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아! 실비아 양, 던전을 빠르게 공략해줘서 고맙군. 그리고 아들을 여기까지 데려와서 에리사의 음성 편지를 들을 수 있게 해준 것도…. 이 녀석 성격에 혼자서 여기까지 오려고 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 감사 인사 먼저 해야 했는데, 부자간에 대화하느라 내가 결례를 범했네.”
“아닙니다. 저도 던전을 공략하면서 많은 수확을 얻었는걸요. 아드님은 저한테도 소중한 친구니까, 감사 인사는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실비아가 괜히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의를 차리자 용왕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소중한 친구라…. 그래, 소중한 친구를 위해서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일찍 자도록 해. 내일은 그대와 내 아들을 위해서 연회를 열 테니 모쪼록 기대하고 있길 바라.”
“감사합니다.”
실비아가 깍듯이 배꼽 인사를 하자 용왕이 곁에 선 시종에게 손짓해 손님방으로 안내해 주라고 일렀다. 실비아는 시종을 졸래졸래 쫓아가다가 블루는 안 따라오나 싶어 뒤돌아봤지만, 그는 아직 용왕과 대화 중이었다.
‘그래. 아버지도 있는데 이런 곳에서 뭘 하겠어. 오늘은 여러모로 많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빨리 씻고 잠이나 자자. 내일은 연회를 열어준다고 했으니까 벨트 풀고 마음껏 먹어야지.’
멀어지는 갈색 뒤통수를 지켜보던 용왕은 아들이 그녀를 뒤따라가려고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잽싸게 제지했다.
“그렇게 좋으냐?”
“네? 무슨….”
용왕의 앞뒤 다 잘라먹고 던진 질문에 블루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뒤늦게 질문의 의미를 깨달은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피곤해서 빨리 들어가 봐야….”
“녀석. 민망해하기는. 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제국어를 빨리 습득한 것도 저 실비아란 인간 여자가 좋아서가 아니냐.”
용왕의 다 안다는 눈빛에 블루의 볼이 못마땅한 듯 부풀었다. 그는 곧 투덜대듯 말을 내뱉었다.
“그건 제가 똑똑해서 그런 거예요.”
“다른 이는 속여도 나는 못 속여. 넌 날 똑 닮아서 무슨 생각하는지 눈에 훤히 보이거든.”
“네. 아버지 닮아서 제가 눈치가 없잖아요. 그거 때문에 실비아한테 얼마나 잔소리를 많이 들었는 줄 아세요? 이제 와서 눈치 빠른 척하지 마시고…. 아야!”
블루의 팔을 주먹으로 때린 용왕은 아파하는 블루를 보며 흡족해하더니 자신의 이공간을 열어 상자를 꺼냈다. 아까 블루가 건넸던 에리사의 발찌가 든 상자였다.
“이건 너에게 주마.”
블루는 멍한 눈으로 상자를 응시하다가 아버지의 재촉에 손을 내밀었다. 상자를 받아든 그는 개방형 복도의 테라스 아래에 펼쳐진 정원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여자를 대하는 건, 아니 애초부터 누군가와 가까워지려고 시도하는 거 자체가 처음이고…. 거기다가 실비아는 인간이고 저는 드래곤이니까 더 신중해져요. 자칫 잘못하면 서로 상처만 남을 수 있으니까요.”
엘리셔스 월드에서 실비아에게 틈만 나면 껄떡댔던 블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몸이 가까워지는 건 친구 사이엔 당연한 일이라고 실비아가 말했었으니까 그건 별개고, 그는 실비아와 감정적 거리를 좁히고 싶은 거였다.
누군가는 실컷 이것저것 다 해놓고 이제 와 뭘 신중해져? 라면서 그를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블루는 진지했다. 몸이 가까워지는 것과 감정을 서로 주고받는 건 다른 것이니까. 뽀뽀는 붉은 머리랑도 했으니까, 단지 몸이 가까워지는 걸로는 특별한 관계가 될 수 없…. 어? 잠깐. 붉은 머리?!
잊고 있던 걸 깨달은 블루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맞아! 붉은 머리랑 실비아가 친구 사이라고 했었지. 뽀뽀도 했었잖아. 어젠 붉은 머리를 보고도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예 까먹고 있었어.’
가볍게 뽀뽀하는 것까진 친구 사이엔 다 그런다고 하니까 이해한다 쳐도, 설마 라커룸에서 했던 이런저런 일을 그 붉은 머리랑도 했을까? 그것까진 안 했으면 좋겠는데…. 블루의 가슴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비늘 나고 처음 느껴보는 ‘질투’라는 감정이었다.
아니, 붉은 머리를 처음 봤을 때도 이런 기분을 받았지만, 그때보다 비교할 수 없는 더 격렬한 감정이 그의 온몸을 불살랐다. 그 재수 없는 놈이 실비아와 라커룸에서 했던 이런저런 짓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 머리가 저릿할 정도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설마. 후우, 뽀뽀만 했겠지. 그래, 그 정도야…. 나중에 물어봐야지.’
블루가 루카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히는 와중에 함께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던 용왕의 입이 열렸다.
“이 상자 속의 발찌는 내가 에리사와 가까운 사이가 된 날, 그녀를 위해 손수 제작한 거란다. 인간세계엔 결혼이라는 제도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게 없으니까 이 장신구로 그날을 기념한 거지.”
“결혼이요?”
“그래. 그런 게 있단다. 나도 최근에는 인간세계에서 유희를 한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순 없다만은…. 인간들은 서로의 사이가 확실히 정의되는 걸 좋아하지. 그렇지 않으면 섣불리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아.”
블루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사이가 확실하지 않으면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그럴 리가…. 대체 어디까지가 깊은 관계고 어디까지가 친분의 선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라커룸에서 했던 짓이 깊은 관계가 아니라면 더한 건 몸을 겹치는 것뿐인데, 아버지가 한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건 아니에요, 아버지. 관계가 확실히 정의된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제가 최근에 본 인간세계는 아버지 말과 달랐어요. 친구끼리 입 맞추기도 하고 껴안고 이것저것…. 흠! 하여튼 뭘 많이 하는 거 같더라고요. 그게 깊은 관계 아닌가요?”
블루의 말에 용왕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내뱉었다.
“그래? 아아, 많이 달라졌군. 인간세계에 마지막으로 간 건 이백 년 전이란다. 그때와 지금의 인간세계는 많이 달라졌나 보구나. 우리 드래곤들과 달리 인간들은 100년을 채 못 사니까 금방 풍습이 바뀌긴 하더라만.”
용왕의 눈이 당황으로 약하게 흔들렸다. 인간세계가 언제 그렇게 자유로워졌단 말인가. 친구끼리도 막 이것저것을 한다니. 아들이 직접 봤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인간 말로 요즘 것들이란 정말…. 머쓱해진 그는 상자를 가리키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래도 마음이 오가는 건 또 다른 문제 아니겠니? 실비아 양에게 이걸 주면서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고백해보렴. 그, 친구끼리 뭘, 어디까지 하는진 모르겠지만 우리 드래곤 종족만의 법칙도 있잖니.”
“그런 게 있어요?”
“그래. 법으로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워낙 개체 수가 제한된 데다가 다들 오래 사는지라 같은 종족끼리는 신중하단다. 장신구를 선물하면서 마음을 고백하면 특별한 사이가 된다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지.”
“그렇구나…. 알겠어요, 아버지. 아! 인간세계에도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블루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책으로 섹스하는 법을 익히는 바람에 드래곤 사이에 그런 암묵적인 법칙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블루는 인간세계에도 이런 비슷한 법칙이 있는 것 같다고 짐작했다. 저번 라커룸에서 실비아가 그의 행동을 저지했던 건, 이런 암묵적인 법칙을 제가 무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친구 사이에 뽀뽀도 되고 키스도 되고 다 받아주길래 책에서 본 더한 것도 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이런 것도 좀 가르쳐주지. 자기 입으로 말하기 민망했던 걸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가 보기에 실비아는 은근히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 같았으니까. 좋아하는 이에 대해선 원래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법. 실비아가 수줍음을 타서 그에게 설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블루는 자기 좋을 대로 판단했다.
블루가 이공간 안에 상자를 집어넣는 걸 보며 용왕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걸 주면 실비아 양도 좋아할 거야. 드래곤이나 인간이나 반짝거리는 걸 싫어하는 이는 없으니까. 아! 마침 성공적으로 던전을 공략한 기념으로 내일 성대한 연회를 열 테니 그때 기회를 봐서 주는 것도 좋겠구나.”
“그렇네요. 내일….”
블루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양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맛이 간 제 아들의 표정을 응시하던 용왕은 난간을 두드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럼 이 얘기는 이쯤하고, 다른 얘기로 넘어가 볼까.”
테라스에 기댄 그들은 여러 대화를 나눴다. 만나지 않은 동안 있었던 일들과 함께 엘리셔스 제국에 관한 얘기와 바로 오늘 있었던 던전 공략을 했던 과정까지. 그러다가 드래곤 신전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땐 둘 다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편안한 표정으로 안식을 맞이한 에리사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여러 이야기가 지나가고 수인들의 보금자리와 일자리 마련에 관한 주제가 그들의 화두에 올랐다.
“수인들의 보금자리라, 그건 문제가 아닌데. 일자리는….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내일 꼴뚜기 수인에게 한번 물어보도록 하마.”
“아뇨. 그분이 어디 계신지만 알려주시면 제가 직접 찾아가서 물어볼게요. 아버지께서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이런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겠느냐? 네가 있어서 참 믿음직하구나. 그래서 말인데….”
흡족해진 용왕은 블루와 중요한 얘기를 더 나눴다. 자신 다음의 후대 왕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아직 수명이 꽤 남아 있긴 했지만, 드래곤 특유의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슬슬 한 왕국의 지존의 자리에 권태로움을 느끼던 차였다.
에리사의 마지막을 충분히 지켜준 것 같으니 이제 마지막 유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용왕의 말에 블루가 눈을 마주쳤다.
“…네? 그 말은 저보고 이 나라의 왕이 되어보라는 건가요?”
“그래. 당장 왕을 하라는 소리는 아니야. 절차대로 정식 교육을 받으면서 천천히 결정하라는 게지. 내가 이곳의 왕이 된 지가 거의 백 년이 다 되어가니 이제 슬슬 내려올 때가 되었지.”
갑작스러운 제안에 블루가 눈을 내리깔며 망설였다. 왕자라고 남들이 부를 때도 깜짝 놀랐는데, 왕을 하라니. 둥지에서 뒹굴며 지낸 지가 엊그젠데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