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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85화 (285/372)

285화

실비아는 쯧쯧 혀를 차면서도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개구리 같은 눈도 예쁘다고 해주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괜히 대리석 바닥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계속 보니까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옅게 미소 지으며 지켜보던 블루의 눈이 신전 내부를 한 바퀴 훑었다. 심해 왕국을 자주 방문하진 못할 테니 어머니가 묻혀계신 곳을 또렷이 기억해둘 셈이었다. 내부를 천천히 살피던 감색 눈이 다시 한가운데의 보석 조각상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어머니가 현신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조각된 상이었다. 복잡미묘한 얼굴로 상을 관찰하던 그의 눈에 아까와 달라진 모습이 들어왔다.

『아까도 여기에 상자가 있었어?』

“응? 모르겠네. 기억이 안 나. 거기에 상자가 있어?”

드래곤 상의 고이 모은 두 손 위에 조그만 상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보석으로 조각된 상이랑 재질이 아예 다른 소박한 나무색 상자를 이제야 알아보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실비아는 블루보다 키가 확연히 작았기에, 높은 곳에 놓인 나무색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 아까는 못 봤던 건데. 발견을 못 했던 건가?』

블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위로 뻗어 상자를 집었다. 커다란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상자를 잠시 응시하던 그는 잠금쇠를 돌려 뚜껑을 열었고 환한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어?! 뭐야.”

환한 빛에 곁에 있던 실비아가 놀라 소리쳤다. 쏟아져 나오던 빛이 곧 사그라지고 블루가 상자에 든 것을 꺼냈다.

『어? 이건….』

상자에서 나온 건 여러 가지 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발찌였다. 블루의 손에 들린 발찌를 보고 실비아가 탄성을 흘렸다.

“와! 너무 예쁘다. 이런 게 드래곤 상의 손 위에 있었어?”

『어…. 이건 우리 어머니가 차고 다녔던 발찐데.』

블루가 손을 흔들자 발찌가 차랑거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발찌에 달려있는 은색의 조그만 종에서 나는 소리였다. 실비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홀린 듯이 발찌를 바라보자 블루가 싱긋 미소 지었다.

『가지고 싶어?』

“…어? 아, 아냐! 이건 어머니가 너한테 주신 거 아냐? 그런 걸 넘볼 순 없지.”

실비아가 아무리 물욕이 많았어도 아닌 건 아니었다. 드래곤 상의 손바닥 위에 놓여있던 거니, 블루의 어머니가 그에게 남겨주신 물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유품과도 같은 물건을 가지고 싶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양심이 없는 그녀라고 해도 탐낼 것과 탐내면 안 될 것은 구분할 줄 알았다.

‘발찌가 딱 내 발목에 맞을 정도로 크기가 적당하고 보석 구성도 어디서 본 적 없이 예쁜 건 사실이지만, 블루가 저걸 가지고 다녀서 어디다 쓰겠나 싶고 또…. 그래도 탐내는 건 안 될 말이지…. 아냐. 이런 생각 하다가 천벌 받지. 몹쓸 생각 멈춰!’

실비아가 고개를 격하게 털었다. 블루는 영롱하게 빛나는 발찌를 들어 올리곤 고개를 옆으로 꺾어 잠시 감상했다. 햇살이 최대한 들어오도록 설계된 방의 구조 덕에 발찌는 아주 찬란하게 빛났다.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마치 명품관에 디피되어 있는 것처럼 보석이 반짝거리는 효과가 나서 더욱 장난 아니었다. 실비아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블루가 손을 흔들 때마다 좌우로 왔다 갔다 거렸다.

그런 그녀를 힐끗 보곤 목을 울리며 웃은 블루는 발찌를 상자에 다시 집어넣었다. 상자로 몸을 감춘 발찌의 자취를 쫓으며 실비아가 무의식중에 입맛을 다셨다. 그러곤 괜히 발찌의 지나친 번쩍임을 나무랐다.

“아…. 이제 좀 덜 번쩍거리네. 아유, 눈부셔서 혼났….”

『이 발찌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주셨던 거라고 알고 있어. 그러니 내 것이라곤 볼 수 없지.』

“아아. 아버지 것이구나.”

『응. 마음 같아선 너한테 주고 싶지만, 내 소유가 아니니 함부로 줄 수 없네. 아버지한테 가져다드려야겠어.』

“아….”

블루는 이공간에 상자를 넣었다. 아쉬움이 남은 초록색 눈이 이공간으로 사라지는 상자를 좇다가 황급히 옆으로 굴렀다.

‘어휴, 이놈의 욕심 가득한 눈깔! 왜 제어가 안 되고 지랄이야!’

실비아는 안 그래도 부어있어서 불쌍한 눈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연타를 날리자 눈가리에 그득했던 욕심이 쫙 빠지며 온순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왕국으로 돌아갈까? 곧 저녁이 될 것 같아.』

“아, 저녁이구나. 방이 너무 밝아서 시간이 지난 줄도 몰랐네. 와, 하루 만에 던전 공략이라니. 이렇게 빨리 끝낼 줄은 예상도 못 했어.”

블루와 실비아는 방을 나서기 전 드래곤 상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확인을 위해 신전을 한 바퀴 돌았다. 실비아는 블루가 다른 곳을 보는 데 여념이 없는 사이에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모든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추가로 <던전 클리어 보물 상자>를 획득했다는 메시지까지.

‘획득한 건 왕궁으로 돌아가서 확인해야지. 뭘 얻었으려나!’

레벨 업을 생각보다 너무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제3 던전에선 레벨 업보다 더 값진 경험을 얻었다. 계주가 튀어서 고생하고 있던 수인들을 도와서 보람을 얻었고, 드래곤 신전에 와서 블루의 아픔을 위로하며 그녀 자신도 덧났던 상처를 말끔히 씻어냈다.

‘이게 끝이 아니지. 또 할 일이 남아있었는데….’

던전 공략은 끝났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첫 번째로 거북이 수인을 만나는 일. 두 번째로 필드 여러 개 도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레벨 업을 시켜줄 블루를 공략하는 것.

‘블루 공략은 언제…. 아, 아니지!’

실비아는 일단 고개를 저어 잡념을 물리쳤다. 여기는 블루의 어머니가 묻혀있는 신전. 이런 곳에서 불경한 생각을 했다간 천벌을 받을 것 같았다.

‘나도 아직 좀 울적한 기분이고 말이지….’

신전을 다 돌아본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블루의 말대로 바깥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바닷속 도시니만큼 노을 같은 건 보이지 않았지만, 마법으로 도시의 밝기를 유지하는 것인지 마치 지상의 저녁처럼 사위가 어두웠다.

『실비아, 이제 돌아가자.』

“응. <귀환 스크롤>을 쓸게.”

이제 돌아가는 길은 전보다 훨씬 편해졌겠지만, 굳이 왔던 길을 돌아가며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용왕이 준 아이템이 있으니까. 인벤토리에서 <귀환 스크롤>을 꺼내 펼치자 밝은 빛이 둘을 감쌌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해초와 지상의 식물들이 섞인 정원이 보였다. 조각상과 잘 관리된 식물들, 왕궁 정원의 한가운데에 도착한 것이다.

“앗, 왕자님과 일행분이시군요! 어서 이쪽으로 오시죠!”

정원을 집게발로 부지런히 관리 중이던 가재 수인이 그들을 발견하고 황급히 수인화를 했다. 그의 안내를 따라 왕궁 안으로 들어간 실비아와 블루는 눈을 커다랗게 뜬 용왕과 마주쳤다.

“아니, 아들아, 실비아 양. 하루도 안 지나서 돌아오다니! 던전 공략은… 성공한 건가?”

아무래도 너무 빠른 귀환이다 보니 용왕이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도 당연했다. 블루는 대답 대신에 이공간에 넣어뒀던 발찌 상자를 꺼냈다.

“네. 좀 많이 빠르긴 했지만, 성공했어요. 그리고 이건…. 어머니가 계신 신전에서 얻은 상자예요. 안에 든 장신구,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선물했던 거죠? 기억하고 있어요.”

상자를 건네받은 용왕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아들이 상자를 얻었다는 건 그녀의 죽음을 확인했다는 거였다. 음성 편지로 자신의 부고를 직접 알리고 싶다는 에리사의 고집 때문에 아들에게 미리 말하지 못했는데, 그게 잘한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상자를 가져온 걸 보니 에리사가 있는 방까지 갔었던 게로구나. 미안하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아버지, 아니에요. 어머니가 남겨두신 음성 편지를 들었어요. 많이 슬펐지만, 어머니가 왜 이제야 밝히셨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블루의 대답에 용왕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블루의 어머니, 에리사에게 아들에게는 그녀의 죽음을 미리 말해두는 게 낫지 않냐고 말했던 그였다. 그러나 에리사는 아들이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을 때 음성 편지를 들려주겠다고 했었고, 그렇게 그녀의 죽음을 아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몇십 년이 흘렀다.

그런데 아들이 아무 무리 없이 음성 편지를 들었다니. 용언의 제약으로 잠겨있던 음성 편지를 블루가 열었다는 건, 그가 외적으로는 물론 내적으로도 완벽한 성장을 이뤘다는 걸 의미했다.

“사실 보내면서도 살짝 염려했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완전한 성체가 됐구나.”

아버지의 흐뭇한 얼굴에 블루는 별다른 대꾸 없이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옆에 서서 부자의 대화를 듣던 실비아는 제국어가 이제 완전히 유창해지다 못해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블루를 보며 속으로 경악하는 중이었다.

드래곤이 지혜로운 종족이라고는 하지만 실시간으로 언어를 마스터할 줄이야.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이 정도 습득력이면 현생에서는 진작에 몇십 개 국어 마스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지 않을까 싶었다.

‘모차르트를 옆에서 지켜보는 살리에리의 심정이 이랬을까. 질투 난다, 질투나!’

딱히 언어를 더 익힐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타고난 재능의 불합리함에 실비아의 시기심이 들끓었다. 좀 어이없긴 하지만 그녀는 이런 식으로 별 쓸데없는 질투를 가끔 하곤 했다. 싸가지 없는 루카가 돈이 썩어나도록 많은 걸 질투하거나, 고위 신관인 노엘이 무려 백작가의 차남이었다는 사실에 시기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속으로 무슨 못난 생각을 하든, 티만 안 내면 상관없는 거니까.

잠시 질투로 활활 불타던 찰나 용왕의 시선이 실비아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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