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사용인 센터에서 황태자 궁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기에 어린 하녀에게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다. 세비스를 점심시간에도 마주칠 일 없다니 좋긴 하지만, 반대로 근무 시간에 급하게 연락해야 될 수도 있었다.
근무처가 다른 사용인끼리는 어떻게 만나냐고 물으니, 개인 전서구를 사용하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전서구가 외출 중이면 황궁 내에서 돌아다니는 아무 새나 붙잡고 편지를 날려도 된다고 했다. 중요한 편지가 아닐 경우에 말이다. 전서구로 한가락 하던 새들이 은퇴한 뒤 황궁에서 많이 기거하고 있다나?
‘무슨 전서구 실버타운도 아니고…. 편하긴 하겠네.’
어린 하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황태자 궁에 다다랐다. 실비아는 긴장되는 마음에 제자리에 서서 천천히 심호흡했다. 공략조건을 보고 괜찮다면 세이브를 하고, 아니면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돌아가는 것도 죽어야 돌아가니까 문제지만.
‘우라엘 황태자의 공략조건이 뭘까. 궁금하네.’
“많이 긴장되세요?”
“네? 아아, 네. 아무래도…. 황태자 저하한테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요.”
“실비아 님은 잘 해내실 것 같아요. 반려마 포리쉐를 돌보는 업무를 맡기신 거면 아무래도 단시간에 신임을 얻으신 것 같으니까요.”
아닌데. 림보를 길렀던 경험 덕에 도움이 조금 됐고 마차 몰기를 좀 잘해서, 아니 좀 많이 잘해서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거기다가 던전 공략을 했던 경험 덕에 황제 폐하가 근처에 두려고 부른 게 먼저였다.
‘그 김에 반려마 업무를 맡긴 거지, 아니었으면 고용되지 못했을지도…. 웬만하면 세이브 하고 싶다. 첫날부터 죽긴 싫은데.’
<모가지가 싹뚝> 엔딩을 떠올리며 실비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까이서 본 황태자 궁은 마치 요새 같았다. 궁 주위엔 깎아지른 벼랑 아래 깊은 계곡이 보였는데, 그 아래엔 호시탐탐 먹이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악어들이 입을 쫙쫙 여닫고 있었다. 그 위에 있는 나무 도개교를 건너면 높은 성벽들 사이에 좁은 입구가 보였다. 좁은 입구 앞엔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허락받지 않은 자는 바로 썰려서 벼랑 밑 악어들의 먹이로 던져질 것 같았다.
다행히 어린 하녀와 실비아는 복장만으로 바로 통과가 됐는데, 입구를 지날 때 삑- 소리가 났다. 아마도 마법 기계가 옷에 붙어있는 인식표를 판독하는 것 같았다. 옷을 입을 때 걱정한 것과 달리 허리춤에 달려있는 당근 낚싯대와 말 머리빗, 그리고 말 꼬랑지와 귀를 보고도 기사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이런 코스프레 옷을 입고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들이라니. 뭔가 이상한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야.’
입구를 통과하자 눈앞에 거대 정원이 펼쳐졌다. 가운데를 관통하는 대리석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니 이내 중앙 건물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 안에 우라엘 황태자가 있겠지?
실비아가 침을 꼴깍 삼키는데, 갑옷끼리 부딪치는 절그럭 소리가 들리더니 선두에 선 기사가 그녀를 불렀다.
“너! 이리로 와.”
“네? 저요?”
“그래. 그때 마차 몰았던 그 여자 맞지?”
이제 와 보니 마차를 몰 때 황태자와 함께 탔던 최측근 기사인 모양이었다. 갑옷을 입어서 얼굴이 구분이 안 되는지라 그 사람인 줄 못 알아봤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 뒤를 쫓았다. 뒤돌아보니 어린 하녀가 잘해보라는 듯 양 주먹을 불끈 쥐기에, 실비아도 마주 보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건물은 겉보기와 달리 복잡한 구조였다. 쭉 걸어가다가 옆으로 돌고 또 걷다가 계단을 타기를 반복하길 한참, 기사가 주발을 걷자 초록색 초원이 펼쳐진 동산이 나타났다.
‘황태자 궁 뒤에 이런 넓은 동산이 있다니. 클래스가 어마어마한걸.’
실비아가 이중 턱을 만들며 놀라고 있는데 기사가 동산 꼭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황태자 저하는 포리쉐와 함께 저 동산 꼭대기 나무 밑에 계실 거야. 자, 이거 들고 우라엘 황태자 저하께 인사하러 가도록.”
어느새 그들 근처로 온 사용인이 손수레를 끌고 왔다. 그 위에 푸드 커버를 덮은 은쟁반이 있었다. 실비아가 접시만 들고 가려고 하자 기사가 손수레 손잡이를 가리켰다.
“들고 가도록.”
“엇? 아, 접시만 들고 가지 말고 이 수레를 통째로…요?”
기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다른 길로 향했다. 우라엘 황태자가 있는 동산 꼭대기까지는 같이 가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황태자가 동산 위에서 식사를 한단 말이야? 엄청 장소를 가릴 것 같았는데, 의외로 소탈한 면이 있네.’
소탈한 것치곤 은 수레를 동산 위까지 끌고 오라고 시키는 게 정말 별로였지만, 목숨을 거둬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세비스의 말을 떠올린 실비아는 잔말 말고 시킨 대로 하기로 했다. 황궁에 취직한 이상 까라면 까는 거지, 뭐 별수 있겠나.
돌돌돌돌-, 잔디 위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황태자 궁 뒤에 위치한 동산엔 저기 멀리 꼭대기에 점처럼 보이는 황태자와 포리쉐 말고는 아무도 머무르는 이가 없어 보였다. 드물게 사슴이나 다람쥐랑 마주치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다람쥐랑 사슴들이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거나 프릴을 달고 있었다.
‘잠깐, 저거 뭔가 익숙한데…. 어! 내 옷에 달려있는 것이랑 똑같네! 나비넥타이는 지나가던 남자 사용인들이 하고 있던 것이랑 같아.’
어이없게도 동산의 동물들은 야생이 아니라 황궁 소속 동물인 것 같았다. 동물들에게조차 저런 치렁치렁한 장식을 달다니, 황궁은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되네.
혀를 내두른 실비아는 열심히 수레를 끌었다. 열심히 걷다 보니 그녀 앞에 갈림길이 나왔고 표지판이 나타났다.
한쪽은 ‘동산까지 5km’, 다른 한쪽은 ‘포리쉐네 집까지 5km’라고 적혀있었다.
‘5km?! 미친 거 아냐? 생각보다 너무 멀잖아.’
헥헥거리던 그녀는 일단 동산 쪽 갈림길로 들어갔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약수터가 하나 나타났다. 바가지로 물을 퍼 급하게 들이킨 실비아는 한숨을 쉬며 허리를 짚었다. 남은 길이 까마득했다. 비는 어느덧 그쳐 있었기에 <소금쟁이 운동화>로는 추진력을 얻을 수 없었다.
“화가 나네….”
혼잣말을 한 그녀는 흐르는 약수 밑에 고인 웅덩이를 화풀이로 갈라보기로 했다. 두리번거리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실비아는 있어 보이도록 목소리를 잔뜩 깔며 흑마법사처럼 수상한 손짓을 하곤 입술을 벌렸다.
“나 실비아가 명한다! <모세의 조그만 기적> 사용!”
스킬명을 외치자 조그만 웅덩이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밑에 동전이 몇 개 드러났다.
얼른 줍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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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웅덩이를 뒤적거려 30골드를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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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메시지….’
메시지가 떠오른 뒤 갈라졌던 웅덩이는 감쪽같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고작 2초의 지속시간이라니. 정말 조그맣고 하찮은 기적이었다. 그래도 30골드면 아이스크림 몇 개는 사 먹을 수 있지. 주머니에 동전을 챙겨 넣은 실비아의 귓구멍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포리쉐의 울음소리가 들어왔다.
“히이이잉!”
“빨리 오세요!”
그리고 사용인으로 추정되는 우렁찬 목소리까지. 눈을 가늘게 뜨고 동산 꼭대기를 살피니 시종으로 보이는 이가 실비아를 향해 팔을 흔드는 게 보였다.
“갑니다, 가요!”
실비아는 우렁차게 화답하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어휴, 나니까 이런 무거운 수레를 끌고 동산 꼭대기까지 가는 거지. 일반인이 어떻게 수레를 끌고 저 위까지 올라가냐고! 반려마를 돌보는 업무가 아니라 완전 뒤치다꺼리하는 거구만! 고용 사기야, 사기.’
계약서에 명시된 높은 급여와 언제든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살벌한 근무 환경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불만을 터트렸을 터였다. 두고 보자. 이렇게 서럽게 만들었으니 황태자 너는 내가 제대로 능욕해주겠다. 이렇게 하고 또 저렇게 하고, 막 그냥….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망상을 머릿속에 가득 담은 실비아는 열심히 수레를 끌었다. 경사가 점점 높아지고, 그녀는 수레를 받친 채 낑낑대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동산을 오르는 길은 무척 험난했다.
“으으윽!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수레를 위로 밀던 실비아의 얼굴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땀이 어찌나 많이 흐르는지 시야를 방해할 정도였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위급상황이 아니면 남발하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살고 봐야 하니까.
스킬을 사용하자 확실히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순식간에 비탈길을 오르진 못했다. 관성의 법칙을 아예 무시할 순 없었으니까. 마차 몰기를 할 때는 관성이고 개뿔이고 다 무시하던 게임 세계가 어쩜 이럴 때는 철저히 물리학을 따르는지.
‘진심 게임공략만 아니면 은 수레고 뭐고 다 부수고 다른 직장 찾아가고 싶다.’
다행히 산길의 중간 평평한 지점에 정자가 하나 있었다.
“으으으윽!”
헥헥거리던 그녀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수레를 정자 앞에 세웠다. 손부채질을 하며 동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산꼭대기에서 들려야 할 말 울음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히잉!”
“뭐야….”
‘힘을 너무 써서 내 귀에 이명이 들리는 건가? 아직 꼭대기까지 가려면 멀었는데….’
실비아가 귀를 후비는데, 오랜만에 듣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아직 여기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