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장어구이! 그리고, 음. 수육 삼합은 좀 과하려나. 그러면 생선구이. 어때? 말만 해. 아주 그냥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버릴 테니까.”
실비아는 요리 초보답게 잘 만들지도 못 하면서 욕심을 잔뜩 부렸다. 한 상 가득 차리고 싶은 꿈은 찬란하나 현실은 시궁창, 뭐 이런 것과 비슷했다.
세비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실비아 옆에 선 그는 냉장고를 보려고 고개를 숙였다.
“장어구이만으로 충분한 것 같은데요? 저녁이니까 간단하게 먹죠.”
“그래? 음, 알았어. 괜히 많이 먹으면 밤에 소화 안 될 수도 있겠다. 자, 여기는 우선 나한테 맡기고 얼른 씻으라니까.”
냉장고 문을 닫은 실비아가 양팔을 걷어붙인 채 다시 야채 씻기에 돌입했다. 세비스는 불안하게 힐끗거리다가 설마 별일 나겠나 싶어 욕실로 들어갔다. 달칵-소리와 함께 욕실 문을 닫은 세비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말 꿈이었나?’
그는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던 실비아의 체취를 떠올렸다. 바다 냄새가 살짝 섞여 있었지만, 확실히 실비아의 향기였다. 하지만 꿈속의 실비아는 본 적 없는 이상한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붕대까지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게 꿈이 아니었다면 실비아가 크게 다쳤다는 소린데, 방금 본 제 주인은 너무나도 멀쩡한 얼굴이었다.
‘하아, 꿈이었나 보네….’
가까이 붙었던 부드러웠던 몸과 만져보고 싶었지만, 꿈인데도 불구하고 차마 손대지 못했던 둥근 곡선을 떠올린 그의 아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파자마 바지 한쪽이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오르자 세비스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어졌다.
‘아, 이게 왜 지금….’
하필 실비아가 밖에서 요리하고 있는데 흥분해 버리다니. 문에 기대선 세비스는 타일 바닥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도는 야한 상상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눈을 질끈 감고 건전한 것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야릇한 상상은 그칠 줄을 몰랐고, 꿈에서 못 했던 짓을 떠올리기에 이르렀다.
실비아를 뒤에서 껴안은 채 허리를 더듬고 원피스를 걷어 올려 우유같이 뽀얀 허벅지를 더듬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순간 깜짝 놀라 소리 없이 경악했다. 아래는 이제 바지 천을 곧 뚫고 나올 듯이 발기한 상태였다.
바깥에서 요리 중인 그녀는 한 지붕 아래에서 제가 무슨 나쁜 상상을 하고 있는지 추호도 모를 터였다.
‘이 짐승 같은 놈!’
이를 악문 세비스는 급히 옷을 벗어 던진 뒤 샤워기 아래에 섰다. 급하게 냉수를 틀자 차가운 물이 그의 머리 위로 힘차게 쏟아졌다.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물을 한참을 맞으니, 겨우 뜨거웠던 몸이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우울한 얼굴로 욕실 밖으로 나오자 실비아가 꽁꽁 언 장어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보였다.
젖어있는 머리 위에 수건을 얹은 세비스는 욕실 문 앞에 선 채 제 몸을 천천히 내려다봤다. 혹시나 또 아래가 제 의지랑 달리 벌떡 일어설까 봐 겁이 나서였다. 성체가 될 날만 기다려왔건만, 이런 곤란한 신체 변화가 생길 줄은.
‘제발 실비아 님 앞에서만 서지 말아라. 그러면 진짜 죽고 싶을 거야.’
민망함을 숨기려 수건으로 머리를 몇 번 털어낸 그는 크게 헛기침을 했다. 한 번 더 아래를 힐끗 바라본 그는 조심히 부엌으로 다가갔다. 실비아는 얼린 장어 앞에서 계속 요지부동이었다.
“실비아 님, 왜 그러세요?”
“으응. 야채는 다 씻어놨거든. 근데 생각보다 밀키트에 들어있던 장어가 너무 꽁꽁 얼어있어서…. 이걸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었어. 이 상태 그대로 구우면 되려나?”
“비켜보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부엌으로 들어온 세비스가 실비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실비아는 겸연쩍어하면서도 옆으로 물러났다. 세비스는 찬장에서 천일염을 꺼내 소금물을 만든 뒤, 얼어있는 장어를 그 안에 넣었다.
“이러면 금방 해동이 될 거예요. 그사이에 다른 걸 만들면 되겠죠.”
세비스의 도움 덕에 요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실비아는 장어구이와 함께 곁들여 먹을 차가운 국수를 만들고 싶어 했는데, 그것도 세비스가 옆에서 많이 도와주었다. 결국 실비아가 한 건지 세비스가 한 건지 모를 요리들이 한가득 식탁에 차려졌다.
머쓱한 표정이 된 실비아가 식탁 의자에 앉자 맞은편에 앉은 세비스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실비아 님, 잘 먹을게요!”
“아, 아니. 내가 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실비아 님이 하신 거죠. 제가 옆에서 도와드린 거고요.”
세비스의 방긋 웃는 얼굴에 실비아는 말없이 수저를 들었다. 성체가 돼서 겉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역시 세비스는 세비스구나 싶었다. 본인이 거의 다 요리해놓고 제가 민망해할까 봐 겸손하게 답하다니 고마웠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장어구이를 한입 먹은 그녀는 ‘오!’하고 감탄사를 흘리더니, 세비스에게 접시를 가까이 밀어주었다.
“이거 너무 맛있어. 빨리 먹어 봐. 심해 장어로 만들었다고 해서 살짝 걱정했는데, 먹어본 생선 중에 손꼽을 만큼 맛있어. 얼른!”
“그래요? 그럼 어디….”
세비스는 장어구이를 한 점 집어 소스에 찍어 먹었다. 그의 동공이 크게 확장했다.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던전에서 좋은 걸 구해오셨네요.”
“그치? 정말 맛있다니깐. 몇 개 더 얻었으면 정말 좋았을걸.”
화기애애한 대화와 함께 식사가 이어졌다. 세비스가 장어구이를 먹는 걸 보며 자신도 열심히 입안에 장어구이를 밀어 넣던 실비아는 <장어구이 밀키트>의 효과 덕인지 몸에서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는 걸 느꼈다.
‘오? 뭐지. 알 수 없는 스태미나가 솟아오른다는 설명대로 진짜 몸에서 호랑이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 같아.’
원기가 보충되는 느낌에 실비아는 어깨를 으쓱으쓱하면서 속으로 즐거워했다. 반면에 세비스는 점점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속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장어구이를 집는 손이 점점 느려지고, 손부채질을 하며 티셔츠 앞섶을 계속 팔랑거렸다.
“실비아 님, 난방 틀어놓으셨어요? 왜 이렇게 덥지.”
“응? 덥다고? 난방은 안 틀었는데. 저기 봐. 창문도 다 깨져서 시원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걸.”
“뭐야! 저건 언제 깨진 거죠?”
경악한 세비스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베란다 창문을 바라봤다. 아까 온 신경이 실비아에게 가 있었던 바람에 창문에 구멍이 숭숭 뚫린 걸 발견하지 못했다.
실비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대답했다.
“퍼랭이가 깨고 달아났어. 아니, 정확히는 깨고 나왔다고나 할까.”
“퍼랭이가 누군데요?”
“앵무새 퍼랭이, 우리 집에 머물렀던….”
실비아의 말을 끊고 당황한 세비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슨…. 앵무새가 우리 집에 머물렀어요? 언제요?”
“…참둘기가 말 안 했나 보구나, 가 아니라 말할 수 없었겠구나. 응, 아마 베란다에서 참둘기랑 같이 살고 있었을 거야. 어떻게 세비스 네가 모르는 새에 무전취식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랬군요. 어쩐지 과일이며 옥수수가 가끔 사라진다 싶더라니…. 으이구, 이 창문 봐. 은혜를 원수로 갚았네요.”
식탁에서 일어난 세비스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깨진 창문을 살폈다. 그 아래에 유리 파편을 골똘히 바라보던 그는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와 청소를 했다. 실비아가 손을 휘저으며 그의 행동을 말렸다.
“아, 맞다. 거기 유리 조각이 있겠구나. 밥 먹고 해. 급한 것도 아닌데!”
“아니, 아니에요. 이것부터 먼저 할게요.”
사실 세비스는 창문을 살피는 건 둘째 이유고 첫째로 몸이 너무 뜨거워져서 진정시키려고 일어난 것이었다. 단지 얼굴을 맞대고 식사하는 것뿐인데도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깨진 창문 사이로 슝슝 들어오는 가을바람 덕에 그나마 뜨거웠던 얼굴이 식는 것 같았다. 일부러 부산을 떨면서 유리 조각을 깔끔히 치운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베란다에 오래 머물렀다.
멀뚱히 바닥을 보며 서 있는 세비스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실비아가 다시 오라고 채근했다.
“빨리 와. 장어구이 식어.”
“네…. 먹어야죠, 장어…. 후.”
세비스가 느릿느릿하게 식탁에 앉았다. 그는 뜨거운 한숨을 연거푸 내뱉더니 다시 장어구이를 먹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제 몸이 뜨거워지는 원인에 지대한 기여를 한 게 알 수 없는 스태미나가 오르는 장어구이란 건 꿈에도 모른 채, 1인분을 너끈히 해치웠다. 접시가 비자 실비아가 프라이팬에 있는 남은 장어구이 1인분을 다 쏟아부었다.
“더 먹어 더. 몸에 좋은 거니까. 너 안 그래도 성체가 되면서 크게 아팠을 거 아냐. 원기 회복하려면 이게 최고래.”
“예…. 맛있긴 하네요.”
세비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실비아의 말대로 힘이 불끈 솟아나는 것 같긴 한데, 그 힘이 애먼 부위에 몰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장어구이를 먹다 말고 어느새 맞은편에서 국수를 먹고 있는 실비아에게 시선이 향했다. 실비아는 국수를 조금씩 먹으면서 반찬을 오독오독 씹어먹고 있었는데,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다람쥐 같아서 무척 귀여웠다.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잠시, 세비스의 시선은 점점 내려가 저도 모르게 봉긋한 가슴에서 멈췄다.
실비아가 국수를 입에 넣으려고 고개를 숙일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가슴골이 보였다. 원피스 자체는 노출이 많지 않았으나, 세비스가 저도 모르게 온정신을 그녀의 가슴에 쏟아붓는 바람에 보일락말락 하는 가슴골을 선명하게 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여리여리한 빗장뼈를 스치듯이 내려와 그 아래 옷 위로 감춰진 둥그런 가슴선을 홀린 듯이 응시하던 세비스는, 순간 자신의 불순한 시선에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실비아는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식사 중인데 그런 그녀의 가슴을 몰래 훔쳐보다니, 정말 제대로 변태가 된 기분이었다. 답도 없는 미친 변태.
‘내가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이러다가 실비아 님이 눈치채면 어쩌려고. 돌아버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