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실비아는 유일하게 거실을 밝히던 스탠드 등을 꺼버린 뒤 살금살금 도둑처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스탠드 등이 꺼지자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는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숨소리가 들릴세라 입을 막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까치발로 걸어 세비스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귀를 기울여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고 있는 것 맞겠지?’
침을 꿀꺽 삼킨 실비아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다행히 문을 잠가놓지 않았는지 문고리는 쉽게 돌아갔고,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어두운 방 안, 불룩한 이불 바깥에 검은 머리가 삐죽 나와 있는 게 보였다. 세비스는 귀가 밝아서 층간소음에 무척 고통스러워했는데, 그래서 그는 잘 때면 귀마개를 하고 잤다. 머리 위에 솟은 검은 귀에 하얀 귀마개가 박혀있는 걸 본 실비아는 안심하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저 귀마개 덕에 이런 장난을 칠 수 있을 줄이야.’
침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불룩한 이불은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무슨 피곤한 일이 있었는지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어떻게 놀라게 해줄까 궁리하던 실비아는 세비스를 톡톡 두드려 깨운 뒤, 자신의 귀신 같은 몰골을 보여주기로 했다.
“우웅….”
‘헙.’
그때 세비스가 몸을 뒤척였다. 그가 깨어날까 봐 놀란 실비아는 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실비아 님, 쌀뜨물은 버리지 말고….”
잠꼬대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우, 막상 하려니까 좀 긴장되네.’
세비스의 얼굴이 있을 법한 위치에 쪼그려 앉은 실비아는 속으로 숫자를 센 뒤 불룩한 이불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잠에서 깬 세비스가 이불을 걷다가 깜짝 놀라는 장면을 상상하고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잠이 더 깊이 든 건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답답해진 그녀는 손바닥을 펼쳐 이불을 팡팡 쳤고, 웅크리고 있던 몸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일어나라, 일어나…. 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팔목을 갑자기 잡히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비스의 품속에 갇힌 상태였다. 그는 실비아를 사지로 꽁꽁 감싸더니 그걸로도 모자라 함께 이불을 덮어버렸다.
“우웁, 웁!(이 미친!)”
장난치려다가 역으로 당한 실비아는 당황해서 마구 버둥거렸다. 불도 켜지 않은 데다가 이불 속에 들어온지라 한 치 앞도 분간되지가 않았다. 거기다가 워낙 꽉 껴안은 탓에 안 그래도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는데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숨이 막혀 몸부림치던 실비아는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 들어 멈칫했다.
‘세비스가 이렇게 몸집이 컸었나?’
며칠 만에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세비스한테 이런 식으로 안겨본 게 처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맞닿은 몸이 낯설게 느껴졌다. 왠지 예전보다 훨씬 커진 것 같았다. 실비아의 몸부림이 조금씩 잦아들자 세비스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꿈이네. 냄새가… 나는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그는 어두운 이불 속에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실비아를 더 단단히 껴안았다. 허리에 닿는 손길에 민망해하던 실비아는 고개를 꺾어 킁킁대며 제 몸 냄새를 맡았다.
‘내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야? 아! 설마 심해왕국에 갔다 오는 바람에 물고기 냄새라도 나는 건가?’
생선 비린내라도 나는 걸까? 하지만 스스로가 맡기엔 별다른 특별한 냄새는 안 나는 것 같았다. 세비스는 개코니까 그녀보다 더 예민하게 냄새를 캐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이불이 확 걷히더니 실비아 위에 세비스가 올라탔다. 기가 막힌 상황에 실비아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여전히 잠이 덜 깬 듯 눈을 가늘게 찌푸린 채 조그맣게 꿍얼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앞을 분간할 수 있는 늑대 수인의 눈이 붉게 빛났다.
“꿈이 뭐 이래…. 얼굴을 왜 이렇게 꽁꽁….”
“!”
몸을 일으킨 세비스를 올려다본 그녀는 너무 놀라 뻣뻣하게 굳었다. 아까 느꼈던 이상함이 사실이었다. 캄캄한 시야로 봐도 세비스의 체격은 예전과 확실히 달랐다. 거기다가 아까는 정신이 없어 느끼지 못했는데, 목소리도 전보다 훨씬 낮게 변했다.
‘완전히 성체가 된 건가 보네? 이렇게 커질 줄이야. 근데 얘, 지금 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거 원, 붕대를 풀고 들어왔으면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야로 세비스의 달라진 몸이 더 확실히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평소에 잠옷으로 입던 파자마를 걸치고 있었으나, 예전과 다른 몸 사이즈 때문에 파자마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잠옷을 새로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실비아는 몸을 작게 흔들었다. 제 위에서 비키지 않는 세비스 때문에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배 위에 닿는 뜨거운 체온이 숨 막혔다.
‘좀, 비키면 안 되나. 확, 꼬집어버릴까?’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세비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숙였다. 뭐 하려나 싶어서 깜짝 놀란 실비아가 순간 손을 들었고, 세비스가 그 손을 깍지 껴 잡더니 침대보에 내리눌렀다. 그러곤 다른 손으로 그녀의 살균 투구에 손가락을 걸었다.
“가만히 있어 봐.”
“웁웁!(저런!)”
저, 저 싸가지 없는. 실비아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제가 보기에 세비스는 아직도 자신이 꿈속에 있고 밑에 깔린 여자가 실비아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저렇게 버릇없이 반말을 하는 거겠지. 눈앞의 여자가 아무리 꿈속이라도 제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대뜸 반말을 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유교걸인 실비아가 분을 삭이는 새에 살균 투구를 벗겨낸 세비스의 입에서 실망 가득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얼굴이 드러날 줄 알았더니 붕대로 칭칭 감싸인 미라가 나온 것이다.
“휴우, 뭐야. 이번엔 붕대까지? 진짜 이상한 꿈이네.”
세비스는 그녀가 본 바대로 던전에 간 사이 큰 몸살을 앓고 성체가 됐다. 그 후로도 갑자기 성체가 되면서 에너지를 많이 쓰는 바람에 며칠간 연차를 쓰고 온종일 잠들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그는 퍼랭이가 베란다 창문을 깨고 나가는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잠에 취해있었다. 지금도 잠이 덜 깼기에 이 상황이 당연히 꿈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꿈속을 헤매다 보니 실비아의 체취를 맡았고, 무의식중에 끌어당기니 실비아 냄새가 나는 이상한 여자가 제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그런데 얼굴에는 투구 같은 걸 쓰고 있는 데다가 자신이 반말을 하는데도 별다른 대꾸 없이 읍읍거리기만 한다. 그러니 이게 꿈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투구를 벗겨서 꿈에 나타난 실비아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 했던 세비스는 대단히 실망해 버렸다.
‘붕대라니. 꿈조차 마음대로 못 꾸는구나.’
뭔 놈의 꿈이 주인이 원하는 얼굴도 못 보여 주는 건지. 붉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미라 같은 얼굴을 살피던 세비스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얼굴은 붕대로 꽁꽁 싸맸지만 몸은 확실하게 실비아가 맞았다. 늘 닿고 싶었던 체향과 몸선. 알 수 없는 열기로 그의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이상하게도 성체가 되는 순간부터, 실비아를 생각할 때마다 그에게 이상한 욕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 욕망은 차마 입밖에 내뱉지 못할 정도로 저급한 거라서 현실에선 절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겠지만, 꿈이라면 아주 조금은….
세비스가 갑자기 상체를 숙였다. 슬슬 세비스를 꼬집어버릴까 생각하고 있던 실비아는 갑자기 몸을 숙이는 그 때문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세비스는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밀곤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곧 부드러운 가슴 위로 그의 뜨거운 숨결이 뱉어졌다.
“하아….”
예상치 못한 행동에 실비아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얘가 성체가 되더니 꿈속의 여자를 상대로 무언가 음란한 짓을 하려는 걸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아무리 변태라지만 세비스 꿈속의 반찬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혀를 다쳐서 말을 제대로 못 하니, 행동으로라도 세비스를 깨워야겠어.’
급해진 실비아는 우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침대가 출렁거리도록 몸서리를 쳐봐도 그는 전혀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발버둥 치지 말라는 듯 몸으로 그녀를 짓누르는 게 아닌가. 다행히 무언가 더 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침대 위에서 이런 야릇한 자세를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위험했다.
‘와, 절대 안 돼. 안 된다고!’
이대로면 세비스는 몽정 비스무리한 걸 경험하게 될지도 몰랐다. 꿈속에서 모르는 여자인 줄 알고 실례를 저질렀는데 알고 보니 실비아란 걸 알면 그도 민망해지고 자신도 민망해질 터.
상상만 해도 두고두고 이불킥 할 흑역사였다. 집사의 정신건강을 위해 실비아는 어쩔 수 없이 스킬을 쓰기로 했다. <뚝배기 깨기>, 게임 초반에 문신 뚱땡이와 멸치에게 썼던 스킬로 이 스킬을 쓰면서 꿀밤을 갈기면 일반인도 상태 이상 ‘전의상실’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하나 더. 미안, 세비스. 비정한 나를 이번만 용서하렴. 나중엔 두고두고 고마워하게 될 거야.’
한 손은 이미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가 잡혀버렸으니 나머지 한 손은 실패 없이, 신중하게 써야 했다. 실비아는 <손은 눈보다 빠르다>도 함께 쓰기로 결심했다. 갖은 고생을 함께 한 가족 같은 세비스에게 스킬을 두 개나 쓴단 게 좀 그랬지만, 이대로 세비스가 흑역사를 생성하는 것보단 나았다.
우선 <손은 눈보다 빠르다> 사용을 속으로 외치자, 그녀를 제외한 주변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긴장으로 땀이 나기 시작한 손을 초조하게 꼼지락댔다. 세비스가 나중에 꿀밤 맞은 걸로 항의하면, 그땐 사과하면서 장어구이를 구워주면 되겠지. 생각을 마친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세비스의 뚝배기를 향해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