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미친놈은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다. 납득한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블루가 그녀의 몸을 고쳐 안으며 시선을 올렸다.
“다시 올라갈게. 나침반 잘 보고 알려줘.”
“응.”
돌벽에 꽂았던 발을 뽑아낸 블루는 이번엔 부드럽게 비행을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당장은 문지기가 보이지 않았다. 실비아는 얼른 수직으로 세운 나침반을 살폈고, 계속 위를 가리키던 나침반이 빙글-하고 도는 지점에서 블루의 팔을 급하게 두드렸다.
“멈춰! 여긴가 봐.”
블루가 제자리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동안 실비아는 나침반을 눕혔다. 바늘은 한 바퀴 빙글 돌더니 그들의 뒤를 가리켰다. 그녀가 뒤에 길이 있나 보다라고 블루에게 말하려는 순간, 멀리서 문지기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비아는 잔뜩 쫀 채 블루의 옷깃을 잡았다. 블루도 심각한 표정이 된 채 위를 바라보았다.
“헉, 문지기가 우리를 알아차렸나 봐. 블루야. 뒤로! 나침반이 뒤쪽을 가리켰어.”
“응. 꽉 잡아.”
다급하게 속삭인 실비아는 무섭게 다가오는 문지기를 보며 가까스로 비명을 삼켰다. 큰 소리를 내면 문지기가 더 빠르게 내려올지도 몰랐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내려오는 걸 보니 냄새는 맡은 모양인데, 블루와 실비아의 덩치가 그에 비해 워낙 작으니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조만간 따라잡힐 거리였기에 블루는 빠른 속도로 뒤쪽 돌벽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곧 곤란한 표정이 됐다.
“…문이 있는데?”
문을 열어야 한다니, 시선을 들자 지척까지 다가온 문지기가 보였다. 일단 대화할 시간도 없었기에 실비아는 다급하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러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던전에서 얻은 <방충망 텐트>를 꺼내서 활짝 펼친 뒤 던졌다.
“끼엑!”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문지기는 실비아네보다 좀 더 커다란 크기의 <방충만 텐트>를 따라서 급하강했다. 실비아가 물건을 던져 문지기의 주의를 끄는 사이에 블루는 눈을 가늘게 떠 주변을 살폈다. 실비아를 톡톡 두드린 그는 반대편 돌벽을 가리켰다.
“저기에 레버가 있네. 던전에서 레버를 당겨서 물의 흐름을 바꿨었잖아. 이 문도 레버를 당기면 열리는 것 아닐까?”
블루는 문지기가 사라진 방향을 힐끗대며 빠르게 반대편으로 날았다. 그의 말대로 레버가 있었다. 낑낑대며 레버를 당기자 예상대로 반대편의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오! 네 말이 맞네. 엇?! 문지기가 다시 올라오고 있어.”
허탕친 걸 알아챈 문지기가 뒤늦게 그들을 향해 다시 날아오르고 있었다. 문지기는 화가 잔뜩 난 듯, 아까보다 더 듣기 싫은 괴성을 질러댔다. 반대편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맞닥트릴 위기에 처했다. 실비아는 진땀을 흘리며 블루에게 물었다.
“저 문지기랑 너랑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
“모르겠어…. 아버지 말로는 문지기는 불사래.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 마나로 만든 존재니 건드리지 말고 피하라고 하셨어. 그게 아니라도 왕국을 지키는 존재인데 아무리 미치광이라도 함부로 상처를 낼 순 없지. 온다!”
“어우, 아까처럼 뭐라도 던져야겠어!”
실비아는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블루도 급히 이공간을 뒤적거려 건조대를 꺼냈다. 저번에 카디날 피쉬를 말리려다가 아쉽게 접어둔 그 건조대였다. 그러나 문지기는 건조대를 던지자마자 입에 물고는 질겅질겅 껌처럼 씹어 꾸긴 뒤 공중으로 던졌다. 쇠공이 되어 돌아온 건조대를 보며 당황할 틈도 없이 실비아는 인벤토리에 있던 <이모티탄>을 꺼냈다.
‘그래, 쓸모없는 아이템을 산 건 이때를 위해서야.’
<이모티탄>은 소리가 큰 데다가 커다랗게 표정을 만들어낸다. 이거라면 문지기의 주의를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실비아가 <이모티탄>을 하늘 높이 쏘아 올리자, 펑펑-소리와 함께 커다랗게 웃는 얼굴이 공중을 수놓았다. 천만다행으로 문지기는 실비아네보다 훨씬 커다란 <이모티탄>에 정신이 팔렸다. 위로 빠르게 올라가는 커다란 몸뚱이를 보며 블루가 급하게 열린 문 쪽으로 날아갔고, 그들은 무사히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스릉- 소리와 함께 돌문이 닫히고 밖에선 그들을 놓친 문지기의 괴성이 한참 울려 퍼졌다.
“어우, 무사히 들어왔네. 역시 세상에 쓸모없는 아이템은 없다니깐.”
“휴, 문지기랑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피를 흘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와서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블루 몰래 시스템을 불러 게임을 저장했다. 이제 <심해에 잠긴 도시>의 공략이 무사히 끝났고 문지기의 추격도 따돌렸으니, 세이브를 할 시점이었다.
‘여기서 죽으면 허무하니까, 무조건 세이브를 해야지, 암.’
시스템을 끄고 난 뒤 둘의 시선이 안쪽으로 향했다. 거북이 수인에게 향하는 길은 마나로 붉을 밝힌 횃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있어 어둡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길을 말 없이 걸어가던 둘은 또다시 굳게 닫힌 문과 만났다.
“또 문이네.”
“그러게. 이번에도 레버를 당겨야 하나?”
실비아와 블루는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이번에는 레버가 보이지 않았다. 지나왔던 길을 떠올려봐도 레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눈썹을 꿈틀대던 블루는 혹시나 그냥 열리는 문인가 싶어서 손잡이에 손을 댔다. 그러나 그가 안간힘을 써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힘은 웬만한 종족의 힘을 상회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음, 역시 그냥 열리는 문은 아닌가 보네.”
“그래?”
옆에서 지켜보던 실비아는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문에 손을 댔다. 그녀의 손이 문에 닿자마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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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레벨을 이룩한 성스러운 이여. 출입을 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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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69레벨이 나름 의미가 있었던 게로군.’
실소가 지어지는 메시지에 실비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메시지가 사라지며 스릉-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메시지를 보지 못하는 블루는 감탄사를 흘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아무리 힘을 줘도 열 수가 없었는데? 네가 손을 대자마자 문이 열린 것 같아!”
“크흠, 내가 좀 비범해야 말이지. 보통 사람은 아니야, 내가. 몰랐어?”
실비아가 거드름을 잔뜩 피우며 묻자 블루가 그녀를 추켜세웠다.
“알긴 알았지만, 진짜 비범하다! 비범한 실비아!”
“후후, 이 몸이 문을 열었으니 이제 들어가자고.”
실비아가 앞장서자 블루가 그런 그녀를 뒤따라갔다. 실비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당한 걸음걸이로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지나온 길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환한 빛이 그녀의 눈을 강타했다. 자연스러운 빛이 아니라 마법으로 만든 빛인 걸까? 문밖으로는 한치의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건만 이상한 일이었다.
“아우! 내 눈.”
실비아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 쥐었다. 블루는 미리 눈을 가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실비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비범한 실비아 덕에 소중한 눈을 지켰어.”
“그래. 좋겠구나.”
실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눈두덩을 눌렀다. 잠시 진정하고 나자 흐려졌던 시야가 밝아졌다. 레드카펫이 깔린 방의 끝에는 계단이 있었고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텅 빈 복도를 걸을 때마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들은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은 뒤 계단을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갔을까, 계단은 점점 가팔라졌고, 혹시나 떨어질까 잔뜩 쫀 실비아는 엉금엉금 사지 보행을 하며 기어 올라갔다. 블루는 무섭진 않았지만, 실비아를 따라 하고 싶어서 같이 기어 올라갔다.
계단의 끝에 다다르니 거북이 석상을 건드렸을 때 울려 퍼졌던 위엄있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왔느냐. 신에게 선택받은 이여.”
“…저 말씀 하시는 것 맞죠?”
실비아는 확인차 되물었다. 혹시나 드래곤인 블루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으니까. 잠시간의 침묵 뒤에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렇다. 동행자는 거기 잠시 있고 그대만 위로 올라오거라.”
“그렇대. 블루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실비아는 안심하라는 듯 블루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는 살짝 불안한 눈치였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에서 기다리겠단 의미였다.
침을 꿀꺽 삼킨 실비아는 위로 더 기어 올라갔다. 위로 올라갈수록 눈 부신 빛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더니, 곧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조금 무서워진 실비아는 오돌오돌 떨다가 다시 용기를 내 위로 향했다.
‘좀 무서운데, 하지만 난 이 게임의 플레이어니까 큰일 나진 않을 거야. …아마도.’
한 계단을 더 올라간 순간 그녀의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잠시 후 다시 밝아졌다. 계단은 온데간데없고 흰 모래사장과 잔잔한 파도가 치는 한가로운 해변가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으려니 등 뒤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이 선택한 이, 실비아, 어서 오게나.”
“아이고, 깜짝…. 안녕하세요.”
화들짝 놀란 실비아는 바로 진정하고 예의를 차렸다. 직립보행을 하는 거북이가 ‘배추도사 X도사’에 나올 것 같은 도사 옷을 입은 채 지팡이를 짚고 뒤에 서 있었다. 어이없게도 옷 바깥에 거북이 등껍질이 있었고 턱에는 희고 긴 수염도 멋들어지게 붙어 있었다. 실비아는 겉으론 예의 바르게 굴면서도 속으로 잡생각을 했다.
‘옷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기에 거북이 등껍질이 밖에 나와 있는 걸까? 등만 파여 있나?’
거북이 수인이 등이 파인 머메이드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속으로 잠시 키득거린 실비아는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팡-소리에 놀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