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점입가경이라고, 그는 더욱 죽고 싶어졌다. 시각적 효과 덕에 다리 사이가 서서히 부풀어 오른 것이다. 식사 중에 발기해버리다니, 만약 이 사실을 실비아에게 들킨다면? 당장 저기 구멍 난 베란다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질 것 같았다.
제발 진정하자 진정…. 눈가를 꾹 누른 그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는 국수를 먹다 말고 그런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성체가 되면서 몸이 아직 적응이 안 된 걸까? 아까 잠에 취해서 헛소리하던 걸 보면 그럴지도. 갑자기 이렇게 몸집이 커지려면 몸살을 크게 앓았어야 했겠지.’
실비아의 시선을 느낀 세비스가 수저를 들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 오늘 좀 피곤해서요. 며칠간 계속 앓았더니 몸이 아직 회복이 덜 됐나 봐요. 걱정 마세요.”
“으응.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먹어. 몸도 안 좋은데 체하겠어.”
식사를 먼저 끝낸 실비아는 식탁에 팔꿈치를 괸 채 세비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같이 사는 식구가 아프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붉은 눈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몸이 덜 회복돼서 그런지 눈가도 살짝 빨간 것 같았다. 반듯하고 잘생긴 눈썹이 장어구이를 먹을 때마다 살짝 꿈틀거렸다.
성체가 되더니 세비스의 얼굴선이 더 분명해졌다. 콧대도 날카로워지고 눈매도 깊어졌다. 귀엽게 오물거리던 입술은 날 선 이목구비에 어울리게 시원스러워졌다. 그가 얼핏 무표정을 지으면 예전에는 귀여운 젖살 때문에 삐진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차갑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얼굴 살이 빠져서 그런가?’
그의 얼굴을 가만히 훑어보던 실비아는 순간 잊고 있던 게 생각나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맞아. 얘가 남주인지 아닌지 확인해봐야지. 정말 알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게임공략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세비스가 성체가 됐으니 남주가 맞는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냉정한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법이다. 실비아는 국수를 깨작거리는 세비스를 가만히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남주가 맞다면 세비스와 그 짓을 해야 한다는 건데….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괜히 국수를 잘 먹고 있는 순진한 세비스를 상대로 엄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만약 남주가 맞다면 이 생각을 실행하기 위해 그를 유혹해야만 하겠지. 그냥 확인하지 말까. 아니지, 그랬다간 그동안 노력한 보람도 없이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왔다 갔다 하는 생각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을 다잡은 뒤 ‘동정 레이더 on’을 속으로 외쳤다.
과연 세비스는 남주가 맞을까, 어떨까…. 실비아는 초조함에 저도 모르게 다리를 달달 떨었고 곧 판독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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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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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뭐야, 판독 불가라고? 이게 무슨 뜻이지.’
메시지를 확인한 그녀는 팔에 힘이 쭉 빠졌다. 그 바람에 팔이 제멋대로 물잔을 쳐버려 식탁과 바닥에 물이 흩뿌려졌다.
“실비아 님! 괜찮으세요?”
“어어, 괜찮아. 식사 계속해.”
잠시 허둥지둥하며 식탁과 바닥을 닦은 그녀는 다시 얼빠진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뭐지? 무슨 뜻일까. 판독 불가가 뜨다니. 최소한 공략 캐릭터가 아니면 ‘동정입니다’라고 떠야 하지 않나? 판독 불가라는 메시지는 게임 빙의 이래 처음 보는 거였다. 그가 게임의 히든 캐릭터라면 하다못해 시스템이 힌트라도 줄 텐데….
실비아는 현생에서 해봤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들을 떠올렸다. 내심 세비스가 공략 캐릭터가 아니길 바라고 있었던 그녀의 머리는 자기 좋을 대로 굴러가기 시작했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세비스는 플레이어를 보조하는 NPC가 아닐까.
‘맞아! 공략 캐릭터가 아닌 거야. 세비스는 게임 시작부터 옆에서 일정을 알려주면서 도움을 주는 NPC인 게 분명해.’
이게 진짜 모니터 앞에서 하는 게임이었다면 판독 불가 메시지가 뜨든 말든 어떻게든 함께 사는 집사를 꼬셔 보려고 노력했겠지만, 실비아는 실제로 게임에 빙의한 몸. 공략 캐릭터가 아니라는 결론이 난 마당에 굳이 같이 사는 식구 같은 세비스를 유혹할 이유가 있겠는가.
‘난 상식이 있는 변태라고. 남주만 꼬셔도 시간이 모자란데 같이 사는 식구까지 꼬실 필요는 없지.’
실비아가 물을 쏟더니 멍하니 입을 벌리다가 혼자서 고개를 끄덕하는 등, 수상쩍은 행동을 계속하자 세비스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아냐. 계속 먹어. 어, 여기 남은 장어도 네가 다 먹어. 몸에 좋은 거니까.”
실비아는 손사래를 치곤 장어 접시를 아예 세비스 앞에 가져다주었다. 세비스는 어쩔 수 없이 남은 장어를 다 먹어 치웠고, 그로 인해 몸이 더 후끈 달아올랐음은 물론이었다.
“좀 덥네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덥지….”
“응? 난 시원한데.”
세비스는 손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식사를 끝낸 것 같자 실비아가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세비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숨을 또 내쉬었다.
“후우, 실비아 님. 물 좀 주시겠어요? 죄송한데 몸이 안 좋아서…. 설거지는 못 도와드릴 것 같아요.”
“그래. 딱 봐도 안 좋아 보여. 여기 물. 설거지는 내가 다 할 테니까 넌 방에 들어가서 쉬어.”
물을 가져다준 실바아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자 세비스가 움찔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싱크대에 설거짓거리를 쏟아부은 실비아는 일어나지 않고 계속 식탁에 앉아있는 세비스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는 아예 손에다 얼굴을 묻은 채 식탁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는데, 아무래도 아직 몸살기가 남아있는 게 분명했다.
‘노엘 님네로 이사 가는 얘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저래서야 오늘은 말하기 좀 그렇네.’
설거지를 한창 하고 있으려니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세비스가 급하게 제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설거지를 다 마친 실비아는 행주로 식탁을 닦으며 쯧쯧 혀를 찼다.
‘원래 웬만해선 식탁이 더러운 꼴을 못 보는 앤데, 급하게 방에 들어간 걸 보니 많이 아픈가 봐.’
휑한 거실. 후식으로 과일을 깎은 실비아는 굳건히 닫힌 세비스의 방문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곤 소파로 걸어갔다. 아픈 애한테 굳이 과일 먹자고 억지로 부를 순 없었다.
사과를 씹어먹고 있으려니 포르르 새 날개 소리가 들리더니, 구멍 난 베란다 창문 사이로 참둘기가 들어왔다. 참둘기는 깨진 창문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바닥에 착지해 가볍게 몸을 털었다.
“참둘기야! 오랜만이구나.”
“구구!”
반가워하며 입을 벌린 실비아가 소파에서 뛰쳐나와 참둘기 앞에 쪼그려 앉았다. 참둘기의 조그만 몸뚱이를 잡은 실비아는 감격의 뺨 비비기를 시전했다. 참둘기는 처음엔 질색하는 것처럼 날개를 퍼덕거리더니, 결국 그녀가 그립긴 했던 듯 얌전히 몸을 맡겼다.
“너도 내가 그리웠던 거지? 잠깐, 내 정신 좀 봐.”
급히 부엌으로 가 촉촉한 옥수수 몇 알을 구해온 그녀는 참둘기의 부리에 디밀었다. 찹찹거리며 맛있게 먹는 참둘기를 흐뭇하게 보던 그녀는 깨진 베란다 창문을 가리키며 혀를 찼다.
“퍼랭이가 이걸 깨트리고 갔어. 참, 제 주인 닮아서 이상한 앵무새야, 그렇지 않니?”
“구구!”
참둘기가 뭐 그런 애가 다 있냐는 듯 허리에 날개를 대고 폴짝폴짝 뛰었다. 화내는 것 같은 제스처에 조그맣게 웃던 실비아는 참둘기의 발에 묶인 편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번에도 사람 간 떨어지게 붉은색과 노란색 편지가 같이 묶여 있었다.
“어우, 우리 참둘기. 두 편지를 함께 가져왔구나.”
과연 거북이 수인을 만나서 미뤘던 당장의 걱정은 노엘과 루카가 맞을까? 실비아는 우선 노엘의 편지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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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실비아 님.
지금쯤이면 던전에서 돌아오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편지했습니다.
당연히 공략은 성공하고 오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실비아 님은 보통 분이 아니시니까요.
저택으로 이사 오는 건 세비스랑 잘 이야기가 됐나요? 제가 순간적으로 세비스에게 섭섭하게 굴었는데, 그 아이가 신경 쓰지 않을까 나중에 걱정이 되더군요. 혹시나 집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저는 세비스가 오는 걸 무척 환영한다고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저택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으니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는 말씀도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택의 관리인에겐 미리 말해뒀으니, 언제든 살고 싶으시면 저번에 알려준 주소로만 찾아가시면 됩니다. 혹시나 안 오기로 결정이 났더라도 충분히 이해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살짝 섭섭하겠지만….
저택 얘기는 이쯤으로 하고, 한 가지 슬픈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군요.
거두절미하고 또다시 황명을 받게 됐어요. 오염된 던전을 해결하러 저번보다 더 멀리 가게 됐네요. 최소 한 달 이상은 걸릴 것 같습니다.
던전에서 돌아오면 바로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참, 일정이 안 따라주네요. 하지만 이번 일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실비아 님과 더욱 가까워질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정말 보고 싶습니다, 실비아 님. 자매님도 저랑 똑같은 마음이실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럼 편지가 너무 길어지니 여기까지 쓰도록 할게요. 궁금한 게 많지만, 지금은 묻어두겠습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무사히 지내시길.
-자매님을 늘 생각하는 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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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노엘 님이 또다시 멀리 떠나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