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전 배움이 아직 모자라요. 경험이 적은 제가 한 나라의 왕이 되기엔 아직 이를….”
“강제로 하라는 건 아니야. 후보자는 찾으려면 많단다. 생각을 좀 해 보고 제왕 교육을 배울 마음이 있다면 언질을 주면 좋겠구나.”
“네….”
어느새 밤이 깊었다. 부자가 한참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정원을 관리하던 가재 수인도 어느새 퇴근하고 왕궁의 불도 하나씩 꺼져, 테라스 주변을 빼곤 어둑어둑해졌다.
“이제 자야지.”
“안녕히 주무세요.”
용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는 시종의 안내로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실비아를 따라가려다가 잡혀 아버지와 한참 동안 여러 얘기를 했다. 영양가 있는 대화로 소득이 많았지만, 그 대화들은 금방 휘발됐다. 현재 그의 머릿속엔 실비아에게 어머니의 발찌를 건넬 궁리만이 가득했다.
‘내일이지….’
그를 안내하던 시종이 한 방을 가리키며 같이 온 인간님이 머무르고 계신다고 일러주었다. 블루는 고개를 끄덕인 뒤, 별말 없이 시종의 뒤를 따랐다. 단시간에 사회화가 돼버린 블루는 실비아가 있는 방에 무작정 난입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제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됐으니까. 그녀가 안다면 무척 아쉬워할 사실이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던전 공략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은 심해왕국의 밤이 깊어갔다.
* * *
“으음….”
“실비아 님!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실비아는 현재 예쁜 동양풍 옷을 입은 채 심해왕국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였다. 이 세계에 빙의한 후로 처음으로 남들 손에 받는 치장이었다. 아니, 현생까지 포함해도 최초인 셈인데, 남이 꾸며주는 건 생각보다 더 편하고 즐거웠다.
‘인생이란 한 치 앞날을 모르는 거로구만.’
게임 초창기에 거기서 거기인 누더기 옷 세 벌로 버티던 날들이 아스라이 스쳐 지나갔다. 고작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동네 거렁뱅이에서 시녀들의 몸시중을 받는 신분 급상승을 이루다니. 인터넷 게시판에 ‘드래곤 만나서 인생 역전한 썰 푼다.’라며 글을 올린다면 약 먹을 시간이라며 조롱하는 악플이 수백 개씩 달리겠지.
“이게 좋을까. 아니면 이건 어떠세요?”
“음, 뭐. 저는 다 좋은걸요.”
시녀가 장신구를 이것저것 대주자 실비아가 거울을 보며 답했다. 다 좋다는 게 괜한 소리가 아닌 게, 하나같이 화려하고 예뻤다. 현생에서 이런 몸치장을 받는 날이라면 결혼식 날 뿐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비싸 보이는 장신구들이 보석함에 가득했다.
‘남이 꾸며주니까 정말 좋은걸. 피곤하지도 않고, 예쁘게 꾸미니까 기분도 좋아지고 말이야.’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소라 수인과 닥터피쉬 수인들이 실비아의 몸치장을 도우며 조잘조잘 자기네들끼리 떠들어댔다. 오랜만의 성대한 연회에 한껏 설렌 것 같았다. 간간이 실비아와 시선이 마주치면 그들은 던전 공략은 어땠냐고 물어보면서 까르르거렸다.
그럼 실비아는 솔직하게 얘기해주었는데, 별거 아닌 대답에도 깔깔거리는 걸 보면 마치 소녀들 같았다. 오래 살아야 해양생물 수인이 된다는 말을 떠올려보면 소녀란 말을 붙여도 될지 모르겠지만, 실비아의 감상은 그랬다.
화장해주겠다는 시녀의 말에 실비아는 눈을 감았고, 얼굴 여기저기를 붓이 살랑이며 지나갔다. 끝났다는 시녀의 말에 실비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이제 됐다? 어떠세요?”
“와, 최고예요!”
그녀가 탄성을 지름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실비아! …어?”
명랑한 목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선 블루는 실비아를 보곤 일시 정지했다. 마치 누가 정지 버튼을 눌린 것처럼 굳어버렸는데, 잠시 굳어있던 그는 곧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말도 안 돼. 순간 내가 방을 잘못 들어온 건가 했는데! 실비아였어? 진짜 너무 예뻐. 이렇게 예쁠 수가. 인간이 아냐. 아니, 인간 중에 제일 예뻐. 아니지, 전 종족을 통틀어 제일 예뻐!”
블루가 그녀의 주위를 빙 돌면서 쉴 새 없이 칭찬을 퍼부었다. 블루의 찬사가 오버가 아닌 게, 오늘의 실비아는 게임 세계에서 빙의한 날 이래로 가장 아름다웠다.
긴 머리를 올려서 보석 달린 금비녀로 정돈했으며, 평소 화장을 하지 않던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색이 얹어졌다. 화려한 화장도구를 보며 잠시 걱정한 실비아였으나 다행히 시녀들은 메이크업 센스가 있었는지 그녀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
하늘하늘한 연분홍색 상의가 발목에 올 정도로 넓고 길었으나, 안에 입은 연초록색의 옷이 타이트했다. 그 옷은 몸매의 선을 강조하면서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소재라서 야한 느낌이 들었다. 실비아는 벽에 붙은 대형거울 앞에 서서 한 바퀴 돌았다.
‘크으, 이렇게 완벽하게 꾸며주다니, 선녀가 따로 없구만!’
한 바퀴 다 돈 뒤에 뒤를 힐끗 쳐다보니 블루가 넋을 놓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 섹스 각이 섰구나. 그녀의 뇌리에 계시처럼 강한 예감이 내리꽂혔다.
사실 실비아는 어제 방안내를 해주는 시종을 뒤따라가면서 기록 창을 켰고 블루의 호감도가 100이 되었다는 걸 확인했다. 공략조건을 완벽히 달성했으니 이대로 잠들 순 없었고,
‘좋아. 블루, 넌 이제 내 거야!’
시종을 얼른 보낸 그녀는 용왕과의 대화가 끝날 때를 기다려 블루와 역사를 이뤄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복도에서 기다렸으나, 대화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기다리다가 지친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서 기다렸다.
그리고 정신 차리고 보니 갈매기가 우는 아침이었다. 무슨 놈의 대화를 그렇게 길게 하는 건지, 잠시 침대에 누워서 기다린다는 게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뻗어버린 것이었다.
‘그건 좀 아쉽게 됐지만, 오늘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껍질 깐 하드바를 제대로 맛볼 시간이었다. 실비아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블루를 향해 뒤돌았다.
“네가 취향이 이상한 줄 알았더니, 그런 건 아니구나? 이런 모습이 예쁘다고 하는 걸 보니 말이야!”
“취향이 이상하다니? 난 네가 어떤 상태여도 예쁘게 보일 뿐이야.”
둘의 닭살 돋는 대화에 시녀들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단 걸 알아챈 것이다.
실비아는 블루의 칭찬에 ‘어머 어머, 얘는!’ 이러면서 손사래를 치다가, 블루의 옷차림도 평소와 다르단 걸 뒤늦게 알아챘다. 평소 입고 다니던 동양풍 무사 같은 옷이 아니라 검은색 상하의에 금색의 자수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원래 입던 옷이랑 모양은 비슷했지만, 때깔이 달랐다고나 할까. 살짝 그을린 피부와 금색 자수가 새겨진 검은 옷이 어우러지니 이국의 귀공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도 오늘 평소와 많이 달라. 정말 왕자님 같아! 아냐, 왕자님이지! 너무 멋져.”
실비아가 호들갑 떨며 칭찬하자 블루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는 머쓱한 듯 뒷덜미를 긁적이더니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이제 갈까?”
실비아는 뿌듯한 얼굴로 커다란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잘 차려입은 채 블루의 안내를 받으니 웹소설에 나오는 에스코트 받는 영애가 된 거 같아서 감동이 넘실넘실 차올랐다.
연회장소는 야외였는데, 정원의 뒤편에 너른 바위가 모여있어 테이블 대신 쓰기에 알맞았다. 엘리셔스 제국과는 달리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의 연회였다. 상석에 용왕이 앉아 있긴 했지만 엄격하게 예의를 차리는 느낌이 아니라, 수인들이 자유롭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연회장에 들어선 그들을 발견한 용왕이 가볍게 눈인사했다. 실비아와 블루가 다가가려 하자 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연회를 즐기라는 뜻인 듯했다.
“이건 뭐야. 구슬 같이 생겼네.”
“나도 처음 보는 거야.”
너른 바위에 차려놓은 음식을 하나둘 맛보던 실비아는 구슬 모양의 음식을 발견했다. 새콤달콤한 게 심해왕국만의 특산품 같았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저희 왔습니다.”
차려진 음식을 즐기고 있으려니 어제 던전에서 헤어졌던 문어와 카디날 피쉬 수인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블루는 반색을 하며 그들을 반기더니 실비아와 살짝 떨어진 곳에 앉았다. 대충 귀 기울여 들어보니 어제의 이야기를 이어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실비아는 계속 엿듣다가 깜짝 놀라 포크를 떨어트렸다. 블루가 그들에게 음식을 권하는 게 아닌가.
“컥!”
실비아는 포크를 떨어트린 데 그친 게 아니라 먹던 음식 목에 턱, 걸려버렸다. 캑캑거리던 그녀는 달달한 음료를 마시고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여기 오면서 더 놀랄 건 없다고 여겼는데, 음식을 혼자 먹어 치울 줄만 알던 식탐 많은 블루가 남에게 음식을 권하기도 하다니. 오래 빙의하고 볼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냐. 오늘은 아예 제국어만 쓰고 있잖아.’
보통 인간이면 몇 년이 걸릴 외국어 습득을 며칠 만에 끝낸 블루는 더 이상 엘리셔스 월드에서 본 멍청이가 아니었다.
‘내가 참, 아직 사람 보는 눈, 아니 드래곤 보는 눈을 더 기르든가 해야지. 저런 애를 멍청이로 생각하다니.’
블루를 보며 감탄하기도 잠시, 실비아는 음식에 집중했다. 정체 모를 고기구이와 해초 샐러드를 한창 즐기고 있으려니 대화가 끝났는지 블루가 자리로 돌아왔다. 뒤를 보니 한층 밝아진 표정의 수인들이 즐겁게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어떻게, 수인들과의 대화는 잘 끝난 거야?”
“응. 보금자리 문제는 다행히 잘 끝냈어. 심해왕국의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탓에 일자리를 찾는 젊은 해양생물들이 대부분 대륙 근처의 얕은 바다로 떠났거든. 그래서 변두리에는 빈집이 많은지라 쉽게 해결됐지. 일자리는 잡해양 생물 모임의 계원 수가 좀 많더라고. 그래서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했어. 내가 어떻게든 책임지기로 했지.”
“고, 고령화? 어…. 음, 그래. 일단 잘 해결됐단 거구나. 네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일자리도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 같아.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실비아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고령화가 뭘 어째? 진정 블루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싶을 정도의 고차원적인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제 너무나도 똑똑해진 블루는 당장 고관직에 올라도 될 정도로 듬직해졌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