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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22화 (322/372)

322화

“네? 아아, 많긴 한데, 바닷가 마을이나 수도 길거리보다 많이 보인다는 소리지, 엄청 많다는 아녀요. 수인들은 보통 인간세계가 아닌 자기네 왕국에서 살아가니까요.”

세비스의 대답에 실비아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예쁜 미소에 멍해졌던 세비스는 조그만 입술이 벌어지며 나온 말에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 그래도 꽤 있단 소리구나. 혹시 황궁에 관심 가는 수인은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어느새 식당 직원이 곁으로 다가와 주문한 메뉴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에 실비아는 손뼉을 짝짝 치곤 수저를 들었다. 그녀는 시선을 음식에 둔 채 대답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야. 호감 가는 수인 없냐고! 너도 이제 완전히 성체가 됐으니까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진 않나 해서.”

“아…. 딱히 관심 가는 수인은 없어요. 일하느라 바빠서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내는 걸요, 뭐.”

앞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뒷말은 거짓말이었다. 황궁에선 맡은 일만 제대로 해내면 자유시간이 많았다. 세비스는 그곳 수인들과 친하게 지냈고 모두들 성별 상관없이 잘 대해주었다. 실비아한테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지만,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성도 꽤 있었다. 물론 연애할 때가 아니라고 다 좋게 거절했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걸 물어보시는 거지? …설마.’

그의 뇌리에 아까 옷가게에서 봤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보니 직원과 실비아가 속닥속닥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실비아에게 직원이 명함을 건네는 걸 보고 의문을 가졌었다. 세비스는 불길한 예감을 안은 채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을 한 스푼 떠 입에 넣었다. 열심히 씹어 목 안으로 음식을 넘긴 그녀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아, 황궁에는 관심 가는 수인이 없어? 그럼, 혹시 괜찮은 수인을 소개받아볼 생각은 없니?”

“네? 아는 분이 있으세요?”

“으응. 아는 건 아니고! 밥 좀 먹어. 이거 맛있어.”

실비아는 수저도 들지 않은 세비스의 손을 힐끗대곤 음식을 권유했다. 세비스가 내키지 않는 식사를 시작하자 실비아가 말을 이어갔다.

“…아까 부티크 직원이 자기 친구 조카 중에 되게 좋은 여자 수인이 있다면서 너랑 딱 어울리겠다고 하더라고. 토끼 수인이라던가.”

불길한 예감은 어떻게 늘 빗나가지 않는 건지.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다른 이를 소개받을 생각 없냐는 말을 듣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세비스는 울컥하고 올라오려는 서러움을 참으려고 음식을 크게 떠 억지로 입에 넣었다. 자칫하면 아무 잘못도 없는 실비아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낼 것 같았다.

세비스가 아무 대꾸가 없자 실비아가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세비스는 최선을 다해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다. 이미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억지로 음식을 씹었다.

그 탓에 실비아는 그가 ‘토끼 수인’이라는 말에 곤란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아! 그거 알려나 모르겠네. 요즘… 음.”

“…….”

실비아는 음식을 사이사이 집어 먹으며 말하다가 멈칫했다. 마법약이 있어서 다른 수인끼리도 아이를 걱정 않고 낳는다는 말을 하기가 너무 민망했기 때문이다.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무난한 문장으로 바꿔서 내뱉었다.

“그래,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종족이 다른 수인끼리도 결혼 많이 하나 보더라. 혹시 알고 있어?”

“아…. 그랬군요.”

세비스는 현재 온 신경을 집중해서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기에 실비아의 말에 짧게 대답하는 게 고작이었다. 다른 수인끼리 만날 수 있다는 건 이미 황궁의 수인들에게 질리도록 들은 얘기였다. 아마 그녀도 마법약 얘기를 들은 거겠지.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저는 지금 다른 수인은 물론이고 같은 늑대족이랑도 인연을 맺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입맛이 썼다. 그는 억지로 음식을 삼킨 뒤 물로 목을 축였다.

한숨을 쉬고 시선을 들자 실비아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소개받을 생각 없어? 아까 부티크 직원에게 명함도 받아놨는데!”

“별로. 연애에 관심 없어요.”

세비스의 심드렁한 대답에 실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왜. 퇴근하고 나서 남은 시간에 귀여운 수인 여자친구랑 놀면 딱 좋잖아.”

“연애할 시간 없어요.”

“뭐? 아, 그래. 할 일이 많긴 하지…. 하지만 토끼족이면 엄청 귀여울 것 같은데….”

세비스는 별 대답 없이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세비스의 얼굴에 실비아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

‘왜 저런 반응이지? 그래, 할 일이 많긴 하지…. 아, 내가 너무 내 위주로 생각한 걸까? 나야 게임 공략을 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남자를 만나야 하지만, 세비스는 늑대 왕국을 원래대로 돌려놔야 한다는 목표가 있으니 연애가 사치라고 생각했을 수도.’

주변 사람들은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실비아네 테이블에만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반도 안 먹고 수저를 내려놓은 세비스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두드리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저는 수인보다는 인간이 좋아요.”

“어? 아, 그래. 인간! 아, 인간이 좋구나. 네 취향은 잘 기억해둘게.”

실비아는 세비스가 먼저 식사를 끝냈다는 걸 알고는 허둥지둥 남은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동공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인간이 좋다고? 무슨 뜻이지. 혹시 내가 수인을 엮어주려고 해서 기분이 상한 건가? 수도는 그나마 괜찮지만 외진 바닷가 마을에서는 수인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설마 내가 종족차별 발언을 한 건 아니겠지.’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서 마음이 안 좋아졌다. 그와 더불어 눈치가 쥐꼬리만큼밖에 없는 실비아의 머리에 순간 벼락처럼 묘한 예감이 내리쳤다. 설마…. 실비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뒤 주방 쪽으로 걸어가 냉수를 요청했다.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니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던 망상이 잠시 사그라들었다.

실비아의 눈이 식탁에 팔꿈치를 기댄 채 턱을 괴고 있는 세비스에게 향했다.

‘설마 쟤가 나를 염두에 두고 저런 말을 한 건 아니겠지. 인간이 더 좋다고? 왜?’

어째서 이런 미친 생각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고질병인 도끼병이 또 도진 걸까?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 냉수를 마셨는데도 망상이 계속 부풀어 올랐다. 연거푸 석 잔의 냉수를 마신 실비아가 차가워진 배를 문지르며 자리로 돌아왔다.

“세비스, 이제 나가자.”

“그래요.”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날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세비스는 실비아가 들려고 했던 쇼핑백을 묵묵히 가져가더니 또 10개의 쇼핑백을 양손 가득 혼자서 들었다. 세비스 옆에서 말없이 걷던 실비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할 건데. 너 혹시 나 좋아하냐고? 아니, 내가 왜 계속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지. 미쳤나 봐 정말!’

혹시 물어봤다가 정말 좋아한다고 하면 어쩔 건가. 둘은 당장 다음 주부터 황궁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다. 우라엘 황태자를 꼬셔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대답을 들으면 공략에 지대한 차질이 생길 터였다. 그녀는 세비스의 마음에 보답해줄 수 없으니까.

거기다가 그는 남주 후보가 아니었다. 남주 후보라고 해도 공략하기 꺼려질 판국인데, 남주 후보가 아닌 이상 같이 사는 식구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내가 도끼병인 걸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좀 맘에 걸려. 혹시 모르니 세비스가 마음을 정리하도록 돌려 말하는 게 좋겠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헛다리 짚은 걸 수도 있으니 너무 심각하게 말을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랬다가 아니라면 개망신이니까. 혹시나 처음에 생각한 대로 종족차별 발언이라서 기분이 상할 걸 수도 있었다.

할 말을 속으로 정리한 실비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말없이 걷고 있는 세비스를 불렀다. 최대한 떨지 않고 명랑한 목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세비스!”

“네?”

세비스는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던 듯 눈에 띄게 놀라며 그녀를 응시했다. 실비아는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말을 이어갔다.

“너…. 아까 인간이 좋다고 했지? 설마 황궁에 마음에 둔 여자가 있는 거면 나한테 먼저 보여줘야 해. 난 네 가족이잖아.”

“가족….”

눈을 도르륵 굴린 세비스는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실비아와 눈을 마주쳤다.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족 맞죠. 근데 실비아 님.”

“응?”

실비아가 어벙하게 되묻자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무슨 오해를 하시는 거예요? 저는 연애에 관심 없다고 했잖아요. 지금 놀 때가 아니에요.”

“어어?”

“그리고! 저는 실비아 님이 빨리 강해지시길 바라고 있어요. 그래야 하루속히 늑대 왕국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세비스의 단호한 대답에 실비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세상에, 이게 무슨!

“어? 아…. 헙, 그렇지. 미안, 진짜 미안! 놀러 온 게 아니지. 내가 말을 잘못했어. 이제 이런 이야긴 꺼내지 않을게, 절대! 안 꺼낼 거야.”

그녀는 급히 손사래를 치곤 세비스가 들고 있던 쇼핑백 한 개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그러곤 대답이 돌아올세라 앞장서 걸어갔다. 거리가 어두워지고 있기 망정이지, 밝은 대낮이었으면 시뻘게진 얼굴을 바로 들켰을 터였다.

‘아유, 어떡해. 오해하냐니? 설마, 내 도끼병을 알아채고 저렇게 대답한 건 아니겠지. 그러게, 연애할 때가 아니지. 아닌데…! 게임 공략 방법이 하필 연애하는 거라서 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거 아닐까? 쪽팔려 미치겠네.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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