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이름이 실비아라고 했나? 오늘이 근무 첫날이라고…. 근데 왜 벌써 근무 태만이라고 적혀있는 건지?”
“네에?! 무슨! 근무 태만이라뇨? 저는 오늘 첫 출근입니다!”
실비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박했다. 사용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류철에 시선을 내렸다.
‘설마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건가!’
직접 찾아와서 사정을 설명하지 않은 게 좀 불안하긴 했었는데, 시작부터 근무 태만이 될 줄이야. 두 손을 고이 모은 실비아는 사용인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서류를 완전히 닫더니 고개를 들었다.
“근무 태만 맞네. 다섯 번 경고를 받게 되면 지하 감옥에 수감되니까 조심하도록.”
“네? 지하…. 휴우, 네. 알겠습니다.”
따지려던 실비아는 겨우 분을 삭였다. 여기는 신분 사회, 함부로 따졌다간 지하 감옥과 더 가까워질 뿐이었다. 사용인은 서류철을 그녀에게 넘기더니 깃털 펜을 건넸다.
“고용계약서네. 사인은 하단에 하면 되네.”
“예…. 잠시 읽어 보겠습니다.”
실비아는 소파에 앉아 계약서를 펼쳤다. 혹시나 불합리한 계약조항은 없으려나? 선임인 세비스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했으나 그는 다른 사용인과 대화하느라 바빠 보였다. 거기다가 눈을 희번득하게 뜨고 저를 내려다보는 사용인…. 경직된 분위기 속에 실비아는 주눅이 들어 얌전히 계약서를 읽었다.
살벌한 게임 세계답게 계약서의 내용은 기가 찼다. 경고가 5번 누적 시 지하 감옥에 수감 된다는 조항과 황태자 저하의 심기를 거스를 시 즉결 처분을 당할 수 있으며, 이는 고용보험 몇 조 몇 항에 의거해 보상이 불가능하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 외에도 어이없는 조항들이 있었지만, 실비아는 흐린 눈으로 읽어내리곤 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무슨 조항이 있든 다 감내할 수밖에 없어. 우라엘 황태자를 공략하려면 난 무조건 여기서 일을 해야 하는 처지니까.’
“여기 있습니다.”
“그래. 엘리셔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모시는 영광된 일을 하게 된 걸 축하하네.”
실비아가 사인을 마치자 사용인이 무심하게 축하를 하더니 서류철을 들고 갔다. 사용인은 옆에 선 어린 하녀를 부르더니 실비아에게 안내를 도와주라고 명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마치고 그녀의 옆으로 온 세비스가 축 처진 어깨를 다독였다.
“대화하는 거 들었어요.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봐요. 그래도 경고 수준에서 그친 게 다행이에요. 거봐요, 죽지 않을 거라고 했죠?”
“뭐…! 휴, 그래. 퍽 다행이로구나.”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니. 실비아는 따지려다가 참았다. 계속 잊어버리지만 여기는 신분제 사회. 그녀의 불만은 다른 사람에겐 이해되지 않는 것일 터였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신분제는 정말 맘에 안 든단 말이지.’
“실비아 씨, 저를 따라오세요.”
“앗, 네!”
어린 하녀가 실비아를 불렀다. 건투를 빈다고 외친 세비스는 성체가 됐으니 몸에 맞는 새로운 옷을 지급받아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어린 하녀는 그녀를 탈의실로 안내하곤 비닐로 감싼 옷을 건넸다.
“황태자 저하의 반려마를 돌보는 업무를 하게 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용인분들과 옷이 조금 다르네요. 여기서 갈아입으시고요. 혹시나 잘 모르겠으면 문을 두드려주세요.”
“네. 감사해요.”
문이 부드럽게 닫힌 뒤 실비아는 천천히 탈의실 안을 훑어보았다. 황궁은 역시 황궁인지, 탈의실인데도 남다른 기품이 느껴졌다. 상아색으로 된 사물함에 메이크업 매장 같은 조명 달린 거울이라니…. 엘리셔스 월드의 탈의실과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좀 긴장되네. 내가 과연 황태자를 꼬실 수 있을까? 찬바람이 쌩쌩 부는 데다가 자칫 잘못했다간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높은 신분의 사람인데 말이야.’
낯빛이 어두워졌던 실비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졌다. 제가 누군가. 암흑가의 후계자와 성스러운 신관, 그리고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을 공략한 이가 아니던가. 우라엘 황태자를 공략하는 건 어느 때보다 난이도가 높아 보였지만, 즐기는 자 모드로 덤벼든다면 불가능은 없을 것이다.
“자, 그럼 어디….”
실비아는 눈을 부릅뜨며 힘차게 비닐을 뜯었고 지급받은 옷을 확인했다. 옷이 좀 다르다는 하녀의 말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디테일만 조금 다르지 큰 특이점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옷을 입은 뒤 그녀는 뭔가 심하게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별다를 게 없는 줄 알았던 옷이 입고 나니 엉덩이에 말 꼬랑지 같은 게 포로롱-하고 생겨나는 게 아닌가!
대형 거울을 통해 보니 하얀 말 꼬랑지가 뒤에서 팔랑이는 게 보였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핸드크림을 바르려고 손을 싹싹 비비니 허리에서 당근이 달린 낚싯대와 동물용 빗이 튀어나와 대롱거렸다. 거기다가 머리띠를 하자마자 말귀 같은 게 머리통에서 솟아 나왔다. 이 외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숨겨진 기능이 또 있을지 몰랐다. 철저하게 사용인의 인권을 무시한 옷의 활용성에 실비아는 분통을 터트렸다.
“아우! 이게 뭐야! 뭐 이런 걸 옷에 달아놨어!”
옷을 입기 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걸 보니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별난 옷을 사용인에게 입으라고 한단 말인지 기가 찼다.
‘이게 뭐야. 코스프레도 아니고?! 다른 사용인들은 이런 옷이 아니었는데?!’
이제 나가야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실비아가 쉽사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거울 앞을 서성이고 있자, 문밖에서 어린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 입기가 힘드세요?”
“아뇨. 입긴 이미 입었는데…. 크흠.”
“그럼 들어갈게요!”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실비아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졌으나 하녀는 옷에 달린 것들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옷이 좀….”
“왜요? 불편하세요?”
“아, 아니에요.”
허리에 달린 낚싯대와 동물용 빗, 그리고 이 흉측한 꼬랑지와 귀가 보이지 않는 걸까? 하녀의 업무용 미소에 실비아는 별말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녀의 뒤를 따라가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아까 봤던 늑대 수인이 저랑 아는 사이거든요.”
“아? 아아. 타코야키 요리사 세비스 님 말이죠? 저분 며칠 쉬다 오시더니 성체가 되어서 돌아오셨네요. 원래도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빛이 나시네요.”
하녀의 대답에 실비아가 순간 입을 삐죽거렸다.
‘잘 생겼다고 생각했다니, 계속 지켜보고 있었단 건가? 걔가 여기서 인기가 좀 있나….’
실비아는 눈을 도르륵 굴리곤 어깨를 으쓱였다.
“네. 뭐, 잘생기긴 했죠. 혹시 황궁 안에선 세비스 님과 마주칠 일이 없나요?”
실비아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곤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왜 세비스가 아닌 하녀에게 일부러 물어보느냐면 우라엘 황태자를 공략할 때 최대한 그의 눈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남주 공략이 나한테 필수적인 일이라곤 하지만, 그리고 연애하는 건 내 자유긴 하지만! 세비스한테 들키면 너무 쪽팔릴 것 같단 말이지.’
하녀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가만히 두드리더니 입을 열었다.
“음, 웬만해선 마주칠 일이 없을걸요? 이 황궁이 좀 넓어야지 말이죠. 그리고 제가 알기로 우라엘 황태자 저하는 타코야키를 좋아하지 않으세요. 또한 실비아 님이 맡은 업무는 황태자 저하의 반려마를 돌보는 일이니까, 별미 요리사인 세비스 님과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겠네요.”
“그렇군요. 아! 여긴 구내식당 같은 건 없나 보죠?”
하녀의 말에 실비아는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 있을 가능성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질문에 하녀가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있긴 한데, 실비아 님은 황태자 저하의 아래에서 일하실 분이잖아요. 그쪽 사용인들의 식당은 또 따로 있어요.”
어린 하녀의 말에 실비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식당이 따로 있을 정도라니. 거기다가 황태자 전용 사용인 식당이 따로 있을 정도라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사용인들도 당연히 전용 식당이 각자 있다는 소리였다.
“와, 그렇군요. 사용인 수가 엄청 많나 봐요.”
“그렇죠. 엘리셔스 제국은 대륙에서 제일 큰 나라니까요.”
어린 하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곳에서 일하는 데 자부심이 엄청나 보였다. 그녀의 모습에 실비아도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기껏 황궁에 취직한다고 해서 좋아했더니 고작 반려마를 돌보는 업무에다가, 당근 낚싯대가 허리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상심했었는데. 이 직업에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았다.
“하하, 그렇죠. 오늘이 첫 출근이라서 여러모로 가슴이 떨리네요.”
“실비아 님은 정말 예외적인 경우세요. 우라엘 황태자 저하는 보통은 새로운 사용인을 스스로 뽑지 않으시거든요. 황후 폐하가 황태자 저하를 염려해서 신분이 보장된 사용인을 직접 선별하여 황태자궁으로 배정하시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황궁에서 근무했던 사용인들이 명을 받고 근무처를 황태자궁으로 옮기거나 하는 게 보통이거든요.”
“그렇군요. 아마도 제가 외제마를 돌본 경험을 높이 사신 것 같아요. 그리고 공연 때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줘서 가산점이 붙은 것 같고요.”
실비아의 말에 어린 하녀가 손뼉을 짝짝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앗! 설마 황궁 개방 축제 공연 때 엄청난 기술을 선보였다던 분이 실비아 님?! 소문으로 들었어요!”
“하하, 엄청날 것까진…. 맞아요.”
실비아가 쑥스러워하며 뒷머릴 긁자 하녀가 다시 한번 찬사를 보냈다.
“그래서 이렇게 바로 고용되신 거군요. 그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면 그럴 만하죠!”
이제야 기억을 하다니. 매일 다채로운 사건, 사고가 나는 드넓은 제국인지라 실비아의 활약상은 금방 잊혀진 듯했다. 아무렇지 않게 일하려면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게 나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실비아는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좀 더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오른다고나 할까….
‘거리에서 춤 공연을 더 해볼까. 혹시 알아? 거리 공연의 거장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생길지도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