역류> 엔딩을 맞았습니다.
저런…. 황궁 생활이 만만해 보였나요? 분명히 돌발행동하지 말라는 시종의 경고가 있었을 텐데요. 먹으라는 남주는 안 먹고 과일만 먹는 바람에 당신은 첫 출근 기념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애석하게도 과일에 마나 역류 저주가 걸려있었군요. 만독불침이 만능이 아니었네요…. 누굴 탓하겠습니까. 안전불감증에 걸린 자신의 탓인걸!
한동안 잠잠해서 좋았겠죠. 하지만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죽음의 사자가 당신 곁을 늘 맴돌고 있단 것을요.
결국 당신은 노엘, 루카, 블루만 먹고 나머지 두 명의 동정 미남은 먹지도 못하고 무(無)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실비아! 그래도 세 명이나 먹었으니 후회 없는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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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를 확인한 실비아는 완전히 기절해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녀는 마지막 세이브 지점인 정자 앞에 서 있었다.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죽는 바람에 그녀의 정신이 멍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나, 과일 먹다가 죽은 거야?’
우라엘 황태자를 공략하려다가 죽은 것도 아니고 그냥 얼토당토않게 죽었다. 그것도 나무에 있는 과일을 한 입 베어 무는 바람에! 이건 개죽음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어이없네. 거기다가 얼어 죽을 마나 역류 저주라니. 어떻게든 날 죽이려고 작정했군.’
실비아가 실성한 사람처럼 피식거리며 웃고 있는데, 시종이 곁으로 다가와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돌보미님, 앞으로도 매일 이렇게 황태자 저하의 밀크티를 만들면 될 것 같습니다. 한 입 기미해 봤는데, 상당히 맛이 좋….”
“예. 할게요.”
“아,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실비아의 즉답에 시종의 만면에 웃음이 피었다. 실비아는 이어지는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먼저 선수를 쳤다.
“제가 시종님을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제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냥 시종이라고 불러.”
이번엔 황태자가 시종을 시종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앞의 상황과 달라졌네? 아마도 황태자는 사용인들끼리 친해지는 게 못마땅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종은 얌전히 황태자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네. 저하. 그럼 저는 이분을 돌보미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마음대로.”
황태자는 더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더니 포리쉐 곁에 앉았다. 이로써 ‘제이’라고 불릴 뻔했던 시종은 이름을 잃어버렸다. 아까처럼 시종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수레를 정리했다.
“돌보미님, 일은 어려울 게 없어요. 시킨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돌발행동하지 마시고요.”
“명심, 꼭 명심하겠습니다….”
으득-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실비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실비아가 목에 핏대가 서도록 이를 갈자 시종은 당황하면서 손사래 쳤다.
“그 정도로 각오를 다질 필요는 없어요. 누가 보면 전쟁 나가는 줄 알겠네요.”
“맞습니다, 전쟁터죠. 일터는 늘 전쟁터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 그래요? 각오가 대단하신 분이네요.”
시종이 불안한 눈으로 실비아를 보더니 손수레 손잡이를 잡으려고 했다. 실비아는 손잡이를 낚아챈 뒤 기둥 뒤 공간으로 향했고 엘리베이터에 무사히 손수레를 실어 보내고 돌아왔다.
“엘리베이터가 있단 걸 알고 계셨군요! 역시, 아까 비탈길을 올라온 건….”
“훈련의 일환입니다.”
“그러시군요! 보통 분이 아니시구나!”
시종이 반짝이는 눈으로 실비아를 바라봤다. 방금 어이없는 죽음을 겪었기에 실비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초록색 눈에서 도라이 특유의 이상한 빛이 감돌았다.
‘어째, 대충 멘트를 가로챘는데도 비슷하게 흘러가네.’
반복되는 상황이 귀찮아서 빨리빨리 해치우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어영부영 비슷한 상황이 됐다.
황태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심드렁한 눈빛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제이, 이제 내려가지.”
“네, 저하!”
실비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을 뒤따라갔다. 자신에게 어이없는 죽음을 안겨줬던 저주 걸린 과실나무를 다시 봐야 한다니, 무척 께름칙했다. 아까와 달리 그녀는 주변 풍경 따위 쳐다보지 않고 묵묵히 포리쉐의 고삐를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꼴도 보기 싫은 과실나무를 눈을 굴려 째려본 실비아는 걸음을 빨리했다.
손수레가 없어서 그런지 그들은 금방 동산 초입에 도착했다.
이제 와 보니 림보와 다르게 포리쉐는 아무거나 먹지 말라는 훈련이라도 받은 듯, 동산 여기저기에 보였던 열매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림보랑 여기를 걸었다면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림보도 죽고 나도 죽고 했겠네. 왜 마나 역류 저주가 걸린 과일나무 따위를 왜 동산에 심어 놓은 거야? 나 말고도 몇 명 여기서 죽어 나갔겠네. 하여튼 엄청 살벌한 곳이야.’
포리쉐 집이 있는 푯말을 지나친 그들은 황태자 궁 안으로 들어갔다.
“포리쉐는 쉬게 해줘. 돌보미.”
“앗? 아아, 저요. 네!”
저를 지칭하는 돌보미란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실비아는 잠시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알아듣고 대답했다. 황태자는 답지 않게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