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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26화 (326/372)

326화

실비아가 검은 털을 결대로 쓰다듬자 세비스가 몸을 털며 뒤로 물러났다. 어쩐지 쑥스러웠다.

“앗! 만지지 마세요. 여기, 몸줄을 채워주세요.”

“그래. 예민하게 굴긴.”

실비아는 허리를 숙이곤 조심스럽게 몸줄을 채워주었다. 그와 함께 사족보행 동물용 우비도 입혀 주었다. 바닥에 떨어진 그의 옷은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제 인벤토리엔 어떤 물건이나 넣을 수 있었기에 피크닉 가방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아이고!”

“늑대족이에요, 늑대족!”

엘리베이터를 타자 이웃 주민들이 자지러지듯 놀랐다. 늑대족이라고 설명하자 다행히 이해하는 눈치였다. 둘은 건물 입구에 섰다. 길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실비아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우비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새벽에 비가 꽤 왔었나 보구나. 이런 부슬비에도 바닥이 많이 젖어있네.”

“아마 그랬나 봐요. 새벽에 물 먹으러 나올 때 보니 비가 꽤 많이 오더라고요.”

“물맛은 어땠어?”

이번 주 보리차 담당이었던 실비아는 블루를 공략하고 얻은 <마법의 물 주전자>를 불러냈다. 마셔보니 시원하고 청량한 물맛이 꽤 좋았는데, 세비스는 어떨지 감상이 궁금했다.

“맛있던데요? 속이 깨끗해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수돗물로 만든 보리차가 최고라고 여겼는데, 그렇지만도 않더군요.”

“다행이네. 수돗물로 만든 보리차가 최고일 리가 없지…. 보리차를 졸업하고 나니 왠지 부자가 된 기분이야.”

수돗물로 만든 보리차가 최고라니. 세비스의 안쓰러운 말에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어쩐지 코가 시큰거리는 것 같아 세비스 몰래 코를 쓰윽 닦았다. 세비스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기에 알 수 없었지만 대강 짐작이 갔다. 대충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흙탕물을 겨우 마시는 꼬질꼬질한 아기 늑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늑대 왕국이 황폐하게 변했다고 했었나? 수돗물로 만든 보리차가 최고인 줄 알았다니, 어떤 물을 마시고 살아온 걸까나…. 가엾은 세비스.’

물론 보리차는 충분히 구수하고 맛있지만, 아무래도 말한 이가 세비스이다 보니 다르게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이제 좀 살만해져서 다행이야.’

여전히 어려운 형편이었다면 슬펐겠지만, 이제 실비아네는 꽤 여유가 있었다. 둘 다 황궁 사용인이라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얼굴이 다시 밝아진 실비아는 깡충 뛰어 바깥으로 나온 뒤 손에 든 줄을 흔들었다.

“갈까?”

“네!”

“잠깐만!”

실비아는 잠시 줄을 놓고 <소금쟁이 운동화>의 성능을 시험해 보았다. 스케이트 타듯이 발을 밀어보니 스무스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오, 이거 은근히 재밌는데?’

신이 난 실비아는 문워크하듯이 뒤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세비스가 ‘왕왕’하고 짖으면서 놀라워했다.

“엄청난데요? 실비아 님 완전 춤꾼 같아요. 원래도 춤꾼이었지만요.”

“이야, 그러게. 이거 내 춤 실력이 한층 더 발전하겠는걸?”

실비아는 왔다 갔다 하면서 둠칫 두둠칫 문워크를 몇 번 췄다. 내친김에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면서 현란한 탭댄스까지.

“와! 엄청나다!”

“아침 댓바람부터 춤판이라니! 대단한 용기로군!”

그때 노상 공연인 줄 착각한 행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더니 그녀 앞에 동전을 던지고 지나갔다. 그와 함께 예상하지 못한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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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거리의 춤꾼>을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달성의 효과로 간식 비용을 취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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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런 업적도 있었구나. 은근히 신나는걸?’

출근 시간까진 여유가 있었기에 실비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몇 번 더 몸을 흔들었다. 발레하듯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폴짝폴짝 뛰자 아이스크림 30개는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금전적 이득이 발생했다.

세비스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던지는 동전을 부지런히 입에 물어 실비아의 앞에 두었다. 아침부터 돈을 봐서 싱글벙글해진 그는 앞발을 들고는 실비아를 불렀다.

“실비아 님! 돈도 좋지만 이만 가죠? 뛰어서 얼마 만에 도착할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여유롭게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와, 단시간에 이 정도 수입이라니! 짭짤한데? 가끔 길거리에서 춤을 추면서 용돈벌이하는 것도 괜찮겠어.”

“실비아 님은 안 민망하신가요? 스타의 자질을 타고 나셨나 봐요.”

실비아가 동전을 주우며 즐거워하자 세비스가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진지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돈이라면 죽으라는 것 빼고 다 할 수 있어.”

세비스에겐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긴 했지만, 실비아가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이 게임 세계의 주인공이란 확신이 있어서였다. 현생에서라면 부끄러워서 거리 공연은 꿈도 못 꿨을 테지만 이곳에서라면 뭐든 가능했다.

‘홀딱 벗고 다니는 것만 아니면 다 할 수 있어. 신전에서 오랄도 했고 얼마 전엔 해변가에서도 실컷 했는걸, 뭐.’

자신감의 기저에는 숱한 야외플로 쌓은 관록이 자리했다. 하필 야외플로 관록이 쌓였다는 게 좀 그렇긴 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지 않던가.

‘난 부끄럽지 않아. 물론 세비스에게 자신감의 원천을 설명할 일은 평생 없겠지만 말이야.’

성공적인 거리 공연으로 운동화의 성능을 제대로 확인한 실비아는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세비스의 몸줄을 손에 쥐곤 호기롭게 외쳤다.

“자, 세비스! 황궁을 향해 달려보자!”

“네!”

세비스가 힘차게 대답한 뒤 앞장서 달려갔다. 실비아도 스케이트 타듯이 발을 놀렸다. 빗길에서 <소금쟁이 운동화>는 엄청난 효능을 발휘했다. 마치 바다를 가르고 지나가는 제트스키처럼 그들의 양옆에 물보라가 거세게 일어났다.

“꺄하! 엄청나구나! 바다를 건너는 기분이야!”

“왕왕!”

둘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실비아는 비 오는 날은 무조건 <소금쟁이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웬만한 놀이기구를 타는 것보다 훨씬 재밌었다.

신나는 건 좋지만 하나 간과한 게 있었다. 출근길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사실 간과했다기보다는 신경 쓰지 않은 것에 가까웠지만.

“아니, 뭐 저런 미친 것들이!”

“아이고, 나 죽네!”

출근길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때아닌 물벼락을 맞으며 항의했다. 어떤 이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한 바퀴 구르기도 했다. 양옆에서 비명이 들리거나 말거나 실비아는 눈 옆을 가림막으로 가린 경주마처럼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람들인 데다가, 속도가 빨라서 거리의 무법자가 누군지 분간도 안 될 터였다. 세간의 평가 <라이징 스타>까지 사라진 뒤였기에, 그녀의 앞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끼히힛!”

“왕왕!”

수도 여기저기를 무법자처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던 그들의 앞에 황궁 초입 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속도를 줄인 실비아가 몸줄을 당기며 세비스도 멈추게 했다.

“세비스, 이제 속도를 줄이자. 여기는 경비대가 있을 수 있어서…. 크흠.”

“예…. 맞네요. 잡혀가지 않게 조심해야, 크흠.”

세비스가 두리번거리더니 젖은 발을 털었다. 제자리에 선 실비아는 멀리서 보이는 황궁을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새로 얻은 운동화는 총알 마차를 탄 거랑 비견될 만한 속도였다. 비 오는 날만 이런 효과가 있단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와, 엄청 빨리 도착했네. 오 분도 안 걸린 것 같아!”

“그러게요. 실비아 님이 신은 운동화, 정말 엄청나네요. 비 오는 날은 꼭 이렇게 산책해요!”

운동화는 기가 막히게도 방수기능까지 있는 건지 물에 젖지도 않았다. 실비아가 위풍당당하게 몸줄을 치켜든 채 황궁을 향해 걸어가자 신난 세비스가 앞장섰다. 어느새 다다른 황궁 입구, 앞을 지키고 선 경비대장에게 세비스가 사용인 등록증을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옆에 분은 오늘부터 새로 일하기로 한 실비아 님이에요.”

“신분증을 봐야겠는데.”

경비대장이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을 내뿜었다. 실비아는 제국민 등록증을 내밀었고, 그녀의 얼굴과 제국민 등록증을 번갈아 살피던 경비대장이 옆으로 비켜섰다.

“통과!”

사용인 전용 통로로 들어선 실비아는 경비대장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쯤 숨을 편히 내쉬었다.

“어우, 여긴 늘 경비가 삼엄해. 그건 그렇고! 여기가 앞으로 내가 일할 직장이라니 꿈만 같아! 이렇게 벼락출세라니. 으리으리한 건물들 사이를 거닐고 있자니 마치 국회의원 당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인걸.”

“무슨 의원이요?”

“아, 아니야!”

국회의원이란 단어를 처음들은 세비스가 고개를 갸웃하자 실비아는 얼버무리곤 척척 걸어갔다. 아직 이른 출근 시간이었기에 사용인 전용 통로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와 시원한 바람의 조화 덕에 코끝으로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황궁은 정원조성을 잘해놨기에 보는 재미도 상당했다.

“오늘 림보를 한번 보러 가볼까?”

“황궁 사용인들이라고 해도 아무 때나 감시소에 면회 갈 수 있는 건 아녀요. 저번에 혼자서 면회 가보니까 림보 때깔이 더 좋아졌더라고요. 감시인 말로는 온천수로 자주 목욕해서 그렇다나.”

실비아는 아련한 표정이 되어 먼 곳을 바라봤다. 면회 갔을 때 봤던 호화로운 음식을 나르는 수레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 부럽…. 아, 아니지. 그래도 림보는 자유를 뺏겨서 슬플 거야. 그럼 면회를 신청해놓자. 이제 황궁을 매일 올 수 있으니 허락이 떨어지는 대로 바로 보러 가야지.”

“그래요. 저도 한동안 사업 준비하느라 신경을 못 썼네요. 점심시간에 신청해놓을게요.”

대화를 나누던 그들의 앞에 다른 화려한 궁들과 달리 무던한 색의 건물이 나타났다. 사용인들이 머무르는 센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실비아를 세비스가 인사과로 데리고 갔다. 깐깐해 보이는 뿔테 안경을 낀 사용인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는 손에 든 서류철을 뒤적이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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