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마치 한턱낸 친구에게 감사 인사 나누는 것 같은 이상한 대화가 잠시 오간 뒤, 실비아는 몸을 뒤로 물렸다. 이번에는 앞의 두 번이랑 달리 블루가 조심스럽게 움직인 덕에 별다른 후유증은 없었다. 살짝 아래가 얼얼하긴 했지만, 크기가 크기니만큼 어쩔 수 없는 일.
‘내 가운이 어디 갔지….’
실비아는 폐장하는 놀이동산 직원처럼 가운을 찾으며 주변을 정리했다. 구겨진 이불을 팡팡 두드리며 가운을 찾는 모습에 블루는 아쉬운 한숨을 흘리더니, 그녀를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헙! 뭐야. 깜짝 놀랐잖아.”
“우웅, 실비아아. 이렇게 끝낼 거야?”
하마터면 없는 애가 떨어질 뻔했다. 실비아가 십 년 감수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자, 블루가 눈썹 끝을 내리며 가엾은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는 실비아의 보드라운 뺨에 쪽쪽 소리 나게 뽀뽀하며 애원하듯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으응?”
“계속해도 된다며….”
실비아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약초도 받아먹었겠다, 연고도 있겠다 블루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곤란해하기도 잠시, 젖어있는 다리 사이로 손이 불쑥 들어오자 곧 입술 사이로 묘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창문가에 들리는 기룩 기룩- 소리를 견디다 못한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더니 초록색 눈이 드러났다. 초록색 눈엔 약간의 잠기운과 함께 짜증이 서려 있었다.
“이런 씨….”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실비아는 실눈 사이로 원망스러움을 담은 채 창문 쪽을 노려봤다. 참새가 살지 않는 심해왕국에선 갈매기가 아침을 알려주는 소리를 낸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다에서 날아다니는 갈매기 소리를 심해까지 전달하는 마법이 건물 어딘가에 걸려있는 게 틀림없었다.
모로 누운 실비아의 등 뒤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 블루가 그녀를 껴안은 채 단잠에 빠져있었다. 간간이 드래곤어로 ‘나도 줘, 쿠키.’, ‘실비아, 나랑도 놀아!’ 같은 말을 웅얼거리는 걸 보니 개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드래곤도 개꿈을 꾼다니, 블루의 아버지인 용왕이 예지몽 이야기를 하기에 이 종족은 쓸모 있는 꿈만 꾸는 줄 알았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아유, 귀여워라.’
실비아가 품속을 벗어나려고 살짝 몸을 비틀자 블루가 더 강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강하단 건 인간 기준에서가 아니라 드래곤 기준이라서, 순간 갈비뼈가 뒤틀리는 통증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다행히 무의식중에도 블루는 자기가 안고 있는 게 실비아인 걸 인식하고 있었기에 비극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갈비뼈 부근을 문지르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블루가 깨어날 때까지 누워있기로 했다. 몸이 보송보송한 걸 보니 그녀가 잠든 새에 블루가 목걸이로 씻어준 것 같았다. 살짝 몸을 흔들어 블루의 품속에서 팔을 꺼낸 실비아는 제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혹시나 상태 이상이 또 찾아왔나 싶어서였다. 손바닥에 걱정과 달리 매끈매끈한 피부가 닿자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멀쩡하네. 약초와 연고 덕분인가?’
역시 공부든 섹스든 체력관리가 중요하다. 이것저것 먹고 발라가며 섹스한 덕에 실비아의 몸은 멀쩡했다. 진작에 이렇게 할걸! 옛 조상들이 자고로 건강은 잃기 전에 지켜야 한다고 했지 않나!
그녀는 조그맣게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다가 아직 꿈나라 여행이 한창인 블루를 힐끗 뒤돌아본 뒤 시스템을 열었다. 이것저것 확인해 볼 것이 많았다.
‘자고 있는 틈에 확인해야지.’
기록 창을 열자 어제의 성과를 알리는 메시지들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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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를 공략하여 레벨 업을 했습니다. 분배 포인트를 분배하세요.]
[물속성 스킬 트리가 개방되었습니다.]
[<드래곤의 씨앗 조각> 12개 획득하였습니다.]
[블루를 공략하여 새로운 스킬 <모세의 조그만 기적>을 획득하셨습니다.]
[블루를 공략하여 새로운 아이템 <소금쟁이 운동화>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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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뭐가 많은데? 우선 첫 번째 메시지부터 확인해보자.’
입이 귀에 걸린 실비아는 우선 레벨이 얼마나 올라갔나 확인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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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레벨 65
망치 전사
가진 돈 : 17만G(림보 것 : 5만 골드)
체력 : 300 힘 : 300 지력 : 700 민첩 : 200
화술 : 310(+50)
업보 : 300
신앙심 : 5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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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도 : 50
세간의 평가 : <비범한 제국민1>
전투 스킬 : <뚝배기 깨기>, <1+1>, <정화의 망치>, <*손은 눈보다 빠르다>, <불망치>
생활 스킬 : <헛소리를 온 누리에 진지하게>, <*손은 눈보다 빠르다>, <아이고 내 배꼽 아재 개그>, new! <모세의 조그만 기적>, new! <마법의 물 주전자>
패시브 스킬 : <만독불침>, <기적을 일으키는 자>
축복 : 능력치 상승의 축복
[분배하지 않은 포인트가 100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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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상태 창을 켜자마자 그녀는 왁! 하고 소리칠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레벨이 6이나 올라가 있었다! 새로운 스킬과 아이템을 새로 얻은 것만 해도 너무 기뻤는데 레벨도 올라가다니. 레벨이 높은 현 상태에선 레벨 하나하나 올리기가 정말 쉽지 않았는데, 한꺼번에 이만큼이나 오르다니 엄청났다. 블루 공략이 역대급으로 데드 엔딩과 배드 엔딩을 많이 안겨준다 싶더니, 괜한 게 아니었구나.
‘블루를 공략하다가 데드 엔딩이랑 배드 엔딩을 몇 번 겪었더라…? 휴우,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어.’
상태 창을 천천히 내려보니 새로 획득한 스킬들이 추가된 게 보였다. <마법의 물 주전자>는 또 뭐지? 아마도 물속성 스킬 트리가 개방되면서 생긴 스킬인 모양이었다. 전투 스킬은 없고 생활 스킬만 새로 추가되다니, 그건 좀 아쉬웠다.
‘어떤 스킬인지 상세 설명을 볼까.’
우선 새로 획득한 첫 번째 스킬 명을 터치하자 상세 설명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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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조그만 기적
- 강이나 바다가 당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나요? 이젠 걱정 없습니다. 물을 가를 수 있는 이 기적의 스킬이 있으니까요. 아쉽게도 망망대해를 끝까지 가른다거나 하는 엄청난 일은 불가능합니다. 사소하게는 커피잔의 커피를 반으로 가르는 것부터 크게는 비 온 뒤 생성된 물웅덩이를 반으로 가르는 게 가능합니다. 이제 이 스킬만 있으면 당신은 커피를 티스푼 없이 휘저을 수 있습니다. 생활 스킬이며 지속시간은 2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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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상세 설명을 읽어내리던 실비아의 눈이 지속시간 2초에서 멈췄다. 2초 정도 가르는 걸로 뭘 하란 말인가? 갈라진 걸 확인하려고 눈만 돌려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올 지속력이었다.
‘거기다가 무슨, 커피랑 물웅덩이를 갈라? 이게 무슨 모세의 기적이야! 아니, 다시 보니 조그만 기적이구나. 에이, 시시해!’
잠시 실망했던 실비아는, 그러나 어딘가 쓸 데가 있겠지- 생각하며 상세 설명 창을 닫았다. 그리고 새로 획득한 두 번째 스킬의 상세 설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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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물 주전자
- 목이 마를 때, 이제는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이제 언제 어디서나 물 주전자를 불러내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됩니다. 수원지는 블루 드래곤 계곡이며 이상한 성분은 없으니 안심하고 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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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네. 전투하다 보면 목이 마르기도 하니까, 그리고 물값을 아끼는 효과도 있겠지.’
실비아네는 수돗물로 보리차를 끓여서 마시고 있었다. 이건 넉넉해진 형편에도 세비스가 부득불 우기는 절약 팁 중 하나였다. 직접 끓이지 않으면 물장수에게 물을 사서 마셔야 했으니까 말이다. 이제 물 주전자라는 스킬이 생겼으니 보리차를 끓이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언제나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을 터….
‘이제 당번을 정해서 보리차를 끓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마늘 빻는 망치도 생기고 여러 살림살이도 챙기고, 보리차를 안 끓여도 되는 물 주전자까지 생겼다. 여러모로 수확이 많은 던전이었다. 새로운 스킬의 상세 설명을 다 확인한 그녀는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는 분배 포인트가 100인 걸 확인하고 흐뭇해했다.
‘포인트가 언제 100이 됐지. 이런 기념적인 숫자가 되면 쓰고 싶은 충동으로 몸이 간질거린단 말이야…. 하지만 우선 참아야겠지. 우라엘 황태자를 공략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모르니까.’
블루의 품에 안긴 채 다음 공략 남주를 생각하는 건 너무 소시오패스 같았지만, 바쁜 역하렘 여주에게 양심 따위 챙길 여유는 없었다. 독기 가득하게 다음 남주를 떠올릴 수밖에.
우라엘 황태자의 상태 창은 아직 공략 불가라 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공략조건이 뭘까? 어떤 특별한 퀘스트가 있거나 아니면 또 다른 괴상망측한 조건일 수도 있었다. 블루 때처럼 스탯 중 하나를 채우는 조건일 수도 있고 말이다. 우선은 분배 포인트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한 그녀는 상태 창을 닫았다.
뒤를 힐끗 본 실비아는 아직 블루가 꿈나라인 걸 알고 안심했다. 하지만 깨어나게 되면 실비아가 허공을 휘젓는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터. 그녀는 낑낑거리며 몸을 돌려 블루를 바라보는 자세가 됐다.
이번에는 획득한 아이템과 씨앗을 살펴볼 차례였다. 인벤토리를 열자 붉은 씨앗과 레몬빛 씨앗 옆에 물빛 씨앗이 보였다. 모아서 보니까 수집해서 뿌듯한 마음 한편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잊고 있던 걱정도 함께 벼락처럼 머리에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