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왕국년 1235년. xx월 xx일. 블루드래곤 에리사, 영원한 안식을 얻다.]
글귀를 본 블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보석상 밑에 있는 글귀에 시선을 고정했다.
실비아는 차마 블루에게 말도 걸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설마 최악의 가정이 들어맞을 줄이야.
‘어떡하지. 뭐라고 말을 꺼내야…. 난 옛날에 어떤 기분이었더라?’
실비아는 현생에서 부모님을 잃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부모님과 데면데면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절망하고, 슬펐고,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다행히 옆을 지켜주던 친구들 덕에 절망은 오래가지 않았고, 꿋꿋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지만 말이다.
슬픔을 극복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웃으며 놀다가도 집에 돌아가서는 울적해지는 나날을 한동안 반복했었다.
‘한동안 힘들었었지. 이젠 나도 죽었으니까 뭐 슬퍼할 건 없나. 휴우, 내 자취방에 있던 물건들은 어떻게 됐을까. 친구들이 잘 치웠을까…. 아, 그러고 보니 스마트폰에 19금 웹툰이 잔뜩 남아있는데! 으아아!’
울적한 생각을 하던 실비아는 죽은 이후로 아예 잊고 있었던 스마트폰의 웹툰 구매 내역이 생각났다. 차마 말로 못 할 파렴치한 취향이 담긴 웹툰 제목들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친구 중에 죽은 이의 스마트폰을 보면서 낄낄거리는 사이코패스는 없지만, 워낙 어마어마한 것들이 안에 들어 있는지라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설마 의문사의 원인을 밝힌다고 이것저것 다 뒤적이는 건 아니겠지. 으아, 안 돼!’
스마트폰 걱정에 슬픔은 순식간에 사그라졌고 수치심이 그녀의 머리를 가득 메웠다. 부들부들 떨던 실비아는 잠시 후 가까스로 진정했다. 이미 현생은 지나간 것, 이 세계에 집중하는 게 좋겠지.
실비아는 여전히 조용한 블루를 걱정 가득한 눈으로 살폈다. 그러나 의외로 블루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내리고 있다가 한숨을 한번 쉬곤 고개를 들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네.』
“블루야….”
블루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였지만, 표정과 달리 감색 눈은 혼란스럽게 일렁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두운 기분과 상관없이 유리천장에서 내려온 햇살로 방의 분위기는 화사했다.
『기분이 이상해. 왜 계속…. 가슴이 답답하지.』
“…그건 슬픔이란 감정이야.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이런 상황에서라면 누구든 너랑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야.”
실비아가 그를 부드럽게 껴안고 위로했다. 실비아의 정수리에 제 뺨을 기댄 블루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기분 나빠. 이 감정의 이름이 슬픔이라고? 이런 건 평생 몰라도 될 것 같아.』
“아냐. 이 상황에 슬프지 않으면 그건 감정이 아예 없는 거야. 너 그거 알아? 제대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음, 아주 유명한 명언이 있지. 참으면 병 된다!”
『참으면 병이 된다고? 무슨 뜻이야.』
블루가 고개를 들어 실비아를 멍하니 바라봤다. 얘가 지금 뭔 소리를 하나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실비아는 꿋꿋하게 얘기를 이어 나갔다.
“마음이 힘든데 애써 참지 말라는 거지. 마음껏 울고, 화내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면 속병이 들지 않고 건강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건 드래곤도 마찬가지고!”
『그래?』
“그럼! 네가 만약 지금 이 감정을 티 내지 않고 참는다면 나중에 병이 아주 깊어질 거야. 그래서 드래곤 중에 가장 빨리 죽는 드래곤으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지도 모르지.”
빨리 죽는다는 말에 블루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슬퍼하지 말라고 한 소리인데 진지하게 반응하니 살짝 기가 찼다. 가진 놈들이 더하다고,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오래 사는데도 불구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긴 싫은 모양이었다.
『그게 뭐야, 빨리 죽긴 싫어!』
“옳지. 그게 핵심이야. 빨리 죽기 싫으면 괴로운 감정을 그때그때 제대로 표출해야 한다는…. 아이코!”
블루의 어깨를 토닥이던 실비아는 순간 발을 삐끗해서 드래곤 상을 짚었다. 블루가 괜찮냐고 물으며 실비아의 손등 위에 제 손등을 포개는 순간, 상에서 눈부신 푸른빛이 나오더니 드래곤어를 구사하는 맑고 단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말하는 이가 보이지 않고 노이즈가 낀 걸 보니 마도구를 이용해 드래곤 상에 음성 편지를 남겨놓은 것 같았다.
「아들아, 네가 여기까지 왔구나.」
『아…. 어머니가 음성 편지를 남겨놓으셨나 봐.』
“어떤 말을 남겨놓으셨을까.”
그 음성 편지는 신기하게도 상대방의 목소리에 반응하는지 잠시의 간격을 두고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음성 편지를 들을 때는 아마도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겠지.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구나. 몇십 년 후일 수도, 아니면 네가 나처럼 세상을 떠날 준비를 마쳤을 때일지도 모르지. 사실, 둥지를 떠나기 전부터 내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단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 때가 돼서 가는 것일 뿐….」
실비아와 블루는 가만히 음성 편지를 들었다. 음성 편지의 내용은 계속 이어졌다.
「심해 왕국의 해저 동굴을 통해 올 수 있는 이 도시는 우리 블루 드래곤들의 성지. 우리의 무한과도 같았던 삶을 끝내는, 인간세계에 비유하면 무덤 같은 곳이라고 볼 수 있지. 아직 어린 네 앞에서 내 죽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난 사정을 알려주지 못하고 이곳으로 오게 됐어. 그 과정에서 많은 오해가 있었지만…. 네 아버지는 내 마지막을 지켜주기 위해 함께 이곳으로 왔단다. 그러니 그에겐 섭섭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하아, 그런….』
블루가 침음을 흘리자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마치 대화를 하는 것처럼 반응하는 신비한 음성 편지였다.
「…둥지를 떠날 때 너한테 모질게 대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단다. 드래곤들은 지혜를 가졌지만, 감정을 익히는 데는 더딘 종족. 우리는 짧은 생을 사는 인간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가진 풍부한 감정을 배우게 되지. 이 편지를 들을 때쯤이면 너도 좋은 인간들을 만나 그들의 감정을 익히게 됐을지도 모르겠구나.」
『그게….』
블루는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이내 말을 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단 걸 깨닫고 침묵했다. 블루의 어머니는 그의 심정을 미리 짐작한 건지, 한참을 위로하는 말과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지 조언을 건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편지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무한에 가까운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길 바라. 놀고 싶으면 놀아도 좋고, 원하는 게 있으면 적극적으로 쟁취하렴. 이 어미는 늘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란다. 강 너머의 세계에서 늘 너의 앞날을 축복하마. 녹음은 여기까지야. 다시 만나는 날까지, 안녕.」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지더니 끝맺음 인사와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블루는 음성 편지가 끝나고도 한참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더니 옆에 서 있던 실비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감색 눈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걸 보고 실비아가 순간 움찔했다.
『실비아…. 아까 빨리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어? 아아, 참지 말고 감정을 티 내야 해. 그건 드래곤도 예외가 없다고…. 그래, 그래야 병이 안 나고 빨리 죽지 않는다고 했었어….”
얼렁뚱땅했던 헛소리를 다시 해보라고 묻다니, 당황스러웠다. 실비아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대답하자 블루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물기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오래 살래. 빨리 죽기 싫어….』
블루가 상체를 힘없이 숙이더니 실비아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숨죽여서 우는 소리와 함께 실비아의 어깨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안타까움 섞인 한숨을 내뱉은 실비아는 자신보다 곱절은 클 듯한 너른 등을 한참을 토닥였다. 인간의 감정을 배운다고 슬픔까지 벌써 익힐 필요는 없었는데. 맨날 헤헤거리던 애가 우니까 더 구슬프게 느껴졌다.
‘아, 괜히 나도 슬퍼지잖아. 위로해도 모자랄 판에 왜 같이 슬퍼지고 난리람.’
실비아는 어느새 그와 함께 훌쩍였다.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의 자신처럼 슬퍼하는 블루를 보니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신전을 들어올 때 축복을 걸어줬다더니, 걱정은 사라졌지만 슬픈 건 어떻게 제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실비아는 현생에서 덮어둬야만 했던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며 한참을 블루를 끌어안고 울었다. 나중에는 눈물을 그친 블루가 오히려 그녀를 위로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 과정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으나 우느라 넋이 나간 실비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드래곤 신전의 깊은 곳에선 한참 훌쩍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헉! 실비아, 네 눈 완전 붕어처럼 변했어.』
“놀라기는! 사람이 가끔 그럴 때도 있는 거지.”
실비아의 눈이 퉁퉁 부은 걸 보고 블루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이없게도 블루는 물속성이라 그런지, 아니면 피부가 튼튼한 드래곤인 덕인지 눈이 붓지 않았고 실비아의 눈만 잔뜩 부었다. 그녀는 잘 떠지지 않는 눈에 원망스러움을 가득 담고는 블루를 흘겨보았다.
“어째서! 나만 이렇게 눈이 퉁퉁 부은 거야. 말도 안 돼!”
『너무 억울해하지 마. 내가 보기엔 이런 눈도 꽤 예쁜걸? 계속 부어있어도 난 좋아. 뭘 해도 실비아는 예쁘니까!』
“참나, 무슨. 이게 어딜 봐서 예쁘다고….”
저번 노파상태를 보고 좋아했던 블루는 부은 눈도 맘에 든 듯했다. 실비아는 속상한 얼굴로 눈을 어루만지고 있다가 기가 차 참나, 거렸다. 그러면서도 입꼬리는 흐뭇하게 치켜 올라갔지만 말이다.
‘계속 부어있어도 좋다니, 정말 이상한 취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