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응! 맘에 들어. 가볍고 예쁘고 딱이야!”
“드래곤 장인이 같이 보내준 편지에 따르면 그 망치에 축복이 여러 개 걸려있다고 들었네. 맘에 든다니 다행이군. 날치 수인도 기뻐할 걸세.”
상태 창을 끈 실비아가 망치를 휘두르자 허공을 가르는 붕붕- 소리와 함께 우웅, 우우웅거리는 뭔가 찝찝한 소리가 같이 났다. 기분 탓인지 ‘그만 흔들란 말이야!’라고 앙탈 부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음, 그래. 뭐 어때. 조깅하는 말도 있는 판국에 음산한 소리를 내는 망치도 있을 법하지.’
실비아는 망치를 몇 번 더 휘두르고는 조심스럽게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앞으로 든든한 던전 동반자가 되어줄 망치이니만큼, 소중히 다룰 필요가 있었다.
다시 소파에 앉은 그녀는 두 드래곤과 함께 디저트를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중간에 모든 이들을 주목시킨 용왕은 블루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블루는 아쿠아리움에서 물개 노릇을 하던 때랑은 비교도 안 되는, 기품있고 당당한 태도로 수인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그 낯선 모습에 실비아가 먹던 해초 쿠키를 바닥에 떨구는 참사가 잠시 있었다.
즐거운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하늘 대신에 천장을 차지하고 있는 바다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용왕의 곁에 다가온 수인 부부가 작별 인사를 해왔다. 심해왕국은 엘리셔스 제국과 달리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를 자랑하고 있었기에 엄격한 인사 예법은 없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용왕님, 오늘 연회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래. 가는 길에 밝은 불빛 조심하길 바라네.”
용왕의 덕담으로 미뤄보아 부부는 오징어 수인인 모양이었다. 실비아의 예상대로 수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오징어로 변해서 천장으로 날아갔다. 그런 식으로 수인들은 하나둘 용왕에게 인사를 하고 연회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연회를 파할 시간이 된 것이다.
실비아는 예의상 용왕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는 블루와 실비아에게 마지막 날이니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라며 손을 휘저었다. 인사를 하고 물러난 그들은 해초와 해양생물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왕국 정원을 한가로이 산책했다.
“휴우, 오늘 참 재밌었다. 아…. 머리 너무 오래 올리고 있었더니 답답해!”
“내가 풀어줄게.”
실비아가 머리를 만지며 불평하자 블루가 그녀의 비녀를 뽑아주었다. 목덜미를 스치는 손가락의 감각,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숨결, 심지어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묘한 긴장감이 든 실비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웃긴 건 동시에 블루의 침 삼키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서로의 침 삼키는 소리를 들은 둘은 민망한 듯 마주 보며 웃었다. 사위가 꽃게 한 마리 없이 조용한 데다가 서로의 행동을 의식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실비아의 머리 장식을 다 제거한 블루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며 입을 열었다.
“피곤하지?”
“응, 조금…이 아니라. 별로 안 피곤한데? 아직 쌩쌩해!”
아무 생각 없이 답했던 실비아는 바로 제 답을 부정했다. 피곤하다고 하면 아무 일 없이 그냥 자게 될까 봐서였다. 실비아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자 블루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더니 손을 맞잡고 정원 사잇길을 지나갔다.
한참을 그를 따라가던 실비아의 눈에 조그만 연못 위의 아치형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로 들어서는 길목에 조성된 산호초와 진주, 은색 모래로 장식된 미니 정원은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아담한 생선 조각상들도 몇 개 있어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와, 왕궁 안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엄청 귀여워.”
“다리 건너편으로 가 볼까? 저기가 별궁이라고 들었는데.”
“음, 그래!”
다리 건너편에는 마치 전래동화에 나올 것 같은 귀여운 별궁이 있었다. 퓨전식으로 꾸며진 왕궁과 달리 별궁은 일단 밖에서 보기엔 완전한 동양풍이었다. 특이하게도 문 자체가 커다란 조개껍질처럼 되어있었는데, 그 모습이 실비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잠시 미니 정원 구경을 한 둘은 아치형 다리를 건넜다. 다리의 한가운데에 다다른 블루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실비아와 눈을 마주쳤다.
“기억나? 엘리셔스 월드에서 이렇게 생긴 다리를 건너갔었잖아.”
“응? 아…! 맞아, 거기에도 이런 다리가 있었지! 그때는 정말 네가 이렇게 바뀔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내가 어떻게 바뀌었는데?”
‘어떻게 바뀌긴, 사람 됐지…. 몰라서 물어? 너 정말 심각했잖아.’
…라고 대답할 순 없는 노릇이기에 실비아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평소였다면 블루의 기분이 상하든 말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지만, 공략이 코앞에 있었기에 만에 하나 호감도가 내려갈 법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실비아가 대답 없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자 블루가 그녀의 옷자락을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어떻게 바뀐 거 같냐니깐?”
“어? 어, 그게….”
실비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블루가 잠시 흘겨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알고 있어. 정확히는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된 거지. 놀이동산에 있을 때는 내가 좀 많이 답답했지? 실비아 너, 은근히 날 성가셔했었잖아.”
“뭐?! 아, 아냐. 성가셔한 적 없어.”
화들짝 놀란 실비아가 손사래를 쳤다. 블루는 그녀의 손을 잡고 별궁 쪽으로 걸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땐 네가 왜 그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나 때문에 가끔 짜증 나 한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어. 그래도 널 보는 게 좋아서 애써 모른 척했었지만 말이야.”
“아….”
실비아의 표정이 멍해졌다. 어차피 블루는 눈치가 없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기분 나쁜 티를 있는 대로 낼 때가 꽤 있었는데, 그걸 알고도 모른 척한 거였다니. 미안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실비아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블루가 화사하게 웃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너 정도면 정말 착한 거야. 짜증 났지만 날 도와주러 꾸준히 물개 우리로 찾아왔잖아. 보통 사람이었으면 진작 인내심이 동나서 발길을 끊었을걸.”
“아냐, 나 착한 거 아냐….”
자신이 착하다니, 그럴 리가. 블루를 도와준 이유는 게임 공략 때문이었는데…. 실비아는 죄책감에 가슴이 아려왔다. 실비아가 그의 말을 부인했지만, 블루의 입가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뭐가 됐든 나를 계속 도와줬잖아. …그래, 사실 의도는 상관없어. 난 널 좋아하니까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좋게 보일 수밖에 없거든.”
“아, 음…. 그래. 착해서라기보다는 친해지고 싶었다고 하자. 난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그래서 가끔 답답할 때가 있었지만 견딘 거지. 지상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이랑 친구 하고 싶었으니까!”
태연한 척 대답한 실비아는 그러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어째서, 이번에는 섹스하기도 전에 고백부터 하는 거지. 몸부터 섞길 바랐건만, 마음을 먼저 들이대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일부러 좋아한다는 말에 반응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으나 블루는 확인 사살을 해주었다.
“네가 친구 하자고 했을 때 처음엔 기뻤어. 그래서 너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제국어도 빨리 익히고 어른스러워지려고 노력한 거야. 그렇지만, 이젠 친구보다 좀 더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어.”
“뭐?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제국어를 익힌 거라니. 원래 드래곤들이 똑똑한 게 아니었어?”
실비아는 이 악물고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 애썼다. 특별한 사이라니, 난 선 섹스 후 고백을 선호한다고! 그녀가 뒷말은 전혀 듣지 못한 듯 앞말에만 반응하자 블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인가?
다행히 블루는 실비아의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우리 종족이 지혜로운 건 사실이지만 느긋함이 천성이라 뭐든 빨리 배우려고 하지 않아. 어차피 남은 삶이 훨씬 기니까. 하지만 난 절실했기에 빨리 익히려고 노력했지. 인간들만이 가지고 있다는 절실한 마음을 널 통해 배웠기도 하고.”
“절실함을 날 통해 배웠다고?”
“응. 면접 볼 때 합격을 위해 접시와 공을 빨리 돌리며 애쓰던 것, 날 가르치기 위해 피를 흘려가며 노력한 것, 그리고 팔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이언트 악어의 이빨을 청소해주던 모습…. 아직도 생생해. 널 보며 나도 뭐든지 절실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음, 그렇지. 내가 좀 매사에 절실하긴 했지. 안 그러면 나태 지옥에 떨어지거든. 실비아는 엘리셔스 월드에서의 나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앞에 두 개는 그렇다 치고 자이언트 악어를 양치시켜주는 걸 지켜보고 있었을 줄은 몰랐지만….”
“응. 마지막 날 악어 대가리도 후려쳤잖아. 멋졌어.”
“그건 어떻게 본 거야? 뭘, 또 그렇게…. 내가 좀 멋지긴 했지.”
실비아가 입을 손으로 가리며 부끄러워했다. 멋지다는 칭찬이 기분 나쁠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블루의 말이 다시 묘해졌다.
“아무튼, 난 절실했단 소리야. 빨리 제국어가 유창해져야 너랑 말이 잘 통할 테니까. 그리고 붉은 머리 남자랑 신나서 대화하는 네 모습을 보니까 하루빨리 걔보다 더 멋진 남자가 되어야겠다는 욕심이 들었어.”
붉은 머리 남자면 루카?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실비아가 놀라워하는데 블루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걔랑 싸운 날 좀 더 조져놨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까먹…. 흠흠, 이건 아니고! 다시 말하자면 난 너랑 지금보다 더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어서 노력한 거야. 이걸 받아줄래?”
말릴 틈도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낸 블루가 이공간에서 상자를 꺼냈다. 어제 드래곤 신전에서 얻었던 어머니의 발찌가 든 상자였다. 달칵-소리가 나며 상자가 열리고 그가 무릎을 꿇더니 발찌를 받으라는 듯 손을 치켜들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칭찬에 정신이 홀린 사이에 기습공격을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