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실비아는 게임 공략을 성공하면 천국으로 갈 몸. 계속 이 세계에 있지 않을 테니, 그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보통 사람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오랜 삶을 사는 블루에게는 실비아의 거짓말이 더 치명적일 터였다. 인간세계의 부부랑 달리 반려란 게 영혼이 연결되는 거라면, 그녀가 사라진 후에 오랜 세월 고통받을 테니까.
결국 그녀는 늘 하듯이 얼렁뚱땅 미루기를 시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본의 아니게 점점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어가는 것 같네.’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실비아는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일단 육지로 건너가서 얘기하는 건 어떨까. 바닷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눈도 따갑고 좀 그래.”
“여기서 말 못 할 이유가 뭐야.”
불만 어린 목소리가 돌아왔다. 다시 불안정해진 착석감에 실비아가 티 안 나게 이를 악물었다.
‘아우, 이거 바다에 빠질까 봐 불안해서 살겠냐고. 우선 어디 내려가서 설득하는 게 낫겠는데.’
불안하게 할 의도는 없겠지만, 애매하게 답할 때마다 그녀를 안고 있는 손의 힘이 빠지는 게 좀 그랬다.
“멀미! 너무 흔드니까 멀미 날 것 같아.”
“멀미?”
“막, 토 나올 것 같다고. 인간의 몸은 네 생각보다 많이 나약해.”
실비아가 웩, 하면서 토하는 시늉을 하자 블루가 화들짝 놀라더니 날갯짓을 빠르게 했다. 드디어 오도 가도 못 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벗어나는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괜히 어지러운 척 머리를 흔들었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한참 때렸을까, 날개를 빠르게 펄럭거리며 날아간 블루는 어느 순간 속도를 늦추더니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실비아, 이제 육지에 다 왔으니까 조금만 참아.”
“으응….”
걱정하는 블루의 모습에 실비아는 괜히 죄책감을 가지며 말끝을 흐렸다.
얼마 가지 않아 며칠 전 들렀던 바닷가 마을이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블루는 방향을 틀어 마을 바깥의 한적한 해안가로 내려갔다. 바짝 마른 하얀 모래가 있는 백사장은 인적이 드문 마을 외곽에 있었기에, 다행히 블루를 보고 놀라는 이가 없었다. 야자수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있는 백사장을 날아다니던 블루는 그늘진 자리를 찾아 착지했다.
“휴우!”
블루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야자수 나무 아래에 내려 주었다. 무사히 바닥에 엉덩이를 댄 실비아는 안심한 듯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로 멀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바다 위에서 중요한 대화를 나눴던지라 심리적 압박이 상당했다. 새하얗게 질린 작은 얼굴을 안쓰럽게 보던 블루는 이공간에서 폭신한 방석을 불러냈다.
“실비아, 너 몸이 은근히 약하구나. 자, 여기 방석. 모래 위에 바로 앉으면 몸 더 상해.”
“고마워, 블루야.”
실비아가 방석에 엉덩이를 옮기자 블루도 옆에 와 앉았다. 그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바다 풍경을 감상했다. 하얀 백사장을 투명하고 반짝이는 파도가 덮쳤다가, 진한 그림자를 남긴 채 스르륵 물러나는 장면이 평화로웠다.
실비아는 힐끗 블루의 옆모습을 보았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풍경만 감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입술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걸 보아하니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방금의 하다 만 대화 때문이겠지.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걸까?’
대화를 피한다고 해서 능사는 아닌 법이다. 실비아는 머릿속으로 차분하게 할 말을 정리했다. 그러곤 블루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자 그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블루야.”
“응?”
“아까 네가 한 말, 진지하게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으응….”
초록색 눈에 담긴 본 적 없는 진지함에 블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절의 말일 거라 짐작하고 미리 절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귀염둥이에게 어떻게 거절의 말을 내뱉겠어! 실비아는 손바닥에 닿는 따뜻한 손등을 좀 더 꼼꼼히 감싼 뒤 말을 이어갔다.
“반려 있잖아.”
“응….”
블루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더니 고개를 푹 내렸다. 긴 하늘색 머리가 그의 얼굴을 가려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반려 말고…. 휴.”
“어, 반려 말고…?”
되묻는 말에 힘이 없었다. 거기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까지. 대답을 조금만 잘못했다간 혼자서 땅굴까지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실비아는 얼른 남은 말을 한숨 쉬듯이 다 뱉어내 버렸다. 적절한 말을 생각하느라 혼났다.
“반의반의 반려는 안 될까.”
“그래, 반의반의…어? 반의반의 반려?”
블루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실비아를 바라봤는데, 표정을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한 것 같았다. 당연히 이해 못 하겠지. 실비아가 방금 지어낸 단어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모르는 단어인 것 같은데. 반의반의 반려라니?”
“응.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기엔 아직 우리가 알아간 시간이 부족하잖아. 좀 더 천천히 알아가 보자는 의미에서 제안하는 거야. 반의반의 반…려.”
실비아가 이를 악물었다. 반의반의 반려라니. 막상 말하고 보니 말장난 같기도 하고 좀 그랬다. 하지만 말이란 게 화자의 의도만 명확히 전달할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녀는 나름 진지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한번 잤다고 반려가 되어달라는 건 너무 앞서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블루는 한없이 진지하겠지만 실비아의 생각은 그러했다. 여기 애들은 왜 하나같이 빠른 건지.
‘이 세계는 한 번 자면 책임져야 하는 걸까? 진짜 이 게임,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따먹기는 다섯 명을 다 따먹으라고 해놓고 책임을 또 다섯 명을 다 지라고? 뭘 어떻게? 첩첩산중이다, 정말.’
실비아는 속으로 게임의 모순을 욕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현실이랑 비슷한 게 많은 게임 세계는 애석하게도 정조 관념만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19금 뽕빨 게임이 이상하다 했다. 남주는 물론이고 지나가는 문신 뚱땡이나 멸치, 그 외 등등 실비아한테 먼저 추파를 던지는 이가 전무하지 않았나. 아무리 봐도 빙의한 몸은 매력이 넘치는 것 같은데도 말이다.
자신에게 거는 추파뿐만 아니었다. 게임을 하는 두 달간 다른 남녀의 스킨십을 목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바닷가 마을부터 수도까지, 한밤중에 돌아다녀도 난잡하게 구는 커플을 한 번도 못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던 건데….
‘이 게임은 등급만 19금이지, 전체연령가로 바꿔도 문제가 없겠어. 하나같이 철벽남에 자고 나면 바로 책임지라고 하는 것까지 너무 건전하잖아.’
범죄 직전까지 가는 말 못 할 난잡한 19금 게임만 플레이했던 실비아로서는 너무 바른 세계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저기 잡혀가서 이것저것 당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크흠, 정말 바라는 건 아니었다.
블루는 그녀의 말이 언뜻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의반의 반려라니. 천천히 알아가 보자는 의미라고?”
“으응. 음, 그런 거랑 똑같은 거야. 맞아! 인턴 있잖아. 내가 엘리셔스 월드에서 했던 인턴. 그거랑 똑같은 거야.”
“아?”
감색 눈이 위로 향했다. 그 인턴이랑 반의반의 반려랑 무슨 상관인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실비아의 관자놀이에 땀이 흘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면, 그냥 대놓고 천천히 알아가 보자고 말하면 블루가 실망하며 삐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말하면 대충 좋은 뜻인 줄 알겠지. 좀 양심에 찔리지만, 난 나태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아….’
실비아는 블루의 어깨를 토닥이며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래, 인턴. 물개 노릇하면서 이것저것 좀 들었다고 했지? 엘리셔스 인턴 그거, 다들 하려고 난리거든. 면접 때 너도 봐서 알잖아. 내가 합격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이야.”
“응, 그랬지…?”
블루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실비아가 신이 나서 말을 더 얹었다.
“그러니까! 반의반의 반려가 그런 거랑 비슷한 거라니깐. 인턴! 나는 지금 반려 인턴을 하겠다고 말하는 거야.”
“어어…?”
블루가 뭔가 맘에 안 드는지 팔짱을 꼈다. 초조해진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계속 말을 내뱉었다.
“엘리셔스 월드 인턴은 수도 젊은이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선망의 일자리라고! 경험 한 번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경력이 되지. 으음, 하여튼 반려 인턴이 그거랑 비슷한 거라고 보면 돼. 어느 정도 서로가 잘 맞는지 한동안 검증해보는 기간을 가지자는 거지. 어때?”
자신이 생각해도 개소리다 싶긴 했지만, 한번 술술 나온 헛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반의반의 반려에서 반려 인턴 얘기까지 신나게 떠들고 나니 블루의 표정이 묘해졌다. 가만히 실비아 말을 되새겨보니 긍정의 뜻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거절도 아닌 것 같으니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였다.
‘실비아의 반응을 보니 내가 좀 성급했구나. 꼭 이렇게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블루의 입에서 조그만 한숨이 흘러나왔다. 얼렁뚱땅 잠자리를 했으니 지금이라도 확실히 관계를 정의해야 할 것 같아 꺼낸 말이었는데, 그녀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마도 제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돌려 말한 모양인데, 그게 되려 상처가 됐다.
블루는 가만히 수평선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바짝 마른 백사장을 손가락으로 그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돌려 말하지 않아도 돼.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설마, 그 말을 들으면 내가 너무 좋다고 기뻐할 줄 알았어?”
“어? 아…. 아니.”
실비아는 어색하게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리곤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라리 진지하게 말할걸, 괜히 헛소리하는 바람에 블루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 같았다. 물개 시절의 뭣 모르는 블루가 아니라, 이제는 말귀를 잘 알아먹는 나름 능력남 키워드를 가진 블루란 걸 잠시 까먹은 게 문제였다.
힐끗 옆을 돌아보니 블루는 여전히 백사장을 손가락으로 파며 침묵하고 있었다. 손가락 힘이 어찌나 센지, 마른 모래임에도 불구하고 구덩이가 깊이 파여 깊숙이 숨어 있던 젖은 모래가 드러난 게 보였다.
실비아는 민망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신발을 벗고는 발가락으로 모래를 조금씩 움켜쥐며 장난쳤는데, 그 모습을 힐끗 본 블루가 갑자기 실비아의 엄지발가락을 잡아버렸다.
“뭐, 뭐야!”
실비아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니 블루가 옆눈으로 째려봤다. 저는 심란한데 장난이나 치는 실비아가 원망스러웠다.
“정신 사나우니까 하지 마.”
“아, 알았어.”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블루는 잡고 있던 실비아의 발가락을 아프지 않게 꼬집더니 트집을 잡았다.
“그리고, 네 발가락 못생겼어. 꼼지락거리니까 더 해.”
“참나…. 네 손가락도 모래 묻으니까 지저분해 보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