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거북이 수인이 준 복주머니 덕에 당장의 걱정이 해결된 것 같았다. 안심이 되면서도 씁쓸한 마음에 실비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편지의 내용을 보니 세비스한테 뭔가 섭섭하게 군 모양이었다. 뭘 어떻게 했다는 건지, 자상한 노엘만 기억하는 실비아로선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한 달 후라. 한 달 동안은 루카와 노엘이 만나는 일을 뒤로 미룰 수 있게 됐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그 일을 두 남주가 잊게 된다거나 하면 더 좋은 것이고. 그럴 리는 없지만 말이다.
‘노엘 님. 무사히 잘 돌아오시겠지.’
실비아는 걱정을 담아 답장을 써 내렸다. 잘 지내고 있으며 다음에 볼 때까지 무사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의 끝에는 자신도 물론 보고 싶다는 글귀까지 또박또박 적고 나자,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죄책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아! 죄 많은 인생이여.
‘역하렘 여주란 무엇인가.’
실비아는 소파 끄트머리에 앉은 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심하는 자세가 되었다. 잠시간의 철학적 고찰을 끝낸 그녀는 노엘에게 보낼 답장을 접은 뒤, 붉은색 편지지를 무거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옆에서 옥수수를 먹고 있던 참둘기가 단춧구멍 같은 눈으로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마치 ‘염병하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참둘기를 살짝 힘을 주어 쓰다듬은 실비아는 루카의 편지를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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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실비아.
며칠 전부터 수도 본가에 네 참둘기가 며칠째 머무르고 있어. 슬슬 집에 가려고 하는 것 같길래 급하게 잡아 편지를 써. 아마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넌 제국으로 돌아왔을 거라고 생각해.
네 전서구 참둘기가 우리 저택에서 무척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단 것 알고 있어? 네 전서구인 걸 알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걸 놔뒀더니 단시간에 많은 짓을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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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참둘기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지!’
깜짝 놀란 실비아는 참둘기를 한번 째려보곤 다시 편지를 읽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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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경영자는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데 잠시 잊은 내 잘못이야. 다른 전서구들 등에 무단으로 타고 다니고 비싼 음식만 죄다 골라 먹은 것 같더라. 저택 구석에 비치해 둔 황금색 전서구 옷들도 마음대로 입고 벗고 말이지…. 심지어 파란 앵무새도 한 마리 데려와서 주지육림을 벌였나 봐. 그 바람에 애써 다져놓은 전서구 위계질서가 개판이 됐어.
참둘기한테 잠시 자숙기간 좀 가지라고 전해줘. 우리 집 전서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뒷구멍으로 조심히 들어오라는 말도 함께 해주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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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는 새에 별의별 짓을 다 했구나.’
실비아의 못마땅한 시선에 참둘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한소리 하는 건 미뤄둔 채, 실비아는 루카의 편지를 계속 읽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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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참둘기 얘기는 이쯤으로 하고, 저번에 못다 한 얘기를 해볼까 해.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내가 좀 많이 민감했던 것 같아. 물론 여전히 여러모로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어떤 과거가 있었든 실비아 네가 마지막으로 날 선택해주기만 한다면, 난 아무 상관 없어. 언제든 기다릴 수 있어. 아버지도 널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때의 오해를 사과하실 거야.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겠네. 내가 잠시 사막 나라에 옥장판 사업을 하러 가게 됐어. 놀라는 네 얼굴이 벌써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아. 사막에서 옥장판을 판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원래 안 될 것 같은 곳에서 파는 게 진정한 사업가라고 볼 수 있지. 얼마 전에 아버지께서 사막 나라에서 추위에 떠는 왕족들의 얘기를 꺼내시면서 한번 계약을 성사시켜 보라고 하시더라.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아버지는 내가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해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꼭 해낼 거야. 최대한 빨리 사막 나라에서 사업을 성공하고 돌아올게. 아마 최소한 한 달 이상이 걸리지 싶어. 마음 같아선 너를 보고 가고 싶었지만, 그 나라의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빨리 계약을 따내야만 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
실비아, 다시 만나는 날까지 잘 지내길 바랄게. 그리고 언제든 사이사이에 편지해. 전서구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수정구를 사줄 걸 그랬나 후회가 되지만, 조만간 우리는 항상 붙어 다닐 테니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해.
그럼 정말 편지를 마칠게. 사랑하는 실비아, 우리 자기. 잘 지내고 있어.
-널 사랑하는 루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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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루카도 사막으로 떠난다니.’
거북이 수인의 복주머니는 효과가 엄청났다. 노엘은 그렇다 치고 불같은 성격의 루카 때문에 많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옥장판 사업을 하러 사막으로 떠난다니.
이로써 실비아의 당장의 걱정은 완전히 뒤로 미뤄졌다. 차분히 읽어보니 계약을 잘 따내면 아버지가 자신과의 결혼을 승낙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노파여도 상관없다는 소리겠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루카의 고집에 아버지가 한 수 접기로 한 듯했다.
‘사업 계약을 하나 따낸다고 해서 노파와의 결혼을 승낙한단 건 좀 그렇지만, 반대한다고 해서 들을 루카가 아니니 어느 정도 타협을 한 거겠지.’
루카의 아버지 카를 단장을 떠올리던 실비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편지로 시선을 돌린 그녀는 자신이 던전에 간 동안 참둘기가 행패를 부린 것에 기가 막혀 혀를 찼다. 실비아는 눈을 가늘게 떠 참둘기를 째려보았다. 참둘기는 영문도 모른 채 부리로 제 몸 여기저기를 단장하느라 바빴다.
‘반려동물은 주인을 닮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구나. 우아하고 고상한 내 밑에서 참둘기 같은 무뢰한이 나올 줄이야.’
한낱 짐승이 뭘 알고 그랬겠느냐 만은, 그래도 나무라긴 해야 할 터. 그래도 실비아네 전서구인 걸 고려해 무례를 눈감아 준 루카가 고마웠다. 실비아는 편지에 정말 미안하다며, 참둘기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겠다고 적었다. 참둘기 버릇 잘못 들지 않게 다음에 걔가 가면 너무 비싼 음식은 주지 말라는 말도 써넣은 뒤, 그녀는 깃털 펜에 잉크를 한 번 더 묻혔다. 사막에서 옥장판 사업이 대성하길 바란다는 따뜻한 격려와 함께, 자신의 마음도 루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애매한 말을 써넣었다.
‘휴우, 또다시 가슴이 아려오네.’
죄책감으로 인한 가슴 통증은 게임의 끝이 오는 날까지 계속될 것 같았다. 다시 볼 날까지 무탈하게 지내길 바란다는 말을 끝으로 편지를 마무리한 실비아는 물기 어린 눈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그러곤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하는 참둘기를 대뜸 앞으로 불렀다.
“참둘기! 이리 와. 날 등에 업고 나쁜 짓을 하고 다니다니! 시치미 떼지 마. 루카 님한테 다 들었어! 앞으론 조심하길 바라. 안 그러면…. 그래, 내가 처음에 입던 옷 알지? 그게 아직 옷장에 한 벌 남아있어. 그 옷을 잘라서 옷을 만들어 주는 수가 있어. 한 10벌 넘게 나올 테니 매일 그 거지 옷만 입어야 할 거야!”
실비아의 매서운 호통에 참둘기가 고개를 조아렸다. 며칠간 루카네 저택에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누더기 옷이라니. 참둘기 입장에선 무서운 일이었을 것이다. 혼내기도 잠시, 조그만 동물이 기가 죽어있는 모습은 너무 가여웠기에 실비아는 그의 몸을 잡고 자상하게 보듬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널 미워하는 건 아냐. 그냥 앞으론 조심하란 얘기지. 자, 사과나 먹어.”
손바닥에 웅크린 참둘기가 부리를 열어 사과를 받아먹었다. 그 얌전하고 귀여운 모습에 실비아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얄미운 짓을 해도 귀여우니 용서가 됐다. 밤이 늦었으니 편지를 바로 배달하라고 할 순 없었다. 실비아는 참둘기의 양발에 노엘과 루카에게 보낼 편지를 각각 묶은 뒤 그를 둥지에 조심히 넣었다.
“자, 오늘은 이만 자도록 해. 내일 편지를 배달하러 가면 돼. 좀 많이 먼 여정이 될 거야.”
몸집만 한 조그만 이불을 덮어주자 참둘기가 구멍 난 창문을 힐끗거리다가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는 마른 옥수수를 배급받던 시절을 깡그리 잊었다. 루카의 화려한 대저택만이 엄지손톱만 한 머리에 남았을 뿐. 노숙도 아니고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구멍 난 창문 밑에서 자는 게 싫었지만, 제가 한 짓이 있으니 아무 말도 못 하고 날개에 부리를 묻었다.
실비아는 참둘기가 눈을 감은 걸 확인한 뒤 블루에게 편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날개가 있으니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밤에는 다니기 힘들다고 했으니 어딘가에서 노숙을 하고 있으려나. 길바닥에서 잠을 자다니, 드래곤 왕자의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헤어진 게 오늘인데 당장 편지를 부칠 필요는 없겠지. 도착하고 나면 나중에 편지를 보내겠지.’
방금 전의 죄책감을 바로 잊어버린 실비아는 블루의 구릿빛 피부에서 흐르던 진득한 땀을 떠올렸다. 두툼한 가슴팍과 훌륭한 선을 자랑하는 복근, 그리고 그 아래 몸 중에 제일 훌륭한 그것을 떠올리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블루의 것이 안을 드나들었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나도 참. 제정신은 아니야. 오늘 실컷 해놓고는 뭐가 모자란다고 또 야한 생각을 하다니. 훠이훠이, 물러가라 야한 망상아.’
제 주위를 떠돌고 있을 무형의 음란마귀를 손을 휘저어 쫓아낸 실비아는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낀 그녀의 눈이 구멍 난 창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