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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29화 (329/372)

329화

“어? 아! 우라엘 황태자 저하. 여기까지 직접 내려오신 건가요? 제가 더 빨리 올라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우라엘 황태자가 중간 지점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는 포리쉐의 긴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무감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신화에 나오는 유니콘을 쓰다듬는 아폴론 신처럼 보였다.

포리쉐는 실비아가 반가웠는지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말고삐를 잡고 있던 땅딸보 시종이 손수건으로 포리쉐의 말발굽을 열심히 닦았다.

정자에서 급히 몸을 일으킨 실비아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자, 황태자가 무언가 맘에 안 드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 때문이 아냐. 지겨워서 내려온 거지.”

“아, 그렇죠! 아차, 내 정신 좀 봐. 저는 오늘부로 포리쉐 돌보미를 하게 된 실비아라고 합니다.”

실비아가 자기소개를 하자 우라엘 황태자가 시원스럽게 긴 눈매를 가늘게 떴다.

“내가 바보로 보여?”

“네?”

황태자는 아무 대답 없이 시종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종은 척하면 척인지 매고 있던 가방에서 새 손수건을 꺼내더니 정자를 열심히 닦았다. 그러자 황태자가 고고한 학 같은 태도로 기품있게 걸어가더니, 소리도 안 내고 우아하게 앉았다. 어이없는 건 너른 정자 뒤편도 열심히 닦은 시종이 포리쉐도 그 위에 앉혔다는 거였다.

‘뭐야, 말은 그냥 바닥에 앉으라고 하면 되잖아. 시종이나 나나 황태자랑 같은 자리에 앉는 건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남은 자리를 말이 차지하고 사람이 서는 게 말이 돼?! 참나, 더러운 세상.’

속마음을 감춘 실비아는 멀뚱히 시종 옆에 섰다. 황태자는 아무 말 없이 동산 아래를 감상하듯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살랑이는 가을바람에 은색 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확실히 입을 닫고 있으니 잘 생기긴 더럽게 잘 생겼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황태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그가 고개를 들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휴, 큰일 날 뻔. 괜히 빤히 바라보다가 황족 모독죄로 또 데드 엔딩이 뜰 수도 있어. 조심하자.’

“포리쉐 돌보미님, 잠시 저랑 얘기 좀 나누시죠.”

“네? 아아, 네.”

시종이 그녀를 정자 구석으로 데려가더니 앞으로의 업무를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오늘은 첫 출근날이니 업무를 익힌다고 생각하고 설렁설렁하면 되지만, 평소에는 늘 포리쉐를 돌보느라 바쁘다는 것. 황태자 저하가 일이 많아서 신경을 못 쓰는 날에는 포리쉐가 무척 난폭해진다나? 그걸 통제하는 게 돌보미의 메인 업무란 설명이었다.

‘당근 낚싯대가 허리춤에 달려있는 이유가 이거였군.’

실비아는 눈을 빛내며 시종의 말을 경청했다. 이것저것 주의사항과 포리쉐의 일과를 설명한 시종은 실비아의 허리를 가리켰다.

“그거는 그렇게 꺼내고 다닐 필요는 없어요. 평소에는 넣어놨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세요.”

“안 그래도 좀 흉측해서…. 어떻게 집어넣는 거죠?”

“박수를 치면 됩니다. 다시 꺼내실 땐 손을 비비시면 되고요. 사용인의 편리함을 위해서 마법을 걸어놓은 거죠. 손수건이나 기타 소모품은 직접 들고 다녀야 하지만, 이런 낚싯대는 허리에 차고 있으면 편리하잖아요.”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박수를 쳤다. 그러자 허리에 있던 물건들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마법이란 보면 볼수록 참 신기하단 말이지…. 실비아는 다시 손을 비볐다가 박수를 치며 물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걸 구경했다. 손을 비비고 박수치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상하게 흥이 났다. 그녀가 잠시 이상한 댄스를 추고 있는 사이에 시종은 구석에 있던 은 수레를 끌고 황태자 앞으로 대령했다. 댄스를 끝낸 실비아도 얼른 손수레 근처로 가 배에 손을 모으고 섰다.

“여기,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푸드 커버를 연 실비아는 깜짝 놀랐다. 당연히 우라엘 황태자의 식사인 줄 알았더니 접시엔 당근이 가득했다. 아주 깨끗하고 맛 좋아 보였건만, 포리쉐는 호강에 겨웠는지 당근이 가득한 접시를 보곤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뭐야, 기껏 들고 왔더니 싫어하네.’

실비아가 난감해하는데, 시종이 수레의 흰 천을 걷었다. 어쩐지 무겁다 싶더라니, 가려진 수레의 바닥에는 다른 음식들이 있었다. 케이크, 마카롱, 단 과자 등등의 디저트들과 따뜻한 음료가 들어있을 걸로 추정되는 여러 개의 보온병이었다.

‘접시 하나만 있는데 왜 이렇게 무겁나 했더니, 이 안에 음식들이 가득했고만.’

맛있는 디저트가 눈앞에 펼쳐지자 포리쉐의 동공이 약간 커졌다. 반면에 우라엘 황태자는 단 음식엔 관심이 없는지 여전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실비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저하, 저번에 보니 포리쉐가 딸기 케이크를 좋아하더라고요. 이 수레에 디저트도 있는데, 우선 당근 대신 여기 있는 것들을 먹여도 되지 않을까요?”

“마음대로…. 아니, 하나만 먹여.”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황태자는 머뭇하더니 말을 바꿨다.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마카롱 한 개를 접시에 담아 포리쉐에게 들고 갔다. 포리쉐는 단번에 마카롱을 입에 넣고 우걱거리더니, 성에 안 차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손수레를 응시했다.

더 먹고 싶어서 그러나 싶어 집게로 마카롱을 하나 더 집으니 황태자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몸에 안 좋아. 더 먹이지 마.”

“네, 그럼….”

실비아가 마카롱 접시를 수레에 내려놓자 포리쉐가 말발굽으로 정자를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푸르르, 히이잉!”

“안 돼.”

우라엘 황태자는 포리쉐를 향해 돌아본 뒤 엄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포리쉐의 말만 한 덩치에 조그만 마카롱 하나가 성에 찰 리가 없었다. 그는 못마땅한 듯 정자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항의의 몸짓을 했고, 원래 사람이 앉는 용도인 나무 정자는 포리쉐가 옆 구르기를 할 때마다 우지끈- 소리를 내며 위태하게 흔들렸다.

‘저러다가 정자 다 부서지겠네. 어휴.’

오늘 보니 림보 못지않게 성깔이 대단한 말이었다. 원하는 걸 주지 않는다고 저렇게 생난리를 치다니. 말이 몸부림을 치니 황태자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그는 견디다 못해 일어섰다. 그러더니 실비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집요한 눈빛을 견디다 못한 실비아는 눈을 슬그머니 옆으로 돌렸다. 아름다운 남자가 열렬하게 바라보니 얼빠인 그녀의 심장이 또 제멋대로 날뛰었다.

‘어우, 잘생긴 것 봐. 이목구비 주차 제대로네…. 근데 왜 저렇게 강렬하게 쳐다본담? 벌써 반할 타이밍인가. 아직 한 것도 없는데 말이야. 하긴, 내 얼굴이 좀….’

“네가 할 일이 뭐지?”

“…예?”

실비아가 멍한 눈으로 되묻자 옆에 선 시종이 그녀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속삭였다.

“가만히 계시지 말고 포리쉐를 돌보세요.”

“아!”

애석하게도 벌써 반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민망함에 몰래 혀를 깨문 실비아는 허둥지둥 정자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싹싹 비비자 허리춤에서 낚싯대와 동물용 빗이 튀어나왔다. 침을 꿀꺽 삼킨 실비아는 조심스럽게 포리쉐 앞에서 당근 낚싯대를 흔들었다. 포리쉐는 잠시 당근 모형에 한눈을 파는가 싶더니 다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고양이나 개도 아니고 말을 어떻게 당근 달린 낚싯대 하나로 진정시키냐고. 림보야 오래 함께 살았으니 내 말귀를 잘 알아먹었지만 말이야.’

그 순간 실비아의 뇌리에 방금 전에 썼던 기술이 떠올랐다. <모세의 조그만 기적>. 쓸모없는 기술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신기한 잔재주를 보여주면 포리쉐가 흥미를 보이지 않을까?

실비아의 낚싯대 흔들기에도 포리쉐가 진정하지 않자, 우라엘 황태자가 작게 혀를 찼다.

“그닥 쓸모가 없네.”

재수 없는 놈. 쓸모없다는 건 저를 지칭하는 말일 터였다. 실비아는 이를 악물며 화를 참았다. 아름다운 장미에겐 가시가 많은 법. 언젠간 우라엘의 가시를 사정없이 다 뜯어낸 뒤에 꽃병에 얌전히 꽂아버릴 날을 염원하며, 실비아의 조그만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실비아는 우라엘 황태자에게 싱긋 웃어 보인 뒤 손수레 밑에 있던 보온병과 찻잔을 꺼냈다.

“제 쓸모를 보여드리죠.”

“마음대로 해.”

‘꿀밤 먹이고 싶네. 어린놈의 자식이!’

들은 바로는 우라엘 황태자는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됐다. 아주 새파랗게 어리다는 건데, 그래서 그런지 가까이서 본 얼굴이 아주 뽀송뽀송….

‘잠깐. 가까이 왔는데도 아무 일 없네? 저번에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경고 메시지가 떴었는데?’

실비아는 포리쉐를 악어에게서 구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잠시 해제됐던 데드 엔딩 메시지는 마지막에 다시 활성화됐었다. 엔딩명이 <모가지가 싹뚝>이었던가? 아마도 반려마 포리쉐 돌보미가 된 순간 거리 제한이 해제되면서 데드 엔딩도 저절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럼 오늘 개수작을 좀 부려봐?

수작 부릴 생각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냐. 오늘은 첫 출근 날이니 얌전히 있자. 우선 적응부터 하고, 어디까지 접근해도 되는 건지 천천히 시험해 봐야겠어. 몸에 닿는 순간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 거리 제한 있는 남주한테 굳이 접근하자니 범법자가 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지만, 어쩔 수 없지.’

어쩐지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범죄자가 된 기분에 실비아의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음침한 변태 스토커처럼 어디까지 접근 가능한가 시험해 봐야 한다니, 탐탁지 않았다. 눈치채지 못하게 우라엘 황태자를 몰래 째려보던 그녀는 제일 중요한 상태 창 확인을 깜빡했다는 걸 깨달았다. 당장 <동정 레이더>를 켜서 확인해보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포리쉐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그녀는 보온병에 든 따뜻한 차를 찻잔에 따른 뒤 난리 치고 있는 포리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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