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실비아의 비명에 세비스가 놀라 뛰쳐나왔다. 붉은 눈이 엉망으로 빻아진 마늘의 잔해들과 망치를 든 실비아를 번갈아 훑었다. 입을 멍하니 벌린 그가 심신미약자 대하듯 시선을 던지자 그녀가 황급히 변명했다.
“아냐, 내가 한 게 아니라 망치가 저절로 마늘을 빻았어!”
“예…. 그러시겠죠. 이해해요.”
불신 어린 붉은 눈에 실비아는 울컥하며 서러움이 차올랐다. 그녀는 망치를 식탁 위로 휙휙 휘두르면서 꿍얼거렸다.
“얘가 왜 이래? 방금 한 짓 다시 해봐. 네가 한 거잖아!”
실비아가 마구 흔들어대도 망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만 볼 수 있는 아이템 설명을 보여줄 수도 없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실비아가 삽질하는 사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묵묵히 엉망이 된 식탁 주변을 치운 세비스가 고개를 저었다.
“실비아 님, 소파에 누워서 쉬고 계세요. 다 이해하니까…. 가끔 저도 다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어요. 물론 실행하진 않지만…. 휴, 자세히 묻진 않을게요.”
“아냐, 아니라니까!”
실비아가 억울함에 가슴을 퍽퍽 쳤지만 세비스는 대꾸 없이 개판이 된 식탁을 정리할 뿐이었다. 그녀는 세비스의 옆에서 맴돌며 계속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냐, 정말 아니라고. 얘가 왜 안 움직이지? 분명히 얘가 한 거야. 마늘 빻는 기능이 있어서…!”
“휴우. 알겠어요. 새로 얻은 망치인가 보죠? 던전 공략하는 망치가 마늘도 빻는다니! 이거 참 엄청나군요. 그래도 웬만하면 껍질째 마늘 빻기는 자제하는 게 좋겠어요.”
영혼 없이 말을 내뱉은 그는 정신 사납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실비아를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냉장고에서 식빵과 파스타 면을 꺼내 마늘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재료를 보니 마늘빵과 마늘 파스타를 준비할 모양이었다.
원망스럽게 망치를 노려보던 실비아는 온몸을 축 늘어트리곤 소파로 걸어갔다. 화병이 났는데 풀 길이 없으니 미칠 것 같았다. 소파에 드러누워서 골골거리고 있으려니 향긋한 마늘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주인이 억울한 걸 알면 스스로 움직여서 해명을 해야 할 것 아냐! 맘대로 움직이기만 하고 지성은 없는 건가?’
실비아는 식탁에 기대놓은 망치를 계속 째려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에도 망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요리를 완성한 세비스가 접시를 세팅하며 그녀를 불렀다.
“실비아 님, 오늘 많이 힘드셨으니까 맛있는 것 드시고 힘내세요. 에효….”
그의 말끝에 따라붙은 짙은 한숨에 실비아가 소파 위에서 난동을 부렸다. 사지를 들썩이는 그녀의 눈에 어느새 눈물 한 방울이 고였다.
“아냐, 내가 아니라고! 범인은 쟤란 말이야!”
“예. 알겠어요. 이 나쁜 망치 같으니! 너 때문에 실비아 님이 사이코가 돼버렸잖아!”
세비스는 망치에게 꿀밤을 주는 모션을 취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와 무심한 표정으로 ‘나 지금 연기 중이에요, 그것도 대충이요.’라는 티를 있는 대로 냈지만.
“어서 식사하러 오세요.”
세비스가 성의 없이 혼내는 연기를 끝낸 뒤 그녀를 재차 불렀다. 실비아는 소파에 얼굴을 파묻곤 서러움을 삼켰다.
“흑흑….”
“오세요. 음식 다 식어요.”
“이씨…! 악!”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가 식탁에 앉은 실비아는 열이 받은 나머지 망치를 주먹으로 내리쳤다가 손을 잡고 낑낑댔다. 괜히 손만 아프고 망치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나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나. 실비아의 주먹질에 망치가 스르륵 바닥으로 쓰러졌다. 분명히 아까 움직이는 걸 봤건만, 평범한 무생물처럼 굴다니.
망치에 화풀이하던 실비아가 주먹을 쥐고 끙끙 앓자, 세비스가 포크를 건네며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노답이라는 표정이었다.
“…드세요.”
“후우, 진짜!”
망치가 움직이지 않는 한 억울함을 풀 길은 없었다. 포크를 건네받은 실비아는 눈썹을 축 내린 채 힘없이 음식을 집었다. 기분이 안 좋은 와중에도 세비스가 만든 음식은 너무 맛있었기에 포크 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난 뒤 실비아는 설거지를 하고, 세비스는 이불들을 모아 현관으로 향했다.
“빨래방에 갔다 올 테니 화분들 좀 다시 베란다로 옮겨주세요.”
“으응….”
세비스가 밖으로 나가고 실비아는 목장갑을 끼고 화분을 옮겼다. 마지막 화분을 베란다에 놓는 순간, 쿵쿵-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뭐야!”
놀란 실비아가 거실로 넘어가 보니 망치가 공중에 뜬 채 액자의 못을 박고 있었다. 문제는 힘 조절을 못 한 건지 액자가 부서지고 있었단 것….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망치의 손잡이를 잡고 당겨보려고 했으나 미친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와장창- 소리가 나더니 액자가 여러 동강이 난 채 아래로 떨어졌다.
“으악! 안 돼!”
실비아네가 큰마음 먹고 샀던 유일한 인테리어 소품이었다. 돈 들어오는 해바라기 그림이라며 세비스가 고심해서 고른 거였는데, 그걸 깨부숴버리다니. 망치는 할 일을 마친 뒤 제멋대로 부웅- 날아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소파에 누웠다. 망나니 같은 망치의 미친 행동에 실비아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마늘 빻는 효과가 있다고 좋아했더니 이런 개 같은 짓만 할 줄이야! 이 애물단지 같으니!”
“우웅….”
망치에서 조그만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난 그럴 생각은 없었다는 항변처럼 들리기도 했다. 세비스가 돌아오면 또 액자를 부순 사람이 저라고 오해할 텐데, 그렇게 되면 그녀는 대청소 때문에 화가 나서 여기저기 분풀이한 도라이 취급을 받을지도 몰랐다. 아니, 이미 도라이 됐지!
화가 잔뜩 난 실비아가 망치를 움켜쥐었다.
“어쩔 거야! 이딴 망치, 재활용 센터에 버리겠어!”
실비아는 망치를 들고 현관으로 척척 걸어갔다. 그러자 망치가 바닥을 질질 끌며 따라가기를 거부했다. 갑자기 무거워진 망치 때문에 실비아는 제자리에 서서 한탄했다.
“뭐야! 어쩌자는 거야!”
우웅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안간힘을 써봤지만 망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실비아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온갖 말썽은 다 부려놓고 버림당하긴 싫단 거야? 어휴! 말귀는 알아먹는 것 같으니 세비스가 오면 움직이도록 해. 안 그러면…. 끽.”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망치게 잘게 떨렸다. 실비아가 망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더니 세비스가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 집에 돈 들어오라고 기껏 산 액자가….”
세비스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세비스의 목소리에 실비아는 울상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나 아냐. 얘야!”
“실비아 님, 대체 뭐가 문제…. 어? 정말이네.”
“봐봐! 맞지?”
망치가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눕자 세비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비아는 호들갑을 떨며 망치를 가리켰다. 이번에도 시치미 떼면 축복이고 뭐고 그냥 갖다버리려고 했는데, 망치는 다행히 버림받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누웠던 망치가 다시 일어나더니 이미 부서진 액자를 한 번 더 내리쳤다. 쾅쾅- 요란하게 액자 부서지는 소리에 실비아와 세비스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망치를 쳐다봤다.
“실비아 님, 망치에 귀신이라도 씐 건가요?”
“그건 아냐. 아, 도깨비가 씌어있다고 했었나. 귀신이랑 다를 것 없긴 하네.”
세비스는 눈을 가늘게 뜨곤 망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망치는 뭔가 잘못된 걸 뒤늦게 알았는지, 다시 바닥에 가만히 누웠다.
“좀 길들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이러다가 집에 있는 물건을 다 부수겠어요.”
“그러게. 살다 살다 이제 망치까지 길을 들여야 하다니.…그래! 이제 내가 안 그랬단 걸 알겠지?”
한숨을 흘리던 실비아가 뒤늦게 따지자 세비스가 사과했다.
“네. 죄송해요. 실비아 님이 저라도 오해하셨을걸요? 망치가 어떻게 혼자서 마늘을 빻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믿기 힘들죠.”
“하유, 다행이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사이코가 될 뻔했어!”
실비아는 가슴을 쓸어내린 뒤 망치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망치는 반항 없이 얌전히 안으로 들어갔다. 이젠 망치가 헛짓거리 안 하는지 감시까지 해야 한다니,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망치가 어질러놓은 거실을 다 치우고 난 뒤, 실비아는 베란다에 서서 세비스에게 손을 휘저었다.
“방에서 쉬고 있어. 나는 애물단지 망치를 좀 강화해야겠어.”
“네? 어떻게 하시게요?”
“좋은 물건을 얻었거든. 설명하긴 힘들고, 알아서 할 테니 세비스 넌 안에서 쉬고 있어!”
그동안 해괴한 일을 많이 겪은 세비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방에 들어갔다. 실비아는 <대장간>과 애물단지 새 망치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그리고 원래 쓰던 무기인 그냥 망치까지도.
“한번 둘을 합쳐봐야겠네. 가능하려나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제야 <대장간>을 제대로 써볼 수 있겠구만.”
“우웅….”
불안한 듯 몸을 떨던 망치는 실비아가 모루 위에 올려놓자 잽싸게 밑으로 내려갔다. 실비아는 망치를 다시 모루 위에 올려놓으며 위협했다.
“가만히 있어! 처음엔 아프지만 점점 좋아질 거야.”
제가 한 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 실비아는 뒤늦게 덧붙였다.
“크흠, 기분이 좋아지는 건 아니고 성능이!”
“우웅!”
거부하는 망치를 억지로 가져다 대자 <대장간>이 커졌다. 베란다 크기를 잘못 측정해서 살짝 창틀이 찌그러지는 사소한 참사가 있었다. 실비아는 원래 무기인 망치를 반항 중인 새 망치 위에 얹었다. 무기를 합치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기업 회장이 말하지 않았던가. ‘일단 해봐.’라고. 일단 해보면 답이 나올 터였다.
실비아는 모루 옆에 걸려있던 대장간용 망치로 두 무기를 깡깡- 소리가 나도록 두들겼다. 방법이 잘못된 건지 어떤 변화도 없었다. 실비아는 다시 한번 무기를 강하게 두드리며 혼잣말했다.
“으휴! 움직일 수 있는 거면 좀 날아다닐 수도 있던가. 그러면 이런 짓 안 해도 되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