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여기 명함이요. 혹시나 소개받으실 마음 있으시면 이 명함으로 연락하라고 전해 주세요. 수인끼리 만나면 좋잖아요. 제 나이 또래의 수인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서로 성장 과정도 비슷하니까 천생연분일 거예요.”
“아….”
실비아가 건네받은 명함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은 세비스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황급히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는 입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세비스! 옷이 날개네. 완전 네 옷이야. 이대로 가도 되겠는걸?”
“그런가요? 몸에 딱 맞기는 한 것 같은데….”
세비스가 얼굴을 붉히며 벽 거울로 제 모습을 응시했다. 어두운 감색 드레스 셔츠와 적당히 딱 맞는 검은 바지를 걸친 세비스는 부티가 좔좔 흘렀다. 부티크 안에서 쇼핑 중이던 다른 손님들이 그를 힐끗댔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감탄한 표정이었다.
한 남자 손님은 옷을 입다 말고 ‘나 그냥 옷 안 살래. 입어봤자 뭐해!’라고 울면서 뛰쳐나가 버렸다. 그를 따라 몇 명의 손님이 축 처진 어깨로 힘없이 가게 밖으로 나갔다. 이러다가 가게 안의 손님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상황이었다.
민폐를 끼칠까 봐 걱정스러운 것도 잠시, 세비스의 외모 때문에 부티크가 손해만 봤나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긍정적인 다른 손님들은 ‘저분이 입은 옷 그대로 싸주세요.’라고 말하며 바삐 옷을 사 갔다.
딸랑,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신나게 울렸다. 뛰쳐나간 손님 때문에 소문이 난 건지 손님들이 떼로 부티크에 몰려들었고, 세비스가 입은 옷이 순식간에 완판됐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게 3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순간에 한적해졌다가 다시 시장통처럼 북적북적해지고 정신 차리고 보니 창고에 있는 옷을 다 팔아버린 부티크 주인이 넋이 나간 얼굴로 카운터에 서 있었다. 그의 머리는 손님들에게 쥐어 뜯기기라도 한 건지 까치집이 다 됐다.
‘이게 무슨 일이람. 정신이 하나도 없네.’
세비스와 실비아가 뭐가 뭔지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부티크 주인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쳐들어온 손님들을 상대한 직원도 머리가 엉망이 된 채 그 뒤를 따랐다.
“어유! 손님이 저희 가게 옷을 입어주신 덕분에 옷이 다 팔렸어요. 한 달 매상을 한 번에 올려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이네요. 사장님도 저도 너무 놀랐답니다!”
직원과 사장이 호들갑을 떨며 세비스를 칭찬했다. 세비스는 민망해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장은 입은 옷은 물론이고, 다른 옷도 마음껏 골라보라며 싹 다 무료로 드리겠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자주 오시면 좋겠다는 아부 섞인 말도 함께였다.
“앞으로도요?”
“네. 그리고 혹시 주말에 여기서 일해 볼 생각 없으세요? 아! 직원을 하란 건 아니고요. 그냥 옷을 입고 서 계시기만 해도 됩니다. 다른 일은 할 필요 없고요. 그러면 옷도 무상으로 드리고 수고비도 넉넉히 챙겨드릴게요!”
“아, 그건….”
세비스가 망설이자 실비아가 그의 옆구리를 툭툭 찌르곤 대신 대답했다.
“어우, 물론이죠. 사장님의 장사에 도움이 된다니 저희도 기쁘….”
“아, 아니에요. 그건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주말에 할 일도 있고요.”
실비아의 어깨를 두드린 세비스가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사장은 아쉬운 눈빛을 하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 이것 참 아쉽네요. 그럼 시간 되시면 저희 옷가게에 놀러 오세요. 그때라도 옷만 입어주시면 공짜로 드릴 테니까요.”
“그건 좋습니다.”
세비스가 그제야 환하게 미소 지으며 수락했다.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사장은 행거를 가리키며 마음껏 고르라고 다시 말했고, 총 3벌의 옷을 더 골랐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둘이 가게를 나서자 사장과 직원 일동이 우렁찬 목소리로 그들을 배웅했다.
“다음에 또 와 주십쇼!”
함박웃음을 지은 채 손을 흔든 실비아는 옆에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비스를 끌고 가게에서 멀어졌다. 가게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온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세비스, 너 왜 그러니. 완전 이득인 것 같은데 왜 주말 알바를 거절했어? 보니까 온종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더구만.”
“네? 아아. 주말마다 여기로 와야 하는 게 좀 그래서요.”
“아이고! 저 가게 옷들은 비싸단 말이야. 한 벌 큰마음 먹고 사려고 했던 건데…. 주말에 시간만 조금 투자하면 앞으로도 저 비싼 옷들을 공짜로 입을 수 있잖아. 이제라도 하겠다고 해보는 건 어때?”
실비아의 설득에도 세비스는 여전히 뭔가 맘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는 머뭇머뭇하더니 말을 내뱉었다.
“그건 좋지만…. 실비아 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요. 남자 옷 말고 여자 옷을 그냥 준다면 했을 텐데…. 제 옷은 더 필요 없어요.”
“어?”
공짜라면 마냥 좋아할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런 어여쁜 생각을 할 줄이야. 실비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세비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그리고 주말마다 여기 오면 던전은 언제 가요. 그게 아니라도 실비아 님이 매주 함께 와주실 거 아니잖아요. 혼자서 여기로 오기 싫어요, 저는.”
“아이, 뭐야! 아직 아기네! 혼자서 오는 게 싫다니.”
실비아는 손바닥으로 넓은 등을 팍팍 두드리며 키득거렸다. 혼자서 오는 게 싫다니, 몸은 어른인데 아직 아기처럼 보살핌이 필요한 거구나. 세비스는 제가 주말마다 여기로 오면 실비아와 함께 놀 시간이 줄어들어서 뱉은 말이었으나, 실비아는 제대로 오해해버렸다.
실비아가 소리 내어 웃다가 이제는 배를 잡고 깔깔대기 시작하자 세비스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네? 무슨!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 이제 어른이에요! 원래도 어른이었고요!”
“그래, 알았엉. 던전에 함께 가는 게 더 중요하지. 어유, 혼자서 오기가 그렇게 싫었쪄여? 우쭈쭈.”
“아니라니까요….”
실비아가 연거푸 등을 두드리자 세비스가 몸서리치면서 그녀에게서 멀찍이 물러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에게 애 취급받는 게 싫었다. 그리고 정확히는 혼자 오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실비아 없이 혼자 오는 게 싫은 거였다. 하지만 제 말을 완전히 잘못 해석하고 있는 그녀의 면전에 대고 실비아 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이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비스는 아직도 웃고 있는 실비아를 살짝 째려보곤 그녀가 바닥에 내려놓은 쇼핑백을 제가 든 쇼핑백과 함께 들었다.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멈춘 실비아는 세비스가 제 몫의 쇼핑백까지 한꺼번에 들고 앞으로 척척 걸어가는 걸 보며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뭐야! 너 혼자 들기엔 너무 많아. 이리 내.”
“아뇨. 저는 다 들 수 있는데요. 저 힘 세거든요. 딱 보면 모르세요?”
“앗!”
실비아가 쇼핑백을 뺏어 들려고 하자 세비스가 단호하게 손길을 뿌리쳤다. 한 손에 5개씩 거의 10개의 쇼핑백을 세비스가 혼자 다 들고 갔다. 늑대 수인 힘 센 거야 너도나도 다 알지만, 제 양손은 텅 비어있는데 세비스 혼자만 한가득 쇼핑백을 드니 부려먹는 것처럼 느껴져 미안했다.
그의 곁에서 함께 걷던 실비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삐졌어? 왠지 삐진 것 같은데.”
“안 삐졌어요. 삐졌다뇨! 그렇게 아기처럼 표현하지 마세요.”
홱 하고 고개를 돌린 세비스가 붉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무표정으로 내려다보자 전이랑 다르게 위압감이 느껴졌다. 확실히 체격이 커지니까 분위기가 다르네. 비겁한 소시민인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으응, 그래.”
“…저 화낸 거 아니에요. 알았어요. 그냥 삐진 걸로 쳐요.”
“으응.”
그를 곁눈질로 힐끔거린 실비아가 소심하게 대답했다. 한번 쪼그라든 간땡이는 쉽게 본래 크기를 찾지 못했다. 세비스는 여러모로 당황스러웠다. 조금 뚱한 표정을 지었을 뿐인데 저렇게 겁먹은 반응이라니. 성체가 되며 제 얼굴이 예전에 비해서 많이 날카로워지긴 했다. 그러나 어른으로 생각해 주길 바란 것이지, 저렇게 겁먹길 바란 게 아니었다. 저럴 바에야 그냥 원래대로 애 취급을 받는 게 나았다.
입을 달싹거린 세비스는 표정을 부드럽게 풀곤 실비아를 내려다봤다.
“아이, 실비아 님. 그냥 원래대로 대해주세요. 좀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투정 부린 거예요.”
“응? 뭐가? 난 아무렇지 않은데?”
센 척하고 싶었던 실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부풀렸다. 그 모습에 풉-하고 웃음이 터진 세비스가 고개를 돌리곤 숨죽여 웃었다. 그는 얼굴에 웃음기가 남은 채 주위를 살폈다.
“그래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아까 타코야키 먹은 걸로는 실비아 님 성에 차지 않을 테니까요. 저기 식당으로 가요.”
“좋아!”
식당에 도착한 세비스와 실비아는 자리에 앉아서 바로 주문을 했다. 실비아가 쇼핑백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을 때 세비스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너무 자주 생각해서 이젠 별로 효과도 없지만, 제 마음을 티 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했다.
‘어차피 지키지 못할 다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발, 욕심부리지 말자.’
오늘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았던가. 실비아는 저를 눈곱만큼도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괜히 어색하게 굴다가 실비아랑 사이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늑대 왕국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다는 목표도 실패할 테니까. 여러모로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쓰잘데기 없는 감정이었다. 검은 속눈썹이 풍성하게 드리운 붉은 눈이 물기를 머금은 채 맞은편으로 향했다.
실비아는 세비스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쇼핑백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옆에 계속 있으면 언젠가 한 번쯤은 저를 봐주지 않을까? 옥장판 사장과 신관님보다 자신이 제일 먼저 그녀와 함께 있었는데….
세비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데, 실비아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세비스, 황궁에 수인들이 많다고 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