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변신해서 나타난다니. 이제 우라엘 황태자를 공략해야 하는데, 황궁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적어도 미리 연락은 하고 와야 대비를 할 것이 아닌가.
실비아는 그러지 말라고 말리려고 입을 열었지만, 붕대로 칭칭 감겨있어서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투구를 써 눈만 보이는 실비아의 표정을 단단히 오해한 블루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격하게 껴안았다.
“아냐. 트라우마를 꼭 극복할 거야. 난 무섭지 않아.”
“우웅, 우우웅.(아니, 그게 아니라.)”
뭐라 웅얼대는 실비아의 입을 투구 안으로 들어온 기다란 손가락이 막았다. 블루가 ‘쉿’이라고 말하며 어차피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실비아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이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보고 따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휘젓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입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잖아. 말하지 마. 실비아, 많이 피곤하지? 마음 같아선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지만, 같이 사는 친구가 안 좋아할 거 같네. 그, 까다롭다는 친구 말이야.”
“아?”
실비아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멈칫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 세비스는 노엘과 루카도 한 번씩 보지 않았나. 거기서 추가로 블루를 본다고 해서 딱히 안 좋아하고 말고 할 건 없을 것 같았다. 아예 같이 살면 좀 곤란하겠지만, 데려다주는 것쯤이야.
하지만 굳이 소개시켜 줄 필요 없는 사이기도 하고, 붕대 때문에 ‘데려다주는 건 상관없다.’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블루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무의식중에 이마에 입맞춤하려다가 투구에 맨 입술이 닿자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실비아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천천히 알아가자고 했으니까, 서두르지 않을게. 아, 부담가지지 마. 별 뜻은 없으니까.”
“우웅.”
“이제 정말 갈게. 아 참.”
발걸음을 옮기려던 블루가 다시 뒤돌았다. 실비아는 영문을 몰라 그의 감색 눈을 빤히 응시했다.
“실비아, 네 집에 퍼랭이가 머물고 있지?”
“우웅.”
실비아가 붕대 감은 입으로 겨우 대답하자 블루가 어느 방향인지 물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순간 블루가 커다랗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와장창-!
“우웁!”
요란하게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퍼랭이가 실비아네 베란다 창문을 맨몸으로 격파하고 뛰쳐나왔다. ‘어떤 미친놈이야!’라고 아파트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가 외쳤다. 용맹한 퍼랭이는 유리 조각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게 하강하더니 순식간에 블루의 단단한 팔 위에 착지했다.
“뭐야!”
“파란 새가 저기 아파트 창문을 깨고 탈출했어!”
지나가던 행인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블루의 팔 위에 앉은 퍼랭이와 박살이 나버린 실비아네 창문을 힐끗댔다.
남들이 뭐라 말하든 아무 관심 없는 블루는 뿌듯한 표정으로 퍼랭이의 턱을 긁어주었다.
“잘했어, 퍼랭이.”
“우웁, 우우웅 우우웁!(잘 하긴 뭘 잘해, 남의 집 창문을!)”
화가 난 실비아가 격하게 항의했으나 붕대 때문에 발음이 뭉개져 들리지 않았다. 블루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활짝 미소 지었다.
“괜찮아, 퍼랭이는 이 정도론 안 다쳐. 얼마나 튼튼한 앤데. 그치, 퍼랭아?”
“난 튼튼해!”
“우우 우우웁!(미친 새새끼!)”
잔뜩 쉰 목소리의 퍼랭이가 우렁차게 대답하자 실비아의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그녀는 가슴을 퍽퍽 치며 울분을 표출했다. 답답한 마음에 투구를 벗은 뒤 붕대를 풀어 욕을 하려고 해봤지만, 이놈의 질긴 붕대는 손댈수록 더 엉키기만 했다.
블루는 붕대를 풀려는 그녀의 손을 제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살균 투구도 다시 씌워준 그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실비아, 걱정 안 해줘도 된대도. 그리고 붕대는 집에 가서 풀어. 이거 되게 튼튼한 거라서 쉽게 안 끊어져. 표백한 오우거의 불알로 만든 거거든.”
“우우우웁!(뭐 이런 씨…!)”
실비아의 흰자위에 빨간 핏줄이 돋았다. 지금 그녀는 오우거의 불알로 만든 붕대를 입에다가 물고 있는 셈이었다. 남주들의 불알은 입에 물 수 있어도, 오우거의 불알은 완전 사양이었다. 실비아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난동을 부렸지만, 블루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말릴 뿐이었다.
“실비아, 진정해. 그렇게 흥분하다간 기껏 지혈한 상처가 다시 덧날 수도 있어. 그럼, 퍼랭이랑 난 이만 가볼게. 이제 집도 아니까 다음에 찾아올 때 헤매진 않겠는걸.”
“우웁, 우우웁.(잠깐, 집은 곧….)”
집은 곧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도 있는데. 그러나 붕대 때문에 여전히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했다. 실비아가 웅얼거리자 블루가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말렸다.
“에이, 혀 아프니까 입 그만 움직여. 정말 갈게. 퍼랭아, 인사해.”
“갈게, 환자!”
블루는 산뜻하게 작별인사를 하더니 퍼랭이와 함께 손과 날개를 흔들며 떠나갔다. 멀어지는 블루와 퍼랭이를 보며 멍하니 길거리에 서 있던 실비아는 한숨을 흘리곤 산산조각이 난 그녀의 집 베란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완전 아작이 나버렸네. 전셋집인데 이사 갈 때 물어주고 나가게 생겼고만. 퍼랭이 저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휴우. 한낱 앵무새에게 비용을 청구할 수도 없고 말이야.’
세비스가 지금 집에 없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퍼랭이가 저걸 깨트리고 나간 순간 세비스가 베란다로 나와봤어야 정상인데, 새새끼가 탈출한 실비아네 베란다는 잠잠했다.
‘하여튼 퍼랭이 저건 주인 닮아서 그런가, 정말 이상해. 블루는 심해왕국에서 볼 땐 정상이 된 줄 알았지만 여전히 좀….’
실비아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블루가 사라진 방향을 다시 응시했다. 많이 똑똑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특이했다. 사실 제일 이상한 건 실비아였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이 조금 변태인 것 빼고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맞다! 씨앗이 얼마나 늘었나 확인해볼까.’
비정한 뽕빨 게임 플레이어답게 획득한 씨앗 확인을 할 때였다. 인벤토리를 연 그녀는 물빛 씨앗이 9개 더 늘어난 걸 발견했다. 기록 창을 여니 지나간 메시지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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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여인~ 야이야이야이…. 새로운 장소를 뚫었습니다. 바다를 보면서 백사장에서 뒹군 수고를 인정해 x3의 씨앗을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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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최초로 야외플을 한 덕에 3개의 씨앗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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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습니다. 이게 최선인가요? 야외고 날개가 있는데 말이죠…. 더 힘내실 거라 믿겠습니다. 시스템의 독려로 x2의 씨앗을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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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분발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독려 차원에서 2개의 씨앗을 획득했다.
마지막 메시지를 본 실비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날아다니는 건 사양이라고. 하지만 좀 많이 흥분하게 된다면 혹시 모르지. 색다른 플레이를 시도하게 될 수도….’
그리고 나머지 두 번의 섹스는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기에 각각 2개의 씨앗을 획득, 총 9개를 획득했다. 시스템을 완전히 끈 그녀의 눈이 하늘로 향했다. 조금씩 날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곧 저녁 시간이었다. 슬슬 배도 출출하고 말이지.
실비아는 인벤토리를 잠시 열어 <장어구이 밀키트>를 확인했다. 세비스에게 장어구이를 만들어 먹이면서 노엘 님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에 대해서 권유해 볼 생각이었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실, 싫을 이유가 없지 않나? 언제까지 몰래 부정수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참에 이사를 하는 게 나을 터였다.
집 앞 야채 가게에 들러 생강 채와 깻잎을 구매한 실비아는 룰루랄라 아파트 안으로 향했다. 검은 봉지를 흔들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잠시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어우, 읍….”
아까 마차 창문으로 힐끗 봤음에도 불구하고 몰골이 사뭇 적응이 안 됐다. 검은 살균 투구를 쓴 데다가 목부터 가슴까지 붕대를 감은 탓에 무척 수상한 사람으로 보인다고나 할까. 거기다가 점점이 튄 핏자국까지.
‘꼴이 말이 아니네. 아까 그만큼 피를 흘렸으면 현실에선 벌써 병원행이었을 것 같은데, 게임 세계라서 그런가. 붕대로 감기만 해도 바로 지혈이 되는 건 참 신기해.’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실비아네 층수에 도착했다. 그녀는 룰루랄라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집 앞에 도착했다. 손을 탁탁 털고 비밀번호를 누른 그녀는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조금씩 어둑해져 가는 거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리고 바로 보이는 와장창 다 깨져버린 베란다 창문, 깨진 창문 구멍 사이로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휴우. 겨울이 아니기에 망정이지.’
불을 켤까 말까 고민하던 그녀는 스탠드 등만 하나 켠 뒤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실에는 세비스가 없었다. 집에 있었다면 베란다 창문 깨지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어디 나간 모양이었다. 아니면….
실비아는 신발장을 확인했다. 세비스의 신발이 다 있는 걸 보니 그는 방에서 자는 모양이었다. 맨발로 나간 게 아닌 이상 확실했다.
‘깨워서 장어구이를 먹자고 해야겠네. 앗, 잠깐,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어.’
실비아는 거울로 제 몰골을 확인하곤 키득거렸다. 붕대를 한데다가 살균 투구까지 쓴 그녀의 모습은 어두운 방에선 얼핏 귀신처럼 보일 것도 같았다. 세비스가 잠결에 그런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서 자지러진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재미난지. 상상만 해도 벌써 일주일은 심심하지 않을 것 같은 장난에 실비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