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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23화 (323/372)

323화

도끼병 완치엔 상대방의 팩트 폭행이 최고다. 실비아는 여러모로 망신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제가 오해한 걸 세비스가 눈치챈 거라고 해도 망신이고, 아니어도 민망했다. 초기의 목적은 잊고 연애 같은 한가한 소리나 하는 사람이 된 셈이니.

이제 다시는 세비스에게 연애가 어떻고 떠들지 말아야지. 그리고 엄한 오해하지 말아야지. 그녀는 수차례 다짐하며 정신없이 경보했다.

그때 뒤따르던 세비스가 그녀를 크게 불렀다.

“실비아 님!”

“…….”

뒤를 힐끗 본 실비아는 얼른 어두운 골목 구석에 처박혔다. 망신스러워서 최대한 어둠과 동화되고 싶었다. 두리번거리던 세비스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왜 그렇게 빨리 가세요. 천천히 좀 걸어요. 그리고 쇼핑백 제가 든다니까 왜 뺏어가세요.”

“응? 아냐, 아냐. 내가 들래. 내가 드는 게 낫겠어. 난 쇼핑백 드는 걸 좋아하거든!”

실비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쇼핑백을 품에 안았다. 쇼핑백을 다시 뺏어가려던 세비스는 제 앞머리를 쓸어넘기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래요. 그렇게 좋으시다면. 그거 한 개만 드세요. 나머지는 제가 다 들게요. 힘 좋은 집사 놔뒀다가 어디다 써요.”

“응….”

세비스가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실비아는 쇼핑백을 품에 안은 채 몇 걸음 뒤에서 그의 뒤를 쫓아갔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실비아가 뒤에서 쫓아오는 걸 확인한 세비스는 손을 여러 번 까딱였으나 그녀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반성의 의미로 뒤에서 좀 걸을게. 신경 쓰지 마!”

“네? 반성은 무슨….”

몇 번 더 이리 오라고 손을 흔든 세비스는 다시 고개를 젓는 실비아를 보곤 한숨을 내쉬며 뒤돌았다. 앞을 응시하는 세비스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방금, 자신이 살면서 익힌 모든 처세술을 발휘해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 실비아가 갑자기 꺼낸 말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차분하게 말을 내뱉은 것이다.

‘표정 관리가 돼서 다행이야.’

세비스는 손바닥으로 제 뺨을 쓸어넘겼다. 억지로 표정을 지은 안면근육이 씰룩거렸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소개해달라니, 우리는 가족이라니. 제 감정을 눈치채고 선을 긋는 듯한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실비아와 사이가 어색해지기 싫고, 또 어색해지면 안 되는 거니까. 다행히 연기가 완벽했는지 제 주인은 완벽히 속아 넘어간 듯했다. 어두운 곳에 숨는 거며 어색한 반응이며, 누가 봐도 민망해하는 티가 났다.

방금의 대화로 세비스는 그녀의 감정을 정확하게 알았다. 정말로 일말의 기대조차 하면 안 된다는 걸. 이번에 제대로 부인했으니 한동안 실비아는 그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이걸로 된 거겠지, 이걸로.

‘이제 욕심부리지 않을 거야, 정말로.’

더 확실하게 하려면 실비아가 말한 수인을 소개받아야 하려나? 그러면 그녀는 정말로 저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접을 텐데. 붉은 눈이 점차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감정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죄 없는 다른 이를 이용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거리 한가운데 멈춰서서 남은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곤 태연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실비아 님! 빨리 와요. 기어 오시는 건가요? 계속 기어 오실 거면 저 먼저 집에 갈게요!”

“…어? 참나, 기어가긴 뭘 기어가! 네가 걸음이 빠른 거지.”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반박했다. 겉으론 씩씩거리면서도 내심 세비스가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걸어줘서 고마웠다. 헥헥거리며 뛰어오자 세비스가 장난스럽게 쯧쯧거렸다. 평소에 잘 보던 익숙한 표정에 실비아의 마음이 다시 편안해졌다.

“빨리 갑시다. 어휴, 지금 출퇴근 시간이라서 마차 정류장에 줄이 엄청 서 있다고요. 한참 기다려야 집에 갈 수 있겠네요.”

“어? 그러게. 시간을 잘 볼걸.”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적인 실비아가 마차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세비스는 원래대로 돌아온 실비아의 표정에 안도하며 그런 그녀의 뒤를 천천히 뒤따라갔다.

* * *

주말은 온전한 휴식 시간이었다. 남주들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던전을 공략하는 것도 아닌 순도 백프로의 휴식. 그러나 하늘은 그녀를 뒹굴거리게 놔두지 않았다. 소파에 누워 과자 부스러기를 배 위에 쌓던 실비아는 세비스의 강력한 권고로 미뤄둔 대청소를 하며 가구 재배치를 하는 생고생에 동참했다.

그는 곧 겨울이 찾아올 테니 침구류와 옷장 정리도 한꺼번에 해치우자고 했다. 대충 하려던 실비아는 수건을 목에 걸고 공구까지 허리에 찬 세비스를 보며 기겁했다. 그는 목장갑을 건네며 진지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실비아 님, 우선 베란다에 조그만 화분들 좀 안으로 옮겨 주실래요? 베란다 청소도 해야 하거든요.”

“적당히 하고 놀면 안 될까?”

실비아가 죽상으로 대답했지만 세비스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끼곤 실비아를 내려다봤다.

‘저런…. 세비스 쟤는 알려나 몰라. 예전이랑 달리 그렇게 쳐다보면 무섭다고!’

눈을 억지로 크게 뜬 실비아는 목장갑을 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아냐. 하자, 그래. 해야지. 오늘 아니면 언제 하겠어.”

“잘 생각하셨어요. 이사 가지 않고 이 집에서 계속 살 확률이 높으니까요. 뭐, 혹시나 이사가게 되더라도 침구류나 옷장 정리는 미리 해두는 게 좋죠. 또, 베란다 창문이 깨지는 바람에 거실에 먼지가 많이 들어왔어요. 사는 동안은 건강을 위해서라도 청소하는 게 좋아요.”

“그래….”

아침에 온 수리업자가 베란다 창문을 말끔히 고쳐두고 갔다. 하지만 구멍이 뚫린 사이에 먼지가 많이 들어왔을 터. 그러니 거실 청소를 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가구 재배치는 대체 왜 하는 건지. 아무래도 세비스는 익숙함의 미덕을 모르는 듯했다.

실비아는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참았다. 어제 그런 오해를 했으니 세비스가 제 생각을 알아챘든 아니든 스스로 자숙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내가 잠시 미쳤었던 게 분명해. 이렇게 집안일을 신나게 시키는 걸 보니 세비스는 날 전혀 여자로 안 보는 것 같은걸.’

역하렘 여주 짓거리를 오래 하다 보니 도끼병 렌즈가 제 눈에 덮여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오늘의 세비스는 저를 무척이나 부려먹었다. 이거 옮겨라, 저거 옮겨라. 이거 닦아라, 깔끔히 닦아라. 명령해대는 꼴이 열정페이 받는 사회초년생 알바를 부려먹는 악덕 사장과 다를 바 없었다.

정신없이 여기저기 옮기고 치우고 닦다 보니 오후가 다 되었다. 각자 방 정리는 알아서 하기로 돼 있었기에 실비아는 제 방으로 들어간 뒤 문을 꽁꽁 잠갔다. 완전 파김치가 된 그녀는 침대도 아닌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옷장 정리는 무슨, 대충 꺼내입으면 되는 거지. 어차피 여기는 세비스도 확인하지 않을 테니까 몰래 쉬자.’

배 위에 손을 포갠 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려던 실비아는 노크 소리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세비스의 단호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실비아 님, 제대로 하고 계신 거 맞죠?”

“어? 어어! 방음이 너무 잘 돼서 청소 소리가 안 들리나 봐? 의심이 너무 많다, 세비스! 각자 방에 집중하자.”

“흠, 그래요.”

곧 뚜벅뚜벅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실비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독한 청소중독 같으니.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러 올 줄은 몰랐다. 실비아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옷장을 정리했다.

“으휴, 어차피 몇 벌 되지도 않는 거….”

밍기적밍기적대며 옷걸이를 넘겨보니 구석에 넣어 둔 살균 투구와 붕대가 눈에 띄었다. 실비아는 입도 가리지 않고 하품을 연거푸 하며 그것들을 내버려 두었다.

‘만사가 귀찮아.’

옷장 정리를 대충 마치고 난 뒤 침구류를 누웠다 앉았다 하며 느릿느릿 교체한 실비아는 여름 이불들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세비스의 방 쪽을 향해 소리쳤다.

“방 다 정리했고 여름 이불도 빨래하게 거실에 내놨어!”

“네! 쉬고 계세요. 부엌에 있는 통마늘은 건드리지 마세요. 제가 좀 있다가 나가서 손질할 거예요!”

드디어 세비스의 휴식 허락이 떨어졌다. 실비아는 식탁에 올려진 통마늘 망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통마늘이라, 건드리라고 해도 건드릴 힘도 없는걸.’

실비아는 기절할 듯이 소파에 엎어졌다. 한참을 엎드리고 있던 그녀는 무의식중에 부엌을 돌아봤다가 소스라치듯이 놀랐다. 분명히 빨간 망에 얌전히 담겨 있었던 마늘이 온통 식탁에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 껍질들이 바닥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참혹한 모습!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펄쩍 뛰면서 오돌오돌 떨었다.

“세비스! 마늘이 이상해! 마늘이…!”

“저 바빠요! 거기 얌전히 계세요.”

실비아가 농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농담하는 거 아닌데…! 그녀는 눈을 비비고 다시 식탁 쪽을 보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확인한 현장은 더욱 처참했다. 껍질째 빻아진 통마늘은 형체를 알 수 없게 뭉개져 있었다.

설마 세비스가 저가 잠시 누운 사이에 마늘을 빻고 들어간 걸까?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껍질들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누굴까. 실비아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범인이 없으니 이대로면 꼼짝없이 제가 혐의를 뒤집어쓸 판이었다. 청소 스트레스 때문에 화풀이하려고 망치로 두들겼다고 생각할 수도….

‘망치? 잠깐, 내가 심해왕국에서 얻었던 망치에 마늘 빻기 효과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대장간>을 사용해 본다는 게 깜빡 잊고 있었다. 실비아는 인벤토리를 열어 <드래곤 장인이 만든 망치>와 <대장간> 아이템을 확인하려고 했다.

‘뭐야, 왜 없지?’

<대장간>은 보였으나 새로 얻은 망치가 있던 자리가 휑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빈 실비아는 다시 한번 텅 빈 망치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꽝꽝, 그 순간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크게 놀랐다.

“으악!”

멀쩡하던 마늘이 하나 더 빻아졌다. 그리고 바닥에는 심해왕국에서 얻었던 새 망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실비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망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손에 든 순간 세비스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실비아 님! 왜 그러…. 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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