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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20화 (320/372)

320화

“세비스! 너 뭐야. 왜 해명을 안 하는 건데? 거기다가 진짜 연인 사이인 것처럼 연기까지 하다니. 뭐 얻을 게 있었어?”

“아뇨. 얻을 건 없었어요. 그냥요. 재밌잖아요.”

뒤로 돌아본 세비스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비아는 황당해서 헛웃음을 쳤다. 거리 가운데로 온 세비스는 벤치에 앉은 뒤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실비아가 벤치에 앉자 세비스가 그녀가 들고 있는 타코야키를 이쑤시개로 하나 집어 먹었다.

“타코야키 먼저 다 먹고 옷가게로 들어가죠? 이거 들고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으니까요.”

“그래. 하여튼 너 웃긴다. 저번에 그러다가 신혼부부로 헛소문 난 거 잊었어? 또 그럴까 봐 겁난단 말이야.”

실비아의 걱정에도 세비스는 묵묵부답으로 타코야키만 집어 먹었다. 그는 방금 충동적으로 상인의 오해를 정정해주지 않았다. 다른 이가 저와 실비아를 연인으로 오해하는 게 기분 좋기도 하고, 그녀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해서였다.

타코야키를 만드는 동안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던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놓을 때는 제 귓가에 심장 소리가 쿵쿵 울릴 정도였다. 그렇게 하늘로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는데, 실비아의 반응을 보니 뒤늦게 후회가 찾아왔다.

‘전혀, 한 치도 설레는 표정이 아니시구나. 이렇게까지 나한테 관심이 없다니, 슬프다. 심지어 소문이 날까 봐 겁난다고…. 난 소문 나도 상관없는데, 아니, 오히려 좋지.’

“참나…. 타코야키나 먹자. 앞으론 조심해!”

“저는 이제 괜찮아요. 황궁에서 매일 맛본다고 질리도록 먹은걸요. 실비아 님이 남은 것 다 드세요.”

“그래? 헤헤, 알겠어.”

타코야키 안 먹어도 된다는 세비스의 말에 실비아는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세비스는 벤치 맞은편 옷가게 쇼윈도에 비치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실비아는 씩씩대던 게 언제였냐는 듯 타코야키 그릇에 얼굴을 박고 열심히 먹는 중이었다. 세비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쇼윈도에 비치는 제 모습은 이제 완전 어른이고 상인의 말마따나 꽤 괜찮게 생긴 것 같은데, 실비아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속상했다.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어봤자 뭐해. 막상 실비아 님은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는걸. 아무 관심 없어 보이는 사람한테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겠어.’

울적해 하던 세비스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드디어 미친 것 같았다. 아까 이런 감정은 사치라고 생각했던 건 완전히 까먹고 틈이 생기자마자 헛된 생각을 하다니. 제어가 안 되는 건 다리 사이만이 아니었던 거다. 입도 문제고 머리도 문제고, 다 문제였다.

‘하…. 정말 미치겠다.’

세비스는 벤치를 손으로 지지한 채 고개를 꺾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량한 가을 하늘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자신이 가을을 타는 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황궁에서 알고 지내던 사용인들이 가을이라서 기분이 싱숭생숭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싱숭생숭한 걸 넘어서 아주 미쳐버릴 것 같긴 하지만.

세비스가 하늘을 보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자 실비아가 빠르게 타코야키를 입에 쑤셔 넣었다.

“아, 알았어. 빨리 먹을게. 눈치 주기는.”

“예? 하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천천히 드세요.”

“캑캑!”

급하게 타코야키를 삼키던 실비아가 사레들린 듯 기침을 해댔다. 깜짝 놀란 세비스가 황급히 주변 상점에서 음료수를 사 왔다. 뚜껑을 따서 실비아의 입에 가져다 대자 그녀가 다급하게 음료수를 마셨다. 등을 세게 몇 번 두드려주고 나서야 실비아의 기침이 멎었다.

“천천히 드시라니깐 왜 또 급하게 드셔서는….”

“아, 아니야. 이제 옷 구경하러 갈까?”

실비아가 일어서자 세비스도 따라 일어섰다. 그녀가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세비스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실비아가 알면 어이없어하겠지만 그녀가 캑캑대는 게 귀여워 보여서였다. 가져온 음료수를 입을 벌려 마시는 것도 마치 아기 새가 먹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너무 귀엽고…. 완전 실비아한테 콩깍지가 제대로 씐 것 같았다.

세비스는 주먹을 꽉 쥐며 손톱으로 제 손바닥을 찔렀다. 주제도 모르는 정신 나간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였다.

아이쇼핑을 하며 맘에 든 옷가게를 골라뒀던 실비아는 망설임 없이 세비스를 끌고 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여러 옷가게를 돌아다니며 겨울 외투 각자 2벌씩과 세비스가 입을 옷 10벌을 샀다. 실비아는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고급 부티크로 들어가 세비스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랐다.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녀요? 10벌이면 충분한 것 같은데….”

“아니야. 너 전에 입던 옷들은 하나도 안 맞잖아. 잠옷, 실내복, 외출복 정도면 10벌로도 모자라. 이번에 나왔을 때 많이 사둬야지. 와, 이거 너무 어울린다!”

실비아가 감색의 실크 드레스 셔츠를 세비스의 몸에 댔다. 검은 머리에 붉은색 눈인지라 차분한 색의 옷이 그와 잘 어울렸다. 세비스는 드레스 셔츠의 가격표를 읽고는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와, 이거…. 과소비 같은데요.”

“쉿!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냐. 오늘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주는 대로 받아. 갈아입어 볼래?”

실비아의 강경한 태도에 세비스는 어쩔 수 없이 옷을 받아들었다. 갈아입는 김에 실비아는 그의 달라진 다리 길이에 맞는 검은 바지도 함께 건넸다. 세비스가 부티크 구석에 있는 피팅룸으로 들어간 사이, 옆에 서 있던 직원이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분 외모가 빛이 나네요.”

“네? 아뇨! 남자친구 아니에요.”

실비아가 황급히 부인하자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니세요? 저렇게 잘생긴 수인족은 처음 봐요. 아니, 인간까지 통틀어도 저런 얼굴은 생전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제가 만든 옷을 저런 미남이 입어준다면 소원이 없겠어요.”

그 정돈가? 실비아의 뇌리에 순간 노엘과 루카와 블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 빙의한 후로 잘생긴 남자를 차고 넘치도록 본 데다가 실컷… 해서 그런지, 아니면 세비스를 매일 같이 봐서 그런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세비스가 잘 생기긴 했지만, 이곳엔 잘생긴 사람이 많잖아.’

사실 따지고 보면 이곳에 잘생긴 사람이 많은 게 아니라, 실비아 주위에 잘생긴 사람이 많은 거였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 미남이 과다 공급된 탓에 실비아의 미남 역치는 한참 위로 올라갔다. 눈이 천장에 달린 실비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런가요? 음, 좀 잘 생기긴 했죠.”

“좀이 아니죠! 엄청 잘 생겼어요. 잘나가는 연극배우들 중에도 저런 얼굴은 드문데…. 저 남자분은 엄청 인기가 많겠어요. 여자친구도 있죠?”

“어? 아뇨. 혼자일 거예요, 아마.”

여자친구가 없다는 소리에 직원이 손뼉을 짝 치며 잘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제 친구 조카가 이번에 성체가 된 수인이거든요. 되게 예쁘고 일도 성실하게 잘하는데, 혹시 소개받으실 생각 없나 물어봐 주실래요?”

“엇…. 쟤는 늑대 수인인데, 그 수인분도 늑대인가요?”

수도에서 몇 번 수인을 마주치긴 했지만, 늑대 수인은 거의 보지 못했다. 세비스가 어느 날 지나가듯이 한 말로 제국에서는 늑대 수인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고 했었는데…. 같은 수인족끼리 만나야 하지 않을까? 직원은 고개를 젓더니 말을 이어갔다.

“아, 그건 아녀요. 토끼 수인이에요. 하지만, 다른 종족끼리도 곧잘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더라고요. 요즘 약이 잘 나와서요. 그, 마법약만 미리 먹으면, 아이가 혼혈이 아니라 아빠나 엄마 둘 중 하나의 종족으로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어머, 그렇구나.”

“네. 그래서 인간이랑 수인족들도 곧잘 결혼하곤 하죠. 요즘 세상이 워낙 좋아졌잖아요. 옛날이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죠.”

진짜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당연히 늑대족끼리 결혼해야 하는 건 줄 알았더니, 혼혈이 안 나오게 하는 마법약이 있을 줄이야. 그런 건 과학이 발달된 현실 세계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세계관인데?’

토끼 귀가 달린 수인과 세비스의 조합을 떠올린 실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토끼 수인이라니까 세비스보다 덩치가 엄청 작을 테고 생김새도 귀엽겠지. 무척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왠지 세비스한테 토끼 수인을 소개받겠냐고 물어본다면 좋은 반응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연애를 하는 세비스라니, 상상이 안 되는걸. 음, 그래도 이제 성체도 됐겠다,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을 수도 있겠어.’

실비아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꿈속에서 정체 모를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지 않았던가. 저는 게임 공략 때문이라곤 하지만 남자를 실컷 만나고 있으니, 세비스도 일을 하면서 여자친구를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사실 세비스는 실비아의 체취를 알아채고 그녀를 껴안은 거였지만, 실비아는 꿈에도 그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당시 그녀는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었던 데다가, 세비스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니.

실비아가 이렇게 눈새가 된 것에는 게임 공략 방법의 탓이 컸다. 하나같이 공략을 하기 어려운 남주들만 겪어온지라, 꼬시려고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은 세비스가 저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비스는 비록 나이는 성년이었으나 어린 모습으로 실비아의 곁에서 두 달을 보냈다. 그 바람에 그녀는 세비스를 남자로 생각하지 못하게 됐다.

상식이 있는 여성이라면 어릴 때부터 성장 과정을 다 지켜본 남자를 쉽게 연애 대상으로 보지 못할 터였다. 마지막으로 <동정 레이더>가 판독 불가 메시지를 보여주는 바람에, 완전히 세비스는 공략 대상에서 제외됐다.

‘귀여운 커플이 될 것 같긴 하네. 음….’

생각에 빠져있던 실비아는 직원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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