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수리업자를 내일 부르긴 할 테지만, 오늘 당장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게 꼴 보기 싫었다. 미세먼지도 보이지 않지만, 계속 들어오는 건지 창틀이 노래졌고 사이사이에 이상한 낙엽 찌꺼기도 바람에 섞여 같이 들어오니 곤란했다.
‘신문지로 막아야겠군.’
가위와 테이프를 가져온 실비아는 신문지로 창문의 구멍을 메웠다. 말끔하게 구멍을 막은 그녀는 적막한 거실을 돌아보았다. 세비스는 들어간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인지 나올 기미가 없어 보였다.
‘노엘 님 저택 얘기는 내일 해야겠네….’
* * *
다음 날 아침, 실비아는 코끝을 건드리는 고소한 냄새에 잠에서 깨어났다. 거실로 나와보니 세비스가 완전히 몸을 회복한 건지 식사를 준비해놓은 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가기 전과 다를 것 없는 일상에 실비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실비아 님, 일어나셨어요? 아침 드세요.”
“이제 몸이 완전히 괜찮아졌나 봐. 어젠 많이 아파 보이더니?”
실비아가 식탁에 앉자 세비스도 앞치마를 벗고는 맞은 편에 착석했다.
“네. 어젠 좀…. 이제 완전히 괜찮아진 것 같아요. 오늘까지 쉬고 다음 주에는 황궁으로 출근해야죠. 이제 실비아 님과 함께 출근하는 거네요.”
황궁 출근이라. 실비아는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거북이 수인이 그녀의 이틀을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생각보다 늦게 황궁으로 출근하게 된 것이다. 원래 이번 주에는 출근하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황궁에서 그걸 염두에 두고 있으려나? 그녀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근데 난 원래 이번 주에 출근하기로 말하긴 했었거든. 다행히 좋은 변명거리를 꺼낸 덕에 정확한 날짜는 언급 안 하고 넘어가긴 했다만…. 황궁에서 대충 넘어간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겠지. 월요일부터 출근할 수 있다고 전하긴 해야겠어. 오늘 직접 황궁으로 가서 말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편지로 전하는 게 나을지 고민되네.”
“황태자 저하의 반려마를 돌보는 일을 하신다고 했죠? 사실 직접 가서 말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한데…. 가서 바로 일하라고 하면 일해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그렇게 되면 휴일이 없어지는 셈이니 다음 주부터 간다고 편지로 전하시는 게 좋겠어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괜히 황궁에 직접 가서 얘기했다가 오늘부터 출근하라고 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녀는 까라면 까야 하는 일개 제국민 나부랭이이니 찍소리도 못하고 출근해야 할 터였다.
“그게 나을까?”
“그럼요. 황태자 저하는 이런 사소한 일로 목숨을 거둬가는 몰인정한 분은 아니시니 괜찮을 거예요.”
‘목숨이라니. 애초부터 목숨을 잃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살벌하다, 살벌해.’
실비아는 무서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반면 세비스는 목숨 얘기를 하면서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평소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감각에 다른 세계에 빙의한 것을 잊곤 하지만, 이럴 때 보면 판타지 배경인 게임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고나 할까.
‘노엘 님 저택 얘기를 슬슬 꺼내 볼까….’
어제와 달리 세비스는 너무나도 건강해 보였다. 이제 성체가 되는 과정에서 생긴 후유증이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었다. 세비스의 평이해 보이는 표정을 살피던 실비아는 머뭇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이 집에서 사는 건 어때? 혹시 좁거나 하진 않아?”
“네? 그럴 리가요. 여기보다 더 좁은 오두막집도 무너지지만 않았다면 계속 살았을 거예요. 광장에서 노숙 안 하는 게 어딘가요. 늘 감사하고 있죠. 제국한테…. 물론 약간의 꼼수를 부렸기에 불안하긴 하지만요.”
세비스의 눈이 저도 모르게 옆으로 굴렀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세비스도 그녀처럼 제국민 복지혜택을 부정수급하고 있단 게 맘에 걸리는 기색이었다. 얼굴이 밝아진 실비아는 밑밥을 슬슬 깔기 시작했다.
“그럼 다른 집에서 살 기회가 생긴다면 이사 갈 마음이 있는 거네? 여기서 사는 건 아늑하고 좋긴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세무조사가 들어올까 봐 가끔 밤잠을 설치곤 해.”
“그건 그래요. 음, 그런 기회란 게 쉽게 생기진 않겠지만 말이죠.”
“그렇지?”
실비아의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쩐지 노엘 님의 집에서 살 수 있게 됐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세비스는 던전에 가기 전 노엘과 루카의 신경전을 코앞에서 지켜봤으니, 아무래도 노엘의 집에서 살 수 있게 됐다고 하면 수상하게 여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어떤 대화들을 했더라? 너무 정신이 없었던지라 기억이 잘 안 나.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기 힘든 상황이긴 했지.’
눈 깜짝할 새에 여러 명한테 둘러싸였고, 정신 차리고 보니 루카와 블루가 싸움 중이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세비스가 분명히 수상한 대화를 들었을 터였다. 그것도 그렇고, 애초부터 그날 백화점에서 노엘과 같이 있다가 세비스와 마주쳤을 때도 제대로 변명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던 것 같았다.
‘아냐. 내가 뭐 죄지었어? 연애하는 건 문제가 아냐. 연애 대상이 한둘이 아닌 건 문제지만…. 그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게임 공략을 위해서일 뿐이니 죄는 아니지. 사실 세비스가 원하는 대로 난 강해지고 있을 뿐이라고.’
눈을 부릅뜬 실비아는 우선 노엘의 이야기부터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도 잠시, 긴장되는 탓에 물로 목을 축이고 나자 다시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저, 세비스, 노엘 님이랑 만났을 때는 어땠어? 그분 참 자상…하시지?”
“네? 아, 네. 저번에 만났을 때 괜찮았어요. …그분은 왜요?”
세비스는 샐러드를 입에 넣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는 수저를 내린 뒤 차분히 실비아를 응시했다. 그러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평이해 보이는 붉은 눈에 안심한 실비아는 목을 가다듬은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괜찮았다니 다행이야. 노엘 님 말로는 세비스 너한테 좀 실례를 한 것 같다고 하던데, 그분이 과하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어. 다른 게 아니라, 저번에 만났을 때 집 얘기를 했었거든.”
“네. 그래서요?”
“응.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고 있다고 하니까 노엘 님이 본인 소유의 저택 중 한 곳으로 이사 오는 건 어떠냐고 말씀해 주시더라고.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긴 하더라. 지금 우리는 엄연히 불법으로 여기서 사는 셈이니까….”
실비아는 말끝을 흐린 뒤 세비스의 표정을 살폈다. 귀엽던 볼살이 다 빠진 날카로운 이목구비의 세비스는 무표정을 하니 살짝 싸늘해 보였다. 볼살은 안 빠졌으면 좋았을 텐데. 오동통한 얼굴이 세비스의 차밍 포인트였는데 말이지….
잠시 잡생각을 하던 실비아는 귓가에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들리자 눈을 크게 떴다.
“…글쎄요. 굳이 노엘 님에게 신세를 질 필요가 있을까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실비아 님이 황궁에 취직하고 나서 말하려던 거긴 한데, 황궁 사용인 자격으로 지금보다 더 좋은 혜택을 받을 수 있거든요. 집을 매매할 수 있을 거예요. 1인으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때문에 그동안 말하지 않았지만요.”
“뭐어?!”
놀란 실비아가 턱이 빠지도록 입을 크게 벌렸다. 세비스는 괘념치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다음 주부터는 저랑 실비아 님, 둘 다 황궁에 취직하는 게 되니, 황궁 사용인이 한 집에 두 명. 그러면 우선순위가 돼서 내 집 마련을 저렴하게 할 수 있어요.”
내 집 마련이라니. 한참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실비아는 파리가 들어올 것 같아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현생에서는 언감생심 내 집 마련은 꿈도 꾸지 않았다. 사실 대충 되는대로 살았기에 미래가 어떨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생각도 하지 않던 게임 세계에서 내 집 마련을 할 줄이야. 그것도 두 달 만에! 실비아의 심장이 흥분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와! 그런 혜택이 있었다니. 진작 말하지!”
“미리 말할 필요가 없었죠. 어차피 황궁에서 사용인 등록을 하면서 알게 될 사실이었으니까요. 노엘 님이 배려해주시는 건 참 고마운 일이지만, 어차피 평생 거기서 살 순 없는 일이잖아요. 우리 집을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번엔 꼼수가 아닌 떳떳하게 저이자 혜택을 받아서 집을 사는 거죠.”
“그러게. 아무래도 내 돈으로 산 내 집에서 사는 게 마음 편하긴 하지! 부정수급 때문에 노엘 님의 저택으로 이사 가고 싶었던 건데, 굳이 신세 지지 않아도 되겠어!‘
실비아의 대답에 세비스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실비아는 마주 보고 미소 지으며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노엘 님이 날 감시할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사용인들이 있는 저택에선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있으니 여러모로 내 소식이 노엘 님에게 전해질 확률이 높지. 난 남주들을 공략해야만 하는 몸. 그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숨기는 게 나을 거야.’
여러모로 실비아의 마음은 완전히 자가 구입으로 돌아섰다. 선물 받았던 열쇠는 노엘을 만날 때 쓰면 되지 않을까. 야외플도 하루 이틀이지, 은밀한 장소가 필요한 법이니까.
사실 게임이 끝났을 때 영영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전세 아파트에서 그대로 계속 지내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게임에서 평생 산다고 가정하고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사고 과정이었다.
그녀가 마음을 완전히 돌린 것 같자 세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원래는 실비아가 황실에 일꾼등록을 하러 갔다가 혜택 얘기를 듣고 놀라서 뛰어오면 사실 알고 있었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생각도 못 한 노엘의 저택 얘기가 나오니 바로 얘기를 꺼낼 수밖에.
‘노엘 님,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어요. 거기로 가면 두 분이 더 가까워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