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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83화 (283/372)

283화

“그건 맞다만, 본체는 이곳에 없지. 내가 이런 구질구질한 분수대에서 살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느냐.”

구질구질한 분수대에서 살고 있던 수인들이 들으면 섭섭해할 소리였다. 거북이 석상의 대답에 실비아가 손을 싹싹 비비며 아부했다. 얻을 게 있는 자는 비굴해지는 법. 원래 인생은 돌고 도는 거라고, 시크릿이 했던 아부를 실비아가 거북이 석상에게 하고 있었다.

“그럼요,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럼…. 귀중하신 본체는 다른 곳에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말귀를 잘 알아먹는군.”

“거북이 님을 뵈려면 제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실비아의 굽은 허리가 펴질 줄 몰랐다. 옆에 선 블루는 뒤늦게 분수대를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이 거북이 수인임을 깨닫고 그녀가 하는 꼴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는 진리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었으나, 실비아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도록 돕고 싶었기에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이 심해 왕국의 구멍 한가운데에 나한테로 오는 길이 숨겨져 있지. 바다에서 구하기 힘든 것을 가져온다면 성의를 봐서 좋은 것을 주도록 하마.”

“아! 꼭 찾아뵙겠습니다!”

실비아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거북이 석상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실비아는 멍하니 분수대 가운데를 바라보다가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것을 깨닫고 허리를 폈다. 분수대 거북이 석상이 거북이 수인을 찾는 단서일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아버지가 말씀하신 거북이 수인이었나 보네.”

“응. 숙소 주인과 용왕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전설 속 거북이 수인이 틀림없어! 이 왕국을 나가는 날 거북이 수인을 찾아가 봐야겠어.”

바다에서 구하기 힘든 것을 가져오라니, 인벤토리에 있는 것 중에 쓸만한 게 있으려나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용왕에게 육지 물건이 있나 물어보고, 최악의 경우엔 육지로 돌아갔다가 다시 거북이 수인을 찾으러 바다로 돌아와야겠지.

생각을 마친 실비아는 주위를 살폈다. 이제 다음 퀘스트를 할 차례. 시선을 들자 도시가 정상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여전히 우뚝 서 있는 드래곤 신전이 보였다. 상앗빛의 신전은 다른 기와 건물들과 이질적인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신전은 원래 있던 곳이라서 그런가, 변한 게 없네. 음, 블루야…. 이제 어머니를 만나러 가볼까?”

“어? 아…. 그래.”

어쩐지 블루의 안색이 안 좋았다. 어머니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실비아도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왜냐하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녀라도 안 좋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인이 확성기로 도시 전체가 울리도록 시끄럽게 떠들어댔고 트랜스포X처럼 건물들이 오만 난리를 치며 변신하기까지 했는데, 그 난리 통에도 블루의 어머니 에리사는 밖으로 나와보지 않았다.

‘혹시나 오염된 기운에 당하실까 봐 나오지 않으신 걸까? 그게 아니면….’

드래곤 신전은 오염된 기운이 침범할 수 없는 성전이라 그 안에 있는 게 안전해서 나오지 않은 것일지도. 실비아는 애써 불길한 가정을 일축하며 블루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블루야, 가자. 어머니 오랜만에 만나니까 좋겠네?”

『응? 아, 뭐. 별로…. 그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도 아닌데 뭐.』

블루는 긴장되는지 다시 드래곤어로 대답했다. 그는 분수대에 제 얼굴을 비춰보더니 앞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까 철인3종경기를 하면서 땀에 젖은 몸을 목걸이로 뽀송뽀송하게 만들었다. 실비아의 몸까지 한꺼번에 깔끔하게 만든 그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쭈뼛거리며 ‘가자!’라고 외쳤다.

실비아는 조그맣게 웃고는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빨리 어머니를 보고 싶었던 블루가 말도 없이 경보하는 바람에 실비아는 속도를 맞춰 걷느라 상대적으로 짧은 다리로 고생해야 했다. 금세 신전 입구에 도착한 그들은 굳건히 닫힌 문 앞에 섰다.

“연다?”

『응…. 아니, 잠깐! 잠깐만.』

실비아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뒤돌아보자 블루가 황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그러곤 혼자서 방긋 웃더니 다시 정색하는 등 여러 가지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표정들은. 어머니한테 성질이라도 내게?”

『그냥, 잘 모르겠어. 으음…. 인간들은 보통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면 어떻게 반응하지?』

“글쎄! 어떤 만남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아버님을 오랜만에 봤을 때처럼 어머니도 똑같이 대하면 될 거 같은데.”

『어머니는 유희를 떠나기 전에 나랑 크게 다퉜단 말이야. 마지막 기억이 좋지 않아. 편지도… 나중엔 아버지만 보내줬어.』

블루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잔뜩 삐진 티를 냈다. 그래서 아버지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거구나. 블루는 자신이 인간의 감정을 모른다고 했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랐을 뿐, 감정 자체가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서운해하는 그를 보며 실비아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만 보고 싶잖아. 내 눈엔 딱 그렇게 보이는데? 오랜만에 뵙는 거니까 예전 일은 잊고! 보고 싶었다고 말씀드리면 될 거야.”

『응….』

블루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을 다시 열려고 시도하는 실비아의 손을 그가 막았다. 맑은 감색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니, 아프신 건 아니겠지? 좀…. 무서워.』

“아…. 일단 걱정하지 말고 신전에 들어가 보자. 상상하면 불안해질 뿐이잖아. 직접 확인해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치?”

실비아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문손잡이를 잡았다. 블루는 이번에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끼익-.

고개를 완전히 위로 꺾어야 할 만큼 높은 문이 개방되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쾌하고 신비한 기운이 그들을 감쌌다. 피곤함을 씻어주면서 동시에 포근하게 감싸는 맑은 기운이었다. 그와 함께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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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신전>이 주는 회복의 축복으로 피로가 싹 가십니다. 실비아의 피로도가 0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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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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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신전>이 주는 정신의 축복으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던 온갖 상념이 순간 사라집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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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대로 실비아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근심 걱정이 순간 사라지며 던전 공략과 철인3종경기로 쌓여있던 극심한 피로도 단번에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성전이 괜히 성전은 아니었는지 블루와 실비아의 표정이 무척 편안해졌다.

“몸이 여기저기 안 쑤시는 데가 없었는데, 들어오자마자 가뿐해졌어.”

『나도 그래. 신전의 축복인가 봐.』

둘은 가뿐해진 몸을 훌훌 털며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리석 바닥이 또각거리며 울렸다. 온통 상앗빛으로 둘러싸인 긴 복도를 지나니 끝없이 이어진 여러 개의 문이 나타났다. 수많은 대리석 문들을 보면서 실비아와 블루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신 걸까? 무슨 숙소도 아니고 왜 이렇게 방이 많지? 하나하나 다 살펴야 하려나…. 아! 나침반!”

<신비한 나침반>은 들고 있는 자가 원하는 것을 찾게 해준다고 했었다. 그러니 블루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복도를 걸어가다 보면 바늘이 가리키는 방이 나타날 것이다.

나침반을 손에 든 실비아는 블루와 함께 적막한 복도를 걸었다. 한참을 걷자 오묘한 푸른빛이 도는 문 앞에서 나침반의 바늘이 한 바퀴 빙 돌더니 정확히 방을 가리키며 멈췄다.

“여긴가 봐.”

문의 양옆에는 드래곤 상이 장식돼 있었는데, 무척 정교하게 조각된 지라 실제 드래곤의 모습이 떠오를 정도였다.

“바로 들어갈까?”

『응.』

불안해하던 아까와 달리 신전의 축복으로 온갖 근심 걱정이 사라진 실비아가 명랑하게 물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축복을 받은 블루도 평온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육중한 문은 별다른 잠금장치가 없었기에 실비아와 블루가 양옆에서 당기자 부드럽게 열렸다.

『아…. 내부가 엄청 밝아.』

“그러게, 아우.”

문을 열자마자 눈 부신 햇살이 그들의 눈을 찔러왔다. 유리천장을 뚫고 밝은 햇살이 내려와 신전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커다란 방 내부에 설치된 유리들이 햇빛을 반사하는 덕에, 원형의 방 한가운데 있는 푸른색 보석으로 만든 드래곤 신상이 찬란하게 빛났다.

‘마법인가? 아니면 구조 설계를 잘한 건가. 밖은 이렇게 밝지 않았는데.’

차츰 내부의 밝기에 적응한 둘은 방 가운데에 있는 신상 앞으로 걸어갔다. 앞장선 실비아는 전신을 보석으로 만든 신상의 신비함에 입을 멍하니 벌렸다.

한참을 아름다운 보석상의 자태를 감상하던 그녀는 무심결에 시선을 내렸다. 그러곤 화들짝 놀라 보석상 아래를 가리고 섰다. 다른 곳을 살피고 있던 블루가 그녀의 어색한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 뭐, 못 볼 거라도 봤어?』

“아, 아냐! 이 방 정말 예쁘다. 보석으로 조각된 상은 생전 처음 봐. 어떤 도구를 썼기에 보석을 이렇게 정교하게 조각할 수 있었을까?”

실비아는 일부러 밝은 미소를 꾸며내며 블루의 주의를 돌리려고 했다. 블루가 몇 번 몸을 옮길 때마다 실비아가 아닌 척 그를 막아섰다. 그러나 실비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블루는 그녀의 등 뒤에 있는 걸 볼 작정인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이 본 적 없이 진지했다.

『실비아.』

감색 눈이 올곧게 그녀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진지한 블루의 눈빛에 실비아는 더 이상 숨기려는 노력을 이어가지 못하고 어깨를 추욱 늘어트렸다. 그녀가 침울한 표정으로 옆으로 비켜서자 블루가 보석상 밑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실비아가 가리려고 했던 글귀를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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