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엇? 뭐야!’
그러나 경쾌한 딱-!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녀의 손목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잡혀버린 것이다. 그는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실비아의 손을 가볍게 잡아버렸다. 그가 방금 잡은 손목도 밑으로 내리누르자 그녀는 양 손목을 다 잡힌 셈이 됐다.
어떻게 스킬을 썼는데 잡힐 수가 있지? 충격을 받은 실비아의 눈이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의 주의사항에 레벨이 더 높은 상대에게 간파당할 수 있다는 설명이 있단 게 뒤늦게 떠올랐다.
‘설마? 성체가 된 세비스가 나보다 강하다고?’
미간을 좁힌 세비스는 고개를 살짝 들더니 넋을 놓은 실비아를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봤다.
“맘에 안 드는 꿈이야….”
제 꿈속인데도 불구하고 실비아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니. 심지어 붕대를 감고 있어서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온전하지 않은 모습인데 말이다.
세비스는 꿍얼거린 뒤 다시 고개를 내렸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실비아의 가슴은 무척 따뜻하고 향긋했다. 온종일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어도 좋을 만큼.
포근한 가슴에 얼굴을 비비던 세비스는 이대로 계속 꿈을 꿔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뿐이었고 더는 다른 짓을 하진 못했다. 꿈속인데도 딱히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 그녀에게 더 이상 무슨 짓을 할 수 있을까. 참, 웃기는 일이었다. 꿈조차 제가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고 현실적이라니.
‘기가 막히네.’
한숨을 흘린 세비스는 몸을 굴려 실비아의 옆에 누웠다. 그러곤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스킬을 간파당한 충격에 잠시 머나먼 의식의 저편으로 정신이 가출했던 실비아는 손목이 자유로워진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옆에서 들리는 색색거리는 세비스의 숨소리. 눈치를 보니 그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후, 우선 빠져나가자.’
실비아는 조심스럽게 배 위에 얹혀있는 큼지막한 손을 치운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살균 투구를 챙긴 뒤 숨죽여 방 밖으로 나온 그녀는 얼른 거실의 불을 몽땅 켜버렸다. 거실이 온통 밝아지자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제 방으로 가 얼른 붕대를 다 풀어버린 그녀는 살균 투구랑 붕대의 흔적을 옷장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겼다. 다행히 그사이에 지혈이 된 건지 입에서 피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거울로 살펴보니 혀가 살짝 찢어져 있긴 했지만, 말을 하기 힘들 정도는 아니라고나 할까. 혼잣말을 몇 번 해보니 발음도 정확하게 들렸다. 좀 많이 찝찝하긴 하지만 오우거의 불알로 만든 붕대와 살균 투구가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세비스가 말을 걸어도 티가 안 나겠지.’
거실로 나온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소파 앞을 서성였다. 세비스가 잠결에 야한 짓…. 야한 짓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애매한 짓을 한 건 저 혼자만의 비밀로 하면 될 것 같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실비아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은 데다가 어차피 그는 다시 잠이 들었으니 실비아만 시치미 떼면 될 터였다.
‘이건 그렇다 치고…. 진짜 뭐지?’
실비아는 사실 그것보다는 세비스가 제 스킬을 간파했다는 것에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성체가 됐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니지. 애초부터 이 스킬을 세비스한테 써본 적이 없었다. 보여준 적이야 몇 번 있지만, 공격용으로 써본 적 없으니 성체가 되기 전의 세비스도 스킬을 간파했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플레이어를 보조하는 캐릭터니까 당연한 건가? 허접쓰레기들 말고는 써본 적 없으니까 생각보다 크게 충격받을 일은 아닌지도 모르겠어.’
허접쓰레기인 문신 뚱땡이와 멸치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는, 아무렴 집사인 세비스가 자신보다 약한 건 말이 안 되는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다른 남주들도 레벨 측정은 안 해봤지만, 자신보다 강할 확률이 높겠지.
생각해보니 황궁의 기사들도 하나같이 세 보이는 게 저를 다 이길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레벨은 69이니 그에 맞춰서 주변인들이 강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순간 충격받긴 했지만, 보조 캐릭터가 만렙도 아닌 나한테 꿀밤을 맞는 게 더 이상한 거지.’
실비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별것 아닌 일에 충격을 받은 게 웃겨서였다. 안심이 되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홀쭉해진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음식을 넣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인벤토리에서 <장어구이 밀키트>를 꺼낸 그녀는 부엌으로 가 우당탕탕 재료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도마와 칼을 꺼내고 아까 사 온 야채들을 씻고 있으려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비스, 이제 일어났어? 씻고 있어. 장어구이 해줄게!”
“…….”
야채 씻기에 집중한 실비아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니 세비스의 방문은 열려 있는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비스?”
“실비아 님. 저….”
살짝 열린 문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보였다. 실비아는 틀어놨던 물을 잠그곤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문을 잡은 손가락이 살짝 꼼지락거리더니 다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성체가 된 것 같아요. 목소리, 좀 이상하죠?”
“…이상하지 않아. 엄청 멋있게 변한 것 같은데?”
실비아는 최대한 처음 들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세비스가 불쑥 밖으로 나왔다면 어색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이상한 점을 눈치챘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아, 그렇다면 다행인데….”
세비스는 다시 말끝을 흐리더니 발만 빼꼼 거실 밖으로 내밀었다. 한숨을 내쉰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몸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나가기가 민망한데…. 그것도 그렇고.”
“그렇고?”
“언제 오신 거예요?”
“아까 왔어. 너 자고 있는 것 같길래 나도 내 방에서 쉬었지. 방금 일어나서 저녁 준비하고 있었어. 오늘 저녁은 내가 요리할 테니 기대해!”
실비아는 최대한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를 꾸며냈다. 문이 살짝 더 열리더니 어두운 문틈 사이로 세비스의 붉은 눈이 보였다.
“실비아 님, 혹시 제 방에 들어오셨던 건…. 아, 아니에요.”
“응? 뭐, 헛거라도 본 거야? 귀신 봤어? 팥을 한 번 더 뿌려야 하나….”
세비스가 그녀의 표정을 못 봐서 정말 다행이었다. 실비아는 지금 누가 봐도 잔뜩 찔린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모른 척하는 그녀의 대답에 세비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금 말을 내뱉었다.
“아뇨, 귀신 같은 건 아니었어요. 알겠어요. 그럼…. 저 나갈 거니까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래. 안 놀랄 테니까 좀 나와 봐.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야.”
앞치마로 손을 닦은 실비아가 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섰다. 몰래 입을 풀면서 표정 관리를 마친 뒤였다. 기다리고 있으려니 세비스가 슬금슬금 밖으로 나왔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세비스의 완전히 자란 모습을 처음 본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렸다.
‘확실히 늑대 수인은 보통 인간들과 다르구나.’
실비아의 멍한 표정에 세비스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던전으로 떠났던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진 그는 키와 체격이 부쩍 자랐는데, 실비아가 목을 꺾어서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아까 침대에 누워있을 땐 어두워서 몸집이 좀 커졌다고만 인식했는데, 밝은 조명 아래서 보니 그 차이가 확실히 보였다.
전의 세비스도 거의 성인 남자와 엇비슷하게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성체가 된 세비스는 마치 몇 년간 몸을 단련한 전사처럼 보였다. 떡 벌어진 어깨 하며 반팔을 입어서 더 확연히 보이는 근육이 가득 들어찬 팔뚝까지. 앞에 서는 순간 분노조절장애가 싹 나을 것 같은 위협적인 몸이었다.
세비스는 머쓱하게 제 팔뚝을 쓰다듬으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실비아 님, 옷을 좀 사야 할 것 같아요. 급히 몇 개 사긴 했는데…. 더 필요할 것 같네요.”
“그, 그래. 필요하겠다. 이 몸으로는 전에 입던 옷을 걸칠 수 없겠어.”
몸을 너무 쳐다봤나. 민망해진 실비아는 세비스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시선이 제 얼굴로 향한 걸 알아챈 세비스가 앞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검고 풍성한 속눈썹이 붉은 눈에 그늘을 만들어냈다.
그의 얼굴도 성체가 되면서 많이 변했는데, 젖살이 완전히 빠지면서 턱선이 날카로워졌다. 여전히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망울은 그대로지만 콧대가 날렵해지고 선이 전체적으로 굵어졌다. 이제 귀엽다기보다는 ‘잘 생겼다’에 가깝게 변한 것 같았다. 마치 진돗개가 어릴 때는 귀엽다가 성견이 되면 늠름해지는 것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자세히 보니 쫑긋하게 솟은 귀도 미묘하게 더 길쭉해진 듯해 실비아의 입에서 조그만 실소가 나왔다.
“푸흡, 아, 아냐. 보니까 머리 위에 검은 귀도 좀 자란 것 같아서. 너 정말 멋져졌다. 늑대 수인은 확실히 성체가 되면 일반인들보다 몸집이 훨씬 커지는구나. 바로 용병단에 가입해도 되겠어.”
“용병단까진…. 확실히 침대가 좁아지긴 했어요.”
칭찬이 쑥스러웠는지 세비스의 귓가가 빨개졌다. 침대라는 말에 지레 찔려서 살짝 움찔했던 실비아는 최대한 태연한 걸음걸이로 싱크대로 걸어갔다. 냉장고를 열며 자연스럽게 표정 관리를 한 그녀는 안에 든 식재료들을 뒤적거렸다.
“배고프지? 이번엔 내가 요리할 테니 기대해. 던전에서 맛있는 걸 많이 얻었거든. 보자, 어디 냉장고에 고기는 없나….”
“요리요? 실비아 님이 요리하는 건 본 적이 없는데…. 뭐 하시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