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혹시 나태 지옥에 대해서 아시나요?”
실비아의 질문에 거북이 수인의 실처럼 가늘게 뜬 눈이 순간 커다랗게 확장했다.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숨을 내쉬었다.
“후우, 당연히 알고 있지. 말했지 않나. 나는 모르는 게 없다고.”
“아! 그럼 혹시, 오염된 기운은 나태 지옥에서 오는 건가요?”
“일단 맞다고 해두겠네.”
그랬구나. 그동안의 의문이 풀렸다. 자신을 나태 지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오염된 기운으로 던전을 계속 만든 게 아닐까? 그러다가 자신이 던전을 계속 공략하니 방해할 생각으로 가짜 케이크나 해골바가지가 왔었던 거겠지. 그리고 루카의 형도 계속 나타나고 말이다.
거북이 수인은 뭔가 깨달은 듯한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수정과로 목을 축였다.
“나태 지옥은 자네의 앞길에 걸림돌인 셈인 거지.”
“아, 그렇죠. 걸림돌…. 맞아요.”
그것만 아니었어도 지금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지옥에 안 가려고 이렇게 밤낮으로 코피 흘려가며 고생하는 것이 아닌가. 거북이 수인은 그러나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앞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걸림돌이 아닐 수도 있다네.”
“네?”
“그건 이 길의 끝에 다다르면 다 알게 되겠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에 실비아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녀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걸림돌인지 아닌지를 퇴치할 방법은 없을까요?”
“흠, 퇴치라. ‘물리친다’란 표현은 안 맞을 거야. 살아 있는 존재들이 아니니까. 자네가 묻고자 하는 건 앞길에 방해가 안 되게 조치할 수 없냐는 말이겠지? 그건 하던 대로만 하면 되네. 지금 마음가짐 그대로, 하던 대로 한다면 끝에 가서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걸세.”
온통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실비아는 불만이 치밀었지만, 일단 얌전히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어찌 됐든 핵심만 요약하면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단 소리 아닌가. 저는 지금 세상 열심히 살고 있고 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이대로만 하면 될 터였다.
거북이 수인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마루에 기대 놨던 지팡이를 짚으며 실비아를 응시했다.
“자, 원하는 건 다 얻은 것 같으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일세.”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복잡했던 머리가 좀 맑아졌어요.”
실비아가 환하게 미소 짓자 거북이 수인이 손녀 배웅하는 할아버지처럼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던 대로만 하게.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럼….”
거북이 수인이 지팡이로 땅을 팡-하고 치는 순간 실비아의 눈앞이 흐려졌다.
잠시 뒤, 다시 선명해지는 시야에 말똥말똥한 감색 눈이 담겼다. 그녀가 이동한 곳은 아까의 가파른 계단이 아닌 방의 입구였다. 블루는 그곳에서 대기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실비아를 보고 황급히 부축한 것이다.
“실비아, 거북이 수인을 만났어?”
“어어. 블루구나. 만났어.”
실비아는 잠시 비틀거리며 대답했다. 근데 블루의 표정이 살짝 이상했다. 그리고 왠지 묘하게 어색한 공기의 흐름….
“실비아, 오늘 며칠인지 알아?”
“응?”
“네가 거기 들어간 뒤로 이틀이 지났어. 아버지한테 거북이 수인의 전설 얘기를 들은 게 아니었다면 큰일 난 줄 알고 널 찾아다녔을 거야.”
블루의 말을 들은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속고만 살았냐면서 안심하라고 하지 않았었나? 실비아는 거북이 수인이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러다가 걸리는 말이 하나 떠올랐다.
‘그 정도로 세월이 흐를 리가 있겠어?’
설마 그 말이 도끼가 썩을 정도로 세월이 흐르는 건 아니지만, 이틀 정도는 가져가겠다는 뜻이었나. 실비아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역시 망할 놈의 게임 세계. 사기꾼들이 판을 치는구나.’
기가 막히지만 어쩌겠나. 하긴, 고작 <곱창볶음 밀키트> 하나로 당장의 걱정을 미뤄줄 리가 없었다.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시스템 창을 켜 날짜를 확인했다. 블루의 말대로 이틀이 흘러 게임 67일 차 목요일이었다.
‘이틀이 흐른 게 맞구나. 나야 거기 들어가서 아무렇지 않다 쳐도, 블루 얘는 어떻게 여기서 이틀을 버텼지?’
시스템 창을 끈 실비아는 블루의 손을 잡으며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멀쩡해 보였다.
“여기서 어떻게 이틀이나 기다렸어? 심해왕국에 있다가 오지. 이렇게 시간이 지날 줄도 모르고 괜히 기다리게 했네.”
“괜찮아. 이공간에 먹을 것도 저장해놨고, 목걸이로 씻었고. 잠이야 그냥 옷 깔고 바닥에서 자면 되니까.”
다행히 블루는 벼락 왕자라서 그런지 노숙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안심한 실비아는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어디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잡초 같은 아이….’
그녀는 계단 쪽을 한 번 돌아본 뒤 문을 열었다. 어쩐지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블루는 뒤따라오며 물었다.
“원하는 건 얻었어?”
“응.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
당장의 걱정도 미뤘고, 명확하진 않지만 이대로만 하면 된다는 대답도 들었다. 이보다 좋을 수 있으랴. 편안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블루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손을 맞잡았다. 구멍을 빠져나가서 문지기를 피해서 요리조리…는 너무 길어지니까 생략하고, 그들은 완전히 구멍 밖으로 빠져나왔다.
실비아를 공주님처럼 단단히 안은 블루는 대륙을 향해 날았다. 올 때와는 달리 산책하듯 여유로운 비행이었다.
“실비아, 근데 있잖아.”
“응?”
실비아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블루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내가 선물해 준 건 안 해?”
“아!”
깜빡 잊고 있었다. 무려 어머니의 발찌를 선물해줬건만 차지 않고 넣어두다니. 블루는 공중에서 가만히 날개를 펄럭이며 실비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몸 여기저기를 더듬거리다 미니백 안에 발찌를 넣어뒀단 걸 떠올린 실비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블루야. 미니백 안에 발찌가 있어. 땅에 내려가면 찰게.”
“그래? 그럼….”
블루는 곧바로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갈색 앞머리를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이 살랑이고 지나갔다. 블루의 손이 닿지 않은 엉덩이도 함께 시원해졌다. 실비아는 망망대해를 힐끗 내려다보며 속으로 불안에 떨었다.
‘왜 저렇게 뜸을 들인담. 전에 못다 한 얘기를 하려는 것 같긴 한데, 그럼 내려가서 하면 좋겠는데. 대답 여하에 따라서 저 칠흑 같은 바닷속으로 던져지는 건 아니겠지.’
많은 죽음을 안겨준 블루였기에 안심할 수가 없었다. 실비아는 괜히 그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블루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하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럼 우리 이제 친구가 아니라 좀 더…. 음, 좀 더 깊은 사이가 되는 거야?”
“어? 좀 더 깊은… 사이?”
실비아의 되물음에 감색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조그만 머리통이 바쁘게 굴러갔다. 드래곤 종족에겐 ‘애인’처럼 관계를 정의하는 단어가 없는 걸까? 그렇다면 이거 해볼 만할지도. 뭘 해볼 만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실비아의 속이 순간 시커메졌다.
그러나 블루의 입에서는 기대를 깨트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응. 반려? 반려라고 해야 하나…. 실비아는 이제 내 반려가 되는 거야.”
블루는 자기가 한 말이 꽤 쑥스러웠는지 조그맣게 꺄르르 웃더니 어깨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실비아를 받치고 있던 손에도 힘이 풀렸다. 불안정한 착석감에 실비아가 ‘어어’ 하면서 단단한 몸에 바짝 붙었다. 그 몸짓을 잘못 해석한 블루는 그녀를 안은 손을 단단히 옥죄며 정수리에 뺨을 비볐다.
“너무 좋아. 실비아, 내 반려가 되어주다니.”
“자, 잠깐. 그 반려란 게 정확히 어떤 건데?”
고질병인 ‘모른 척 병’이 또 도진 실비아가 애써 순진한 얼굴을 하며 묻자, 블루가 냉큼 대답했다.
“인간세계의 부부보다 좀 더 특별한 거야. 법적으로만 연결된 게 아니라 영혼으로 연결된 사이지. 조금 특이한 의식을 거쳐야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내 반려가 되는 순간부터 난 너의 감정을 멀리서도 느낄 수가 있게 돼. 서로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거지.”
괜히 물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구체적인 대답이 돌아오자 실비아의 조막만 한 손에 진땀이 흘렀다. 참, 반려란 게 정말 멋있고 의미 깊은 사이가 맞긴 한데…. 안타깝게도 게임 공략을 해야만 하는 그녀는 블루의 기대에 부응할 수가 없었다.
이걸 어쩐담? 별수 있나, 나중에 결정하자고 미루면 되지. 그녀는 괜히 블루의 옷자락에 땀을 몰래 닦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난 생각도 못 한….”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아직은 이르다는….”
실비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머리 위에서 깊은 한숨이 울려 퍼졌다.
“이럴 수가. 너무해 실비아. 내 처음을 가져가 놓고….”
블루가 실망한 듯 힘없이 눈썹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실비아를 안고 있는 손에도 힘이 빠졌다.
처음을 가져갔다니,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니, 뭐 서로 즐겼잖아! 그럼 된 거 아냐? 라고 쓰레기같이 대꾸하기엔 그녀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놨던 양심이 마구 따끔거렸다.
일단 양심이란 것도 살아야 챙길 수 있는 법. 옆으로 흐르려는 느슨한 팔을 손을 뒤로 뻗어 단단히 제 몸에 붙인 실비아는 바다에 빠질까 봐,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황급히 블루를 달랬다.
“어우. 블루야. 바다 위에서 말하기엔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소리지.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누가 듣다가 말라고 가르치디? 얘가 성급한 면이 있네!”
“아?”
힘없이 처졌던 어깨가 다시 올라가고 감색 눈에 밝은 빛이 돌아왔다.
실비아는 일단 블로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얘가 갑자기 자신을 놓쳐도 살아남으려면 목을 구명줄처럼 꼭 잡고 있어야겠다 싶었다.
‘휴우, 역시 일부터 치르길 잘했어. 괜히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할 순 없잖아.’
블루는 이제 노쇠한 드래곤의 황혼 여행을 위해 통역 가이드를 해 주기로 했으므로 실비아와 자주 만나지 못할 터였다. 그녀 외의 다른 인간과 연이 없으므로 소문날 일도 없었다. 그러니 생활반경에 자주 나타나지 않는 블루에게 반려가 되어주겠다고 감언이설을 해도 되는 거지만….
‘그건 너무 나쁘잖아. 그래도 나름 지옥에 안 가려고 하는 게임 공략인데, 지옥에 떨어질 악마 짓을 하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