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쉬이, 진정하렴 포리쉐야. 워워, 이건 너 먹이려고 가져온 게 아니란다. 이 언니가 재미난 걸 보여주려고.”
포리쉐가 몸에 걸치고 있는 레이스로 봐선 암말로 추정됐다. 실비아는 친한 척 언니라고 말하며 포리쉐의 옆에 걸터앉았다. 포리쉐는 마카롱을 더 먹지 못한 게 분한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실비아를 바라봤다.
찻잔을 포리쉐 눈앞에 내려놓은 실비아는 뒤에 선 채 구경하는 황태자와 시종을 힐끗 본 뒤, 수상한 마법사처럼 손을 요란하게 휘저었다. 그냥 보여주면 시시해 보일 수도 있으니 있어 보이는 퍼포먼스를 끼얹기로 한 것이다.
“아브라카다브라, 수리수리마수리…!”
실비아가 이상한 주문을 중얼중얼대자 포리쉐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수상하게 바라봤다. 포리쉐는 이상한 사람(?)을 본 덕에 진정한 것 같긴 하지만, 쓸모없다는 오명을 벗기 위해선 스킬을 보여줘야 했다. 속으로 <모세의 조그만 기적>을 외친 뒤 찻잔으로 손을 뻗자, 찻물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오!”
“히잉?!”
뒤에서 지켜보던 시종의 감탄사와 포리쉐의 울음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2초가 지나 찻물이 원래대로 돌아가자 우라엘 황태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였나?”
“앗, 황태자 저하, 아닙니다. 이건 단지 던전 공략을 하면서 얻은 잔기술이지요. 물론, 던전 깊숙이 들어가야만 얻을 수 있기에 보통 사람들은 쉽사리 얻지 못합니다만….”
실비아는 점잖은 척 대답하며 은근히 자신을 추켜올렸다. 황태자는 고요해진 찻잔을 응시하더니 턱짓을 했다.
“다시 해봐.”
“예…. 뾰로롱!”
실비아는 짧은 주문을 외며 속으로 스킬 명을 외쳤다. 그러자 찻물이 한 번 더 갈라졌다.
“계속해.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네? 네…. 얍, 아뵤, 파핫!”
황태자의 요구에 실비아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명령을 이행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평범하게 할 걸, 주문을 외치면서 하는 바람에 계속 이상한 기합을 넣어야 했다.
실비아가 계속 짧은 주문을 만들어 중얼거리자 찻물이 연속해서 갈라졌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시종이 옆으로 다가와 찻물에 우유를 졸졸 따르고 설탕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도합 10번의 스킬을 쓰고 나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긋한 밀크티가 눈앞에 완성됐다. 찻잔에 보온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걸까. 차를 따른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밀크티는 무척 따끈해 보였다. 시종이 따끈한 차를 손에 들면서 실비아의 마법 쇼는 끝이 났다. 시종이 티스푼으로 기미를 한 후, 황태자에게 차를 건넸다.
우라엘 황태자는 따끈한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은은한 미소를 띠며 그녀의 노고를 칭찬했다.
“수고했어.”
“예….”
“마법사가 아니었군.”
품에서 마도구를 꺼내 확인한 황태자는 기다란 속눈썹을 드리운 채 무심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다.
실비아는 그제야 황태자가 저한테 스킬을 여러 번 시킨 이유를 깨달았다. 마법사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계속 시킨 것이었다. 마법사면 혹시나 도움이 될까 봐? 아니면 암살 시도라도 할까 봐 의심스러워서? 후자의 이유라면 간담이 서늘했다. 시킨 대로 하지 않았다면 암살자로 오해를 받아 데드 엔딩을 또 겪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실비아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부작용이 있다는 말은 스킬 설명에 없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10번이나 스킬을 썼더니 체력이 축나긴 한 듯했다. 그게 아니면 너무 눈치를 봐서 진땀이 났거나.
‘얘 앞에서는 불안해서 뭘 못 하겠다니깐. 언제라도 죽을 수 있으니까…. 이제 상태 창을 봐야겠어. <동정 레이더> on!’
데드 엔딩을 또 맞기 전에 얼른 세이브를 해야 했다. 실비아는 <동정 레이더>의 판독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아직 공략할 수 없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해도 세이브를 더 이상 미룰 순 없었다. 며칠의 시간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불안해하던 실비아는 커다란 상태 창이 뜨자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띠링.
‘얏호! 됐다!’
———————————————
[<우라엘 황태자>
엘리셔스 제국의 작은 태양, 풀네임은 우라엘 에스티나 디 엘리셔스이다.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아름다운 은발과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의 조화는 눈의 여왕을 떠올리게 한다. 생긴 대로 논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게 무척 차갑고 오만한 성정의 소유자이다.
그는 남에게 제 기분을 설명할 필요 없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좋게 말하면 과묵하고, 나쁘게 말하면 싸가지가 더럽게 없다. 그가 연속으로 세 문장 이상 말하는 걸 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괴소문도 있다고 한다.
주 출몰장소는 황궁. 모든 게 베일에 싸여있는지라 능력치와 호감도를 알기가 어렵다.
공략 포인트 : 레벨 80 이상, 7인의 기사단보다 높은 레벨이 될 것.
호감도 : ??
공략 보상 : ??
<황태자의 씨앗 조각>
??
??]
———————————————
‘뭐야? 레벨 80 이상이라고?!’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던 실비아는 황급히 손을 들어 제 입구멍을 막았다. 우라엘 황태자가 속이 훤히 보이도록 입을 벌린 그녀를 경멸을 띤 눈빛으로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경멸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우라엘 황태자를 싹퉁머리라고 판단 중이던 실비아의 눈엔 딱 그렇게 보였다.
‘목구멍 좀 보일 수도 있지, 참 저렇게 개복치처럼 예민해서야, 누가 데려가겠냐고. 나중엔 목구멍보다 더한 것도 봐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흠흠.’
황태자가 알면 기함할 생각을 한 실비아는 먼 산을 바라보는 척 태연한 표정을 짓곤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레벨 80 이상이라니. 대체 그 경지를 메인 던전도 없이 어떻게 이룩한단 말인가? 남주를 먹…공략하는 게 이 게임에서 가장 레벨을 올리기 좋은 방법인데, 황태자의 공략 조건 자체가 현시점에서 레벨을 11 이상 올리는 거라니, 기가 찼다.
‘가끔 나오는 주변 던전들로는 80까지 절대 도달할 수 없어. 무슨 방법이 없을까? 레벨 자체를 올리는 거면 지력을 재분배하는 거북이 수인을 만난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가도 아무 소용이 없을 테고 말이지.’
지력을 재분배해봤자 레벨은 올라가지 않는다. 실비아는 속으로 깊이 한탄한 뒤 시스템을 열었다.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으니, 데드 엔딩이 갑자기 찾아오기 전에 이곳에서 게임 저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세이브를 하고 나니 그녀의 곁으로 시종이 다가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돌보미님, 앞으로도 매일 이렇게 황태자 저하의 밀크티를 만들면 될 것 같습니다. 한 입 기미해 봤는데, 상당히 맛이 좋더군요.”
“예? 그건 설탕이랑 우유 덕이지, 제 휘젓기 기술이랑은 아무 관련이 없는데요.”
저 까다로운 포리쉐를 돌보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건만, 갑자기 부당 업무가 하나 추가됐다. 이래서 회사에서 함부로 시키지 않은 짓을 보여주면 안 된다. 그러면 같은 월급에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니까. 실비아는 급히 제 손기술을 부정했지만, 시종의 생각은 달랐다.
“아뇨. 돌보미님의 기술 덕이에요. 이런 환상적인 밀크티는 처음 먹어보거든요. 그리고….”
“아닌….”
실비아의 말허리를 끊은 채 시종의 말이 이어졌다.
“황태자 저하께서 무척 만족하신 것 같습니다. 그냥 하시죠, 돌보미님.”
“아, 그런가요.”
말투는 권유 같았지만, 내용은 강요였다. 그냥 상관이 만족했으니 앞으로도 하란 거였다. 실비아는 더 따지려다가 밀크티를 마시다 말고 저를 차갑게 쳐다보는 푸른 눈에 흠칫했다. 한겨울 찬 서리도 저 눈빛보단 따뜻할 것 같았다. <모가지가 싹뚝> 데드 엔딩이 하필 떠오르는 건 우연의 일치일까. 한껏 쫀 실비아는 불만을 삼키곤 힘없이 대답했다.
“네…. 그래도 이건 체력이 좀 소모되는 일이니까, 자주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돌보미님.”
시종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네. 저는 돌보미가 아니라 실비아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말 놓으시….”
“그냥 돌보미라고 불러. 서로 존댓말하고.”
이놈의 황궁은 다들 제 말을 끊어먹지 못해 환장한 사람들밖에 없는 건지. 실비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몸을 부르르 떨며 돌아보니 황태자가 당장 검을 빼 들 것 같은 시선으로 저와 시종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실비아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난 실비아로 불리고 싶다고! 돌보미라는 호칭 별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불만 있는 실비아와 달리 시종은 얼른 황태자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걸 본 실비아도 덩달아 허리를 숙였다.
“저하, 명심하겠습니다.”
“…황태자 저하, 그럼 저는 이분을 무어라고 부르면 될까요?”
“마음대로 불러.”
황태자는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더니 얌전해진 포리쉐 곁에 앉았다. 포리쉐는 실비아의 반 가르기 쇼 덕에 마카롱을 못 먹은 설움을 완전히 잊은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비아는 호칭이 돌보미가 돼버렸는데, 시종은 마음대로 부르라니. 도무지 저 잘생긴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 건지 의아했다. 황태자의 제멋대로 태도가 익숙한 듯 시종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는 손수레를 정리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실… 돌보미님, 저는 제이라고 합니다. 풀네임이 있지만 간단하게 제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아, 네. 제이 님, 알겠어요.”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목소리를 낮추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일은 어려울 게 없어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고, 돌발행동을 안 하시면 됩니다.”
“아아, 명심할게요!”
세비스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듣기론 이 성안의 시종과 시녀들은 다들 귀족들이라고 했다. 눈앞의 사람도 아마도 귀족. 실비아는 딱 봐도 일개 평민 나부랭이인 게 티 났을 텐데,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주다니 고마웠다.
‘시킨 대로만 하는 건 당연하지. 황태자 앞에서 돌발행동을 했다간 당장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상냥하게 걱정을 해주시다니.’
실비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시종을 바라보는데,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들 사이를 가리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