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그 순간, 실비아의 등허리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보나 마나 블루의 것이었다. 뜨겁고 단단한 감촉을 느낀 실비아는 방금의 서러움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가슴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역시, 블루는 나를 아주 좋아하니까 당연히 나한테 반응하겠지.
뿌듯한 미소를 짓던 그녀는 곧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긴 응접실이잖아. 이 공간은 블루와 실비아 말곤 아무도 없지만, 문밖에는 사용인이 대기하고 있을 것 아닌가.
‘어떡하지. 이런 곳에서 할 순 없는데.’
원래 한 번 직진하기 시작하면 노빠꾸인 실비아의 사전에 하지 않고 참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녀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려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커튼 뒤? 아니면 저기 옷걸이들 사이에 숨어서? 조그만 머리통에 든 음란한 생각을 꿈에도 모른 채, 블루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또 안고 싶어. 실비아, 느껴져? 너랑 닿으니까 내 아래가 엄청 커졌어.”
“아이, 몰라….”
블루 쪽으로 몸을 튼 실비아는 주먹으로 다부진 가슴팍을 콩콩 쳐대며 부끄러워했다. 블루는 곧 바지를 벗고 달려들 기세로 그런 실비아의 허리를 끈적하게 더듬었다. 허리에 있던 손이 슬금슬금 위로 올라와 봉긋한 가슴에 닿고 두 남녀의 입에서 뜨거운 호흡이 흘러나왔다.
확, 이대로 커튼 뒤에서 일을 쳐버려? 한창 불이 붙은 남녀를 누가 말리겠는가. 블루와 실비아의 눈이 응접실 내부를 훑었다. 실비아가 커튼 쪽으로 고갯짓하자 블루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응접실에서 섹스라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원래 눈깔이 뒤집히면 물불을 안 가리게 된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채 커튼 뒤로 숨기도 전에 쾅!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에그머니나!”
“헉.”
응큼한 마음을 먹고 있던 실비아는 크게 놀라 블루를 뿌리치고 소파에 황급히 앉았다.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던 블루도 그녀를 따라 소파에 날 듯이 착지했다. 뒤늦게 정신이 든 그들은 문 쪽을 바라봤다. 노크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무뢰한이 누군가 했더니, 다름 아닌 가재 수인이었다.
“아이고….”
그는 잡동사니와 함께 분재 도구를 들고 뒷걸음질로 들어오다가 뒤늦게 응접실 안에 왕자님과 일행이 있음을 알고 화들짝 놀라며 도구들을 다 떨어트렸다. 그는 널브러진 도구도 정리하지 못한 채 집게발을 모으고 사과했다.
“헙, 왕자님! 죄송합니다. 응접실에 있는 화분들을 관리하러 온 건데, 왕자님과 일행분이 계신 줄 모르고 그만!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크흠, 아, 아니다.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해야지.”
가재 수인의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블루가 손을 휘저으며 헛기침했다. 반대편 구석에 앉은 실비아는 민망함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붉혔다.
“네에….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일을 좀 해보겠습니다.”
가재 수인 탓인지 덕분인지 응접실에서 미친 짓거리를 하지 않게 됐다. 실비아와 블루는 서로를 힐끗대면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언제라도 누가 들어올 수 있는 응접실에서 섹스를 하려고 했다니, 정신 차리고 보니 심해왕국에서 떠나기도 전에 망신살 제대로 뻗칠 뻔했다.
‘그래.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휴우, 합체하다가 들어왔으면 빼도 박도 못하게 개망신을 당할 뻔했어.’
실비아와 블루가 각자 어색하게 눈빛을 주고받는 동안 가재 수인은 열심히 응접실의 화분들을 돌봤다. 한참 지나 가재 수인이 나가고 용왕이 뒤이어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는 소파 구석에 각자 찌그러져 있는 둘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여기들 있었군. 실비아 양, 이제 떠날 거라고 들었네만?”
“아아, 네. 용왕님. 덕분에 편하게 머물다 갑니다. 새 무기도 주셔서 앞으로도 던전 공략할 때 걱정이 없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용왕이 말을 걸자 실비아는 가슴에 손을 댄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멍하니 앉아있던 블루도 옷을 정리하며 일어났다.
“예. 이제 떠나려고요.”
“그래. 아들아. 내가 일러준 주소대로 찾아가면 될 거야. 혹시 헷갈리는 것 있으면 편지하고.”
용왕이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치자 공중에서 마치 푸른 불꽃이 일어나는 것처럼 편지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블루도 딱-소리 나게 손가락을 부딪치자 편지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실비아는 선망의 눈길로 두 사람의 손가락을 번갈아 쳐다봤다.
‘쩐다. 드래곤들끼리는 마법으로 편지를 보내는 건가? 나도 저런 게 있었으면…. 망치 전사가 아니라 마법사가 되면 오죽 좋았을까나. 잠깐, 그럼 전서구 퍼랭이를 구한 건 순전히 나 때문이었구나.’
퍼랭이가 없어도 블루는 최소한 드래곤들끼리는 마음껏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거였다. 부러워하던 실비아의 뇌리에 조그만 갈색 몸뚱이가 스쳐 지나갔다. 잊고 있던 참둘기의 잔상이었다.
맞아, 난 참둘기가 있었지. 집에서 기다릴 가엾은 것을 생각하며 실비아는 애써 부러움을 떨쳤다. 저런 마법이 생기면 참둘기가 실직새가 되고 그러면 절망한 참둘기는 부당해고로 베란다에서 1인 시위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참담한 꼴을 보게 되면 가슴 아파서 견딜 수 없을 터. 그러니 저런 마법은 없는 게 낫다… 암.
그런 신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블루가 그녀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강하게 휘감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대비할 틈도 안 주고 용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날아올랐다.
“아버지.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으앗! 안녕히 계세요!”
“잘 가거라!”
알현실처럼 응접실도 천장이 뻥 뚫려있었기에 둘은 금방 궁 밖으로 빠져나왔다. 공중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실비아를 고쳐 안은 블루는 마지막으로 심해왕국을 내려다보았다. 그와 함께 실비아도 조심스럽게 눈을 밑으로 내렸다. 그 순간 실비아의 눈앞에 웅장한 음악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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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 <심해에 잠긴 도시> 공략을 완료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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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3번째 던전을 무사히 끝냈구나. 씨앗 상자의 칸이 이제 두 개가 남았으니 메인 던전도 두 개가 남았으려나?’
마음속이 복잡했다. 즐거운 것도 잠시, 언젠간 이 게임의 끝에 도달할 것을 생각하니 심란해진 것이다. 씨앗 상자의 칸이 두 개가 남아 있으니 이제 반이나 온 셈, 이 길의 끝에는 밝은 천국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어두운 지옥일까, 그것도 아니면….
“실비아, 이제 거북이 수인을 찾아야 하잖아. 어디로 가면 되는 거지?”
“음, 구멍 한가운데에 가는 길이 있다고 했었어.”
“올 때 기억나? 문지기가 우리를 쫓아다녔잖아. 그놈 때문에 한가롭게 길을 찾아다닐 수가 없을 것 같아. 거북이 수인이 있는 곳이 어딘지 미리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맞네. 그 괴물이 있으면 길을 찾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괴성을 지르며 뒤쫓아오던 괴물 문지기를 떠올린 실비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템 덕에 실비아의 낯빛이 다시 밝아졌다.
“아, 나침반이 있었잖아. 들고 있는 이가 원하는 곳을 가리키는 나침반 말이야.”
인벤토리에서 급히 <신비한 나침반>을 꺼낸 실비아는 거북이 수인을 떠올렸다. 그러자 나침반의 바늘이 계속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게 아닌가. 거북이 석상의 말에 따르면 구멍 한가운데에 있는 길로 들어가면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했었지. 그 말을 떠올리며 나침반을 수직으로 세우자 바늘이 정확히 천장을 가리키며 멈췄다.
“봐봐. 이 나침반이 거북이 수인한테 통하는 길을 정확히 가리킬 거야. 괴물을 피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가보면….”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괴물을 피하면서 나침반을 정확히 보고 들어간다는 게 가능할까? 실비아의 자신감 없어 하는 모습에 블루가 받치고 있던 손으로 엉덩이를 톡톡 치며 독려했다.
“할 수 있어. 그리고 아버지께 물어봤었는데, 저 괴물은 좀 더 큰 목표물이 있으면 그걸 쫓아서 간대. 우리 몸집보다 큰 물건이 있으면 던져서 주의를 돌리면 될 것 같아.”
“오, 그래? 그럼 생각보다 할 만하겠는데.”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 중에 그런 게 있었던가? 최대한 값어치가 안 나가는 물건들 위주로 떠올리고 있는데, 블루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아래로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늘 하던 대로 강하게 도약해서 튀어 나가는 비행법을 쓸 모양이었다.
“이제 간다, 꽉 잡아.”
“으아아! 미리 말하고 출발해야지이!”
쾅-! 소리와 함께 절벽의 한 부분을 크게 디딘 블루는 튕기듯이 위로 솟아올랐다. 소스라치게 놀란 실비아는 탄탄한 가슴팍에 얼굴을 더 깊숙이 묻었다. 워낙 속도가 빠른지라 골이 마구 울렸다.
좁은 통로를 로켓처럼 날아간 블루는 구멍이 넓어지기 전 돌벽에 제 발을 무자비하게 박았다. 쾅, 소리와 함께 발이 꽂히고 블루는 수세미 머리가 된 실비아를 탈탈 흔들며 외쳤다.
“실비아! 정신 차려. 이제 문지기가 있는 구간으로 진입할 테니까.”
“어? 어어. 정신 차려야지.”
도리도리 세차게 고개를 흔든 실비아는 블루의 시선을 따라 위를 바라봤다. 다행히 덩치 큰 괴물 문지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 문지기는 아버지 말대로라면 바다 입구를 빙 둘러서 날아다니고 있을 거야. 그러니 바로 추격해오진 않을 확률이 높지. 그 전에 거북이 수인한테 가는 길을 찾으면 제일 좋지만…. 안 되면 살짝 고생을 해야 하고.”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블루의 말을 듣다 보니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한 것이다. 문지기라면 이미 안으로 무사히 들어갔다가 나오는 이까지 추격할 필요는 없지 않나? 딱히 출입증을 받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종족을 구분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근데 그 문지기는 왜 왕국에서 나오는 이까지 추격하는 거야? 구분법이 있지도 않은 것 같던데. 설마, 지나가는 이는 다 잡고 보는 거야?”
“아버지 말로는 그냥 미치광이래. 통로를 통과하려는 이는 다 잡아먹으려고 한다던데.”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