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아침부터 던전화 됐던 도시에서 지내던 수인들이 찾아와서 머물고 있단다. 보금자리야 빈집이 꽤 있어서 금방 해결해 줄 수 있지만, 일자리는 당장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네가 해결해 주기로 약조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할 거니.”
“네. 아버지. 안 그래도 어제 꼴뚜기 수인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래? 그럼 어떻게 할 건지 방법을 찾았느냐?”
용왕의 말에 블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자가 함께 걸음을 옮기자 실비아도 얼른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너도 구경하고 싶어?”
“엇?!”
뒤따라오는 실비아를 돌아본 블루는 눈꼬리를 둥글게 휘더니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곤 놀랄 새도 없이 날개를 활짝 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뒤를 따라 용왕도 함께 날개를 펴며 비행했다.
“아앗!”
“괜찮아.”
갑작스럽게 하늘을 나는 바람에 겁이 난 실비아가 안절부절못하자 블루가 자상하게 다독였다. 궁을 벗어난 그들은 빠르게 날아가 왕국의 변두리에 도착했다. 품에 안긴 실비아가 갑작스러운 비행에 헤롱헤롱하는 와중에, 급히 뒤따라온 꼴뚜기 수인에게 블루가 명령했다.
“왕궁을 찾아온 수인들을 여기로 데려와 줘.”
“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잡해양 생물 계모임원들이 급하게 변두리로 몰려왔다. 얼핏 보면 하늘처럼 보이는 심해왕국의 공중은 바다를 겸하고도 있었기에, 수인들은 모두 왕국의 하늘에서 헤엄치듯 비행해왔다. 급하게 오는지라 불시착해서 바닥을 뒹구는 수인도 더러 있었다.
“저희를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아이고, 왕자님!”
그들은 기대에 찬 눈길로 땅바닥인 것도 상관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불러 모았으니 뭔가를 보여줘야 할 텐데. 실비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변두리엔 사는 이 없어 보이는 빈집들이 즐비했다. 블루는 여기서 뭘 하려는 걸까?
블루는 옆구리에 실비아를 낀 채 용왕의 곁에 다가갔다.
“아버지, 아버지의 제안대로 제왕학을 배워볼까 싶습니다.”
“오! 잘 생각했구나. 대륙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여러 경험을 쌓고 차근차근 제왕학을 배우면 될 거야. 근데 그 이야긴 왜 지금…?”
실비아는 옆에서 영문을 모르고 어버버하고 있었다. 뭐야, 웬 제왕학? 블루가 이제 왕자님이 되는 걸 넘어 왕세자로 신분 상승하는 건가! 놀랄 틈도 없이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전 이제 이 나라의 차기 국왕이니까 새로운 궁이 필요해서요. 그래서…!”
“어어!”
“아이고!”
블루가 갑자기 드래곤으로 변했다. 품에 안겨있던 실비아는 졸지에 손바닥에 아담하게 담겼다. 용왕은 놀라지 않고 뒤로 물러났고, 수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용왕의 뒤에 숨었다.
드래곤이 된 블루는 괜히 실비아의 정수리를 한 번 혀로 핥는 변태 짓을 했다. 까끌하고 거대한 혀의 감촉에 실비아는 츄파츕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금만 더 혀에 힘을 주면 두피가 벗겨지는 것 아닌가 하는 무서움이 일었다.
“으으, 핥지 마. 머리 뚜껑 벗겨져!”
“괜찮아. 그런 일은 없어.”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은 블루는 실비아를 쥔 손을 가슴에 고이 모으더니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재밌는 구경 보여줄게.”
“무슨….”
실비아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블루가 고개를 들더니 빈집들을 향해 외쳤다.
『#[email protected]%%!』
용언이라서 알아들을 순 없지만 무척 웅장하게 들리는 주문을 외쳤는데, 짧은 주문과 함께 입에서 푸른 광선이 뿜어져 나와 주변 일대를 다 초토화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쾅!
아무리 빈집이라지만 엄연히 건축물인데, 그것들이 드래곤의 입에서 나온 레이저로 강제 철거되기 시작하자 수인들은 경악하며 뒤로 물러났다. 반면에 용왕은 뒷짐을 진 채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허허, 시원하게 잘 부수네. 이래야 내 아들이지.”
“뭐야, 세상에, 무슨 일이야.”
‘저게 뭐람!’
놀란 수인들처럼 실비아도 특등급 관람석인 블루의 손바닥 위에 앉은 채 소리도 못 지르고 경악했다. 게임에서 본 드래곤 브레스 같은 기술을 블루의 입 바로 밑에서 구경하는 영광스러운 날이 올 줄이야.
쾅, 콰쾅, 우지끈- 하는 여러 가지 화끈한 소리와 함께 제일 높은 건물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변두리 일대의 모든 건물을 다 부수고야 블루의 파괴 쇼는 끝났다.
“하하하!”
“뭐야, 무서워….”
자욱한 먼지와 함께 용왕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부서진 건물 잔해 사이로 울려 퍼졌다. 그 외에는 모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옹기종기 붙어서 덜덜 떨 뿐이었다.
모든 걸 무(無)로 되돌린 블루는 멍해져 있던 실비아를 땅에 내려 준 뒤 다시 인간화했다. 입가에 웃음을 매단 그는 얼이 빠진 실비아의 손을 잡고 용왕과 수인이 있는 곳으로 당당히 걸어왔다.
“이곳에 내가 머물 궁을 지을 계획이야. 그러려면 너희들의 손이 필요해.”
“네? 그 말뜻은….”
수인의 대표인 문어 수인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블루의 말이 이어졌다.
“쓸모없는 건물들은 내가 한방에 다 철거했지. 어때, 이제 일이 간단해졌으니 새로운 궁만 건축하면 될 거야. 너희들이 새로운 궁을 짓는 일꾼들이 되는 거지.”
“아! 그런 깊은 뜻이!”
“아이고, 왕자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 이 은혜를 어찌 갚을까요!”
건물을 다 때려 부순 블루의 깊은 뜻을 알아차린 수인들이 그제야 감동한 표정으로 연거푸 절을 했다.
일자리가 없으면 파괴해서 만들면 되는 것. 그는 쓰지 않는 건물들을 다 부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조했다. 그에 앞서 공포심을 조장하여, 장차 자신이 다스릴 왕국민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창조경제와 공포정치를 한꺼번에 해내는 훌륭한 제왕의 재목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읍하는 잡해양 생물 계모임원들을 뒤로하고 한참을 크게 웃은 용왕이 개운한 표정으로 블루를 응시했다.
“역시, 내 아들이야. 당장 국왕 자리를 물려줘도 되겠는걸?”
“아닙니다. 아직 배울 게 한참 남았는걸요.”
블루는 수인들이 근처에 있는 걸 의식하며 예의를 차려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부자들의 훈훈한 눈빛 대화가 오가고, 곁에 선 꼴뚜기 수인은 잡해양 생물 계모임원들의 이름을 두루마리에 적느라 정신없었다. 국가에 새로운 일자리가 대거 발생했으니 두루마리에 이를 기록하는 거였다.
블루의 파괴 쇼 덕에 잡해양 어쩌구들과 함께 다른 놀고 있는 날백수 수인들의 일자리도 한꺼번에 해결됐다. 기록을 마친 꼴뚜기 수인이 심란함 반 뿌듯함 반이 섞인 묘한 표정을 지으며 용왕에게 허리를 굽혔다.
“용왕님, 감축드립니다. 심해왕국의 일자리 문제가 왕자님 덕에 한꺼번에 해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놀고 있는 수인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잘된 일이로군.”
용왕은 전혀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 상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인들을 블루의 곁으로 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왕자님, 정말 이 은혜를 뭘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뭘 또 그래. 약속을 지켰을 뿐인걸.”
용궁에 온 뒤로 사회성이 생긴 블루가 점잔을 떠는데, 수인들 사이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저기, 어제 말씀하신 것을 구해왔는데, 적절한 물건인지 모르겠네요.”
“응? 어디 한번 가져와 봐.”
연거푸 감사 인사를 올리던 수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블루에게 다가와 감사를 표한 뒤, 바구니 하나를 내밀었다. 블루는 바구니를 받자마자 아까부터 플랑크톤이 드나드는 것도 모른 채 입을 벌리고 있던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충격적인 드래곤 파괴 쇼를 특등석에서 직관한 여파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임을 하며 별의별 꼴을 다 본 주제에 무슨 오버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드래곤 브레스를 지척에서 보면 이렇게 된다. 이런 건 수인 재해보험 약관 80조 10항에 의거 보상도 못 받는다고나 할까. 그러니 다들 드래곤 브레스를 직관할 때는 10미터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는 걸 명심하길 바란다.
하여튼, 실비아는 넋을 놓고 있다가 강렬한 블루의 눈빛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머리 위에 물음표를 달고 마주 보니 블루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블루가 어서 받으라는 듯 바구니를 흔들었다.
“이 바구니는 뭐야?”
“거북이 수인이 좋아하는 육지 물건을 구해야 했었잖아. 수인들한테 부탁한 걸 지금 받았어. 자, 받아.”
블루가 바구니를 그녀의 품 안에 고이 건넸다. 드래곤 브레스를 직관한 후유증에 흐리멍덩하던 초록색 눈이 서서히 밝아지더니 왕방울만 해졌다. 그녀는 입을 활짝 벌리며 펄쩍 뛰었다.
“와! 블루야, 너무 고마워. 세상에나, 맞아. 이게 있어야 하지!”
“네가 기뻐하니까 나도 기뻐.”
블루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실비아가 방방 뛰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함과 함께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살짝 붉었던 얼굴은 실비아의 이어지는 행동에 완전 홍당무가 됐다.
“고마워, 어머, 이럴 때가 아니지, 정말 고마워!”
“앗, 잠깐….”
실비아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블루를 격하게 포옹했다. 부비부비하면서 연거푸 점프해 쪽쪽 입맞춤을 날리자, 블루의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갔다. 격렬하게 기쁨을 표출하던 실비아는 뒤늦게 주변이 조용해진 걸 깨닫고 머쓱하게 물러났다.
슬쩍 눈치를 살피니 수인들이 애써 그들을 쳐다보지 않으려 눈을 돌리고 있는 게 보였다. 용왕은 팔짱을 낀 채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크흠, 흠흠. 바구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해볼까.”
머쓱하게 머리통을 긁적인 실비아가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뭐가 들었을까? 천을 걷어내자 비닐에 감싸인 무언가가 보였다. 손을 대보니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