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세비스는 얼마 전에 만났던 노엘을 떠올렸다. 노엘은 은근히 제가 집에 가길 바라는 게 눈에 보였지만, 세비스는 눈치 없는 척 꿋꿋이 버텼었다. 자신이 노엘이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아무 사이도 아닌 걸 알지만 같이 사는 남자가 무척 신경 쓰였겠지. 그와 마찬가지로 세비스도 노엘이 신경 쓰였기에, 함께 사는 일만은 절대 막고 싶었다.
‘실비아 님이 어떤 남자를 만나든 내가 상관할 자격은 없지. 하지만 최소한 같이 사는 건 나 혼자였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이 이 아침 풍경에 끼어드는 건 싫어.’
어느새 식사를 끝낸 세비스가 수저를 놓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식사를 끝내고 두 손을 고이 모은 실비아는 설레는 표정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초록색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럼 우리, 이사를 가게 되는 건가? 아니면 여기서 계속 살 거야?”
“아직은 모르겠어요. 사실 정확히 혜택을 물어보진 않았거든요. 출근할 당시만 해도 이곳에서 계속 전세로 살게 될 거로 생각했으니까요. 실비아 님이 황궁으로 들어오실 줄도 몰랐고…. 월요일에 같이 출근하게 되면 복지과에 함께 물어보러 가요.”
“좋아. 너무 기대된다! 여기서 계속 살아도 좋을 것 같아. 이 집도 나름 마음에 드니까. 림보가 와도 충분하거든. 근데 뭐, 생각보다 혜택이 더 좋다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마구간이 따로 있는 저택으로 옮겨도 좋고!”
실비아는 신이 난 나머지 식탁에서 일어나 거실에서 몸을 흔들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꿈꾸는 표정이 되었다.
만약 황실에서 내 집 마련 대출을 저이자로 크게 해준다면, 마구간이 있는 조그만 정원이 있는 벽돌집에서 사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나중에 출소한 림보를 새로운 집으로 데려가면 그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겠지. 그러곤 제가 없는 새에 집안을 일으킨 세비스와 실비아를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너무나도 즐거운 상상이었다.
‘아, 세상에. 눈을 찔러버려야 하나.’
한편 세비스는 식탁 의자에 앉은 채 멍하니 실비아가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방으로 들어간 후 아래를 가라앉히느라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제발 순진한(?) 실비아를 상대로 이상한 생각 좀 그만하자고 수차례 다짐한 그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즐겁게 식사를 만들었다. 분명히 그랬다.
실비아가 맞은 편에 앉아서 식사할 때만 해도 그의 머릿속은 고요했다. 그 바람에 잠시 방심하고 있었는데, 성체가 된 그의 눈은 몸 주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 실비아의 몸을 훔쳐봤다.
실비아는 가끔 입는 하얀 파자마를 입고 있었는데, 아직 시원한 가을 날씨인지라 실내에서 자주 입는 여름 잠옷이었다. 그 옷은 반팔에다가 무릎까지 오는 평범한 원피스였는데, 얇은 소재인지라 통풍이 잘됐다.
안이 잘 비치는 여름 원피스형 파자마로 밝은 햇살이 내리쬐자 실비아의 실루엣이 언뜻언뜻 보였다. 심지어 휘리릭 한 바퀴씩 돌면서 신나서 몸을 흔드니 아슬아슬하게 치마가 함께 회전하면서 매끈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딱 붙는 원피스도 아니고 오히려 통이 컸는데, 안이 비치는 바람에 더없이 야해 보였다. 세비스의 시선에선 그랬다.
‘무슨 놈의 옷이 저렇게 야하지. 몸 선이 다 보이잖아. 저게 어떻게 잠옷이야.’
실비아는 이제 몸을 털더니 햇빛이 잘 들어오는 거실에 서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세비스가 처음 듣는 정체 모를 콧노래와 함께였다.
“딴따라 딴따라 딴딴다다, 딴다다 딴따다 딴딴딴딴…! 온몸운동!”
사이사이 이상한 구령을 외치던 실비아는 무릎을 짚고 몸 굽히기를 반복하더니, 이제는 노를 젓는 행동을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매끈한 흰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격하던 스트레칭 구간이 끝나고 이제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건지, 실비아가 창문을 바라보며 손을 바닥에 짚을 때마다 환상적인 뒤태가 고스란히 비쳤다. 그녀는 이제 뜀뛰기까지 하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뛸 때마다 잠옷이 함께 펄럭거리며 아슬아슬하게 허벅지가 노출됐다.
세비스의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건전한 스트레칭인데도 불구하고, 실비아를 여자로 생각하는 그의 입장에선 너무 자극적이었다.
‘하, 정말 고마운 스트레칭…이 아니라. 제발 그만 생각하자. 후우.’
넋을 놓고 있던 세비스는 자신이 한 생각에 스스로 놀라 포크로 제 손등을 찍었다.
“윽!”
작게 비명을 지른 세비스는 급히 실비아를 돌아봤다. 다행히 그녀는 아직 스트레칭 삼매경이라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듯했다.
실비아는 한 지붕 아래에 다 큰 남자가 산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래로 또 피가 몰리기 시작하자 세비스는 황급히 제 양 뺨을 짝-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손등에 고통을 줬는데도 아래가 점점 뜨거워지다니, 죽을 맛이었다.
“하, 정말….”
그는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통제하기 힘든 미친 눈깔을 꾹 눌렀다. 눈으로 그녀를 욕보이는 변태가 된 기분에 착잡했다. 성체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 주인이 가끔 입는 저 파자마가 야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머릿속에 이상한 짐승이 한 마리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 결국.’
세비스는 자신의 신체가 또 주인의 통제를 벗어났단 걸 깨달았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반응해서야 어쩐단 말인가. 이러다가 실비아에게 들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텐데.
“휴우, 시원하다.”
실비아는 스트레칭을 끝마친 뒤 개운한 표정으로 뒤돌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세비스가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세비스, 왜 그래. 또 어디가 아파?”
“네…. 아, 잠깐. 실비아 님 걱정 마세요. 좀 있으면 괜찮아질…. 후.”
세비스는 어깨에 닿아있는 손을 떼어내더니 고개를 제 팔에 파묻었다. 다 나은 줄 알았더니 아직 후유증이 남아있는 거였나? 아니면 성체가 된 것이랑은 상관없이 몸살일지도 모른다. 혹시나 다른 병일 수도 있고.
실비아는 어제 먹었던 별미를 떠올렸다. 심해 장어구이. 자신은 탈이 안 났지만, 인간과 다른 신체 특징을 가지고 있는 늑대 수인은 다를지도 몰랐다. 강아지가 인간 음식을 똑같이 먹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제 먹은 것 때문에 그래? 아니면 몸살이 아직 남아있어? 병원이라도 갈까? 우선 일어나 봐.”
고개를 계속 젓기만 하던 세비스는 일어나란 소리에 엎드린 채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일어나는 순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로 들켜버릴 텐데 절대 안 된다. 거기다가 병원이라니? 아무리 갑자기 성체가 되어 제 몸이 낯선 그라도, 이런 일은 병원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괜찮아요. 제 몸 상태는 제가 제일 잘 아니까요…. 하아, 가만히 있으면 돼요.”
“허어, 심각해 보이는데….”
열이 있나 이마에 손을 대보려고 했지만, 세비스는 극구 그녀의 손길을 거부했다. 실비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내버려 두곤 식기부터 치웠다. 설거지를 하려고 고무장갑을 끼자 세비스가 식탁에 엎드려 누운 채 외쳤다.
“실비아 님. 그건 제가 할게요. 황실에 보낼 편지를 쓰고 계세요. 어제 실비아 님이 이것저것 많이 하셨으니까, 후우. 오늘은 제가 해야겠어요.”
“어우, 아니야.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할게!”
실비아가 손사래 치자 세비스가 고개를 들더니 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하지만 실비아는 꿋꿋이 설거지를 했다. 한숨을 쉰 세비스는 그녀가 뒤를 돈 사이에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쾅, 하고 문이 황급히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래서야 오늘 같이 돌아다닐 수 있으려나.’
함께 제국민 센터에 갔다가 몸집이 커진 세비스의 옷을 구경하러 가려고 했는데. 세비스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혼자서 돌아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설거지를 끝낸 실비아는 제 방에서 황실에 보낼 편지를 쓰고 나왔다. 어느새 멀쩡해진 세비스가 옷을 갈아입은 채 소파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실비아 님! 편지 다 쓰셨어요?”
“응! 몸이 다시 괜찮아졌나 보네.”
실비아가 활짝 미소 짓자 세비스가 시선을 옆으로 피하더니 어색하게 답했다.
“네…. 제 몸이 좀 왔다 갔다 해요. 몸이 갑자기 자라는 것부터가 보통 인간이랑은 다르잖아요. 그러니 실비아 님도 갑자기 제가 이상해 보여도 놀라지 마세요.”
“그래. 꼭 기억하고 있을게. 그건 그렇고, 음…. 밖에 같이 나갈 수 있겠어? 편지도 부치고 여기저기 좀 돌아다닐까 하는데.”
“당연하죠. 그러려고 이미 옷도 갈아입은걸요.”
“어? 그럼 나도 옷 갈아입고 올게.”
실비아는 방긋 웃고는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세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한번 속으로 다짐했다. 절대 실비아를 보면서 엄한 상상하지 말자고. 물론 일부러 상상하겠다고 작정해서 아래가 반응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했다. 다짐한다고 해서 이미 맛이 가기 시작한 뇌가 들어먹을진 모르겠지만.
실비아가 옷을 갈아입은 뒤 그들은 집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평소 즐겨 입던 원피스 대신에 갈색 멜빵바지에 긴 티셔츠를 입었다. 그녀가 입은 옷에 세비스는 속으로 안도했다. 여러모로 건전한 옷이었기에 바깥에서 곤란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옷은 죄가 없었지만, 그의 통제 안 되는 눈깔에 많은 죄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눈을 감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한폭탄 같은 몸 상태에도 실비아와의 간만의 외출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세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르는 실비아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더니, 우선 편지를 보내러 전서구 센터로 가자고 말했다. 참둘기가 편지 두 개를 배달하러 멀리 가는 바람에 낯선 전서구의 손을 빌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