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놀란 실비아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헛숨을 들이켰다.
수인들의 겉모습은 인간과 별다를 게 없었지만,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소개를 했기 때문에 모른 척하려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현생에서 한 달에 두세 번씩 꼬박 즐겨 먹었던 광어 수인의 눈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
‘현생의 광어들과 이 세계의 광어 수인은 엄연히 다른 존재지만, 죄책감이 드는 걸 어떡해. 아 참! 바닷가 마을에서도 먹었구나…. 아이고.’
실비아가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사이, 아까 그들을 피해 분수대 속으로 달아났던 문어 수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미 들으신 거 같지만, 도시가 정상화되는 걸 저희는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들을 쫓아내야겠단 생각에 제가 대표로 기계실로 가서 도시에 있던 시설을 무단 사용했어요. 여기는 원래 왕국배 철인3종경기가 열리던 곳이기 때문에 마법 시설이 많죠.”
“그건 좀 화나긴 했지만, 사연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죠.”
실비아가 다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손사래를 쳤다. 그러곤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꺼냈다.
“그럼, 시작해 보실까요?”
“네? 뭐, 뭘요?”
수인들이 망치를 든 실비아를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미소를 유지하며 카디날 피쉬 수인을 응시했다.
“정화 받기로 하셨잖아요. 안 좋은 기운은 두들겨 맞아야 정화가 된답니다. 이분들은 모르시는 것 같으니 설명해 주시겠어요?”
“아아, 네. 자네들, 이게 무슨 일이냐면….”
카디날 피쉬 수인이 나머지 수인들에게 확성기로 말하지 못한 나머지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자신들이 정화를 받아야 도시가 정상화된다는 설명과 함께,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이쪽 왕자님께서 해결해 줄 거라고 말하자 수인들의 낯이 밝아졌다.
“아, 그런 거였군요. 뭣도 모르고 우선 카디날 피쉬 씨가 나오래서 나온 거긴 한데….”
“그래, 그렇다니까. 그리고 이쪽 분이 왕자님이셔.”
카디날 피쉬 수인이 ‘왕자님’이라고 말하며 블루를 가리킬 때 실비아는 자신이 왕자가 된 것처럼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3초면 충분하다고 하던가.
그것보단 긴 시간인 반나절이지만, 실비아는 왕자님이 된 블루에게 사랑과 비슷한 그 언저리 감정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급하게 씌워진 콩깍지 덕에 그의 하늘색 머리 위에 왕관이 얹어져 있는 환상까지 보이는 상황이었다.
‘이게 참, 원래부터 왕자라면 별 감흥이 없었을 수도 있는데 홈리스나 마찬가지인 신세에서 왕자님이 되니까 너무 멋져 보인단 말이지. 이게 그런 원리인가? 평소에 못된 사람이 좀만 잘해줘도 좋아 보이는 심리 말이야.’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심리가 있다고 들은 것 같기도? 금사빠 실비아가 눈에 하트가 뿅뿅한 채 블루를 바라보는 사이, 설명을 충분히 들은 수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선두에 있는 문어 수인이 실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자, 영웅님. 저희는 이제 다 준비가 됐습니다. 망치로 때려 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네. 고통은 잠시고 그 후엔 많은 보상을 얻으실 겁니다.”
실비아는 <정화의 망치> 스킬을 이용해 한꺼번에 수인들을 정화했다. 반짝거리는 가루가 그들의 머리 위에 내려앉고 곧 얼굴 피부가 한 단계씩 톤 업 됐다.
“어어! 자네 얼굴이 밝아졌어!”
“그러게, 이게 무슨 일인가. 자네 얼굴도 완전히 뽀얘졌구만.”
정신이 멀쩡하길래 오염된 기운이 있는 건가 긴가민가했는데, 얼굴빛이 밝아진 걸 보니 맞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밝아진 걸 확인한 실비아는 퀘스트 창을 켰다. 필수 퀘스트의 두 번째 항목인 <도시를 돌아다니는 고위 몬스터들을 정화하라>가 완료된 것이 보였다.
“후우, 일단 급한 거 하나는 끝났네.”
확인을 마치자마자 우렁찬 물소리가 들리더니 도시 끝에 있는 거대한 폭포가 무너지는 게 보였다.
우지끈! 콰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폭포가 무너지더니 절벽이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정리됐다. 그뿐이 아니라 우중충했던 도시의 풍경도 밝게 변했다. 제1, 제2 메인 던전처럼 환경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다.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가는 도시를 지켜보던 수인들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후련하면서도 막막한 앞날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복잡한 심경을 알아챈 실비아가 블루의 등을 두드렸다.
블루는 그들의 곁에 다가가 제국어로 다시 한번 보상을 약속했다.
“보금자리와 일자리를 보장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없으면 만들어 줄게. 드래곤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직접 들으니 더욱 맘이 놓이는군요.”
“그래, 일단 내일 왕궁 앞으로 와. 아버님께 미리 말해놓을 테니까. 오늘은 바로 왕궁까지 가서 그 얘기를 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
블루의 눈이 분수대 옆에 있는 시계탑을 향했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었다. 신전에 들렀다가 돌아간다면 적어도 한밤중일 텐데, 야심한 시간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긴 무리였다. 블루의 말에 수인들은 꾸벅 인사한 뒤 분수대 앞에 섰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치어들은 치어장에 데려다 놓고 왕궁 앞으로 모두 가겠습니다.”
“왕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수인들은 인사와 동시에 각자의 모습으로 변신하더니 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빙긋 미소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실비아가 블루의 옆구리를 찔렀다.
“근데, 진짜 일자리가 없으면 어떡할 거야? 보금자리도 없을 수도 있는데….”
“아까 말했잖아. 없으면 만들면 되지.“
역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었다. 왕국에 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럼 그렇지. 왕국의 재정이나 기타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말했을 리가 없었다.
현실이었다면 아버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정치인의 아들, 뭐 이런 거랑 진배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여기는 현실이 아니라 게임 세계이고, 블루는 왕자님이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알아서 하겠지. 왠지 블루라면 말 그대로 없는 것도 만들어 줄 것 같단 생각이 든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실비아의 눈에 반짝거리는 거북이 석상이 눈에 들어왔다. 분수 한가운데에 있는 물병을 들고 있는 거북이 석상이 묘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뭐지? 아까는 저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거북이 석상이라, 왠지 메인 퀘스트 중 하나인 거북이 수인의 단서를 찾는 것과 연관 있을 것 같았다.
‘저걸 건드리면 뭔가 나오려나? 근데 저기까지 가려면 물에 또 들어가야 하잖아.’
그 순간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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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게임 <퐁당퐁당 강태공이 되어보자>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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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 끝났다고?’
메시지를 보고 나니 거북이 석상 위에 이상한 홀로그램이 생겼다. 그와 함께 분수대 깊숙한 곳에도 홀로그램이 하나 더 보였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낚시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 이거 다른 방법으로 건드려도 되려나?’
게임에서 보면 정도대로 하지 않아도 공략하는 방법이 있지 않던가. 아까 한참 동안 낚싯대를 드리우느라 고생했던 걸 떠올린 실비아는 편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녀는 인벤토리에서 낚싯대가 아닌 망치를 꺼낸 뒤 <부메랑 망치> 기술명을 속으로 외쳤다. 우선은 분수대 깊숙한 곳이 1차 목표였다.
망치가 부웅- 소리와 함께 묵직하게 날아가더니 분수대 깊숙한 곳에 있는 홀로그램을 건드리고 돌아왔다. 망치에 누리끼리한 게 묻어있다가 순간 분수대로 퐁당 들어갔다.
뭐지? 헛걸 본 건가.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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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에 숨어 살던 황금 이끼를 낚았다! 이끼는 도망가면서 10만 골드 주머니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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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10만 골드라니 대박!’
짤랑- 소리와 함께 그녀의 앞에 돈주머니가 떨어졌다. 뭐야, 이렇게 부자연스럽게 떨어지면 어떡해? 옆에 있던 블루의 눈치를 한번 본 그녀는 괜히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며 주머니를 들었다.
“어휴, 잘 넣어놨었는데, 이게 왜 바닥에 떨어졌지.”
“네 거야?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 같던데….”
“드래곤들은 모두 눈이 좋은 줄 알았더니, 그런 건 아닌가 보구나.”
실비아는 대충 얼버무리며 주머니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식욕, 성욕은 왕성해도 물욕은 다행히 없는 블루는 돈주머니에 금방 신경을 껐다.
“조금만 기다려 봐. 저 거북이 석상이 뭔가 이상해서 그래.”
실비아는 한 번 더 <부메랑 망치> 기술을 사용했다. 훅 날아간 망치가 홀로그램을 건드리더니 거북이 석상에 실금을 내고 돌아왔다. 홀로그램만 건드리려고 했는데 거북이 석상도 때려버리다니, 그녀는 조준 실력을 더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자, 또 뭔가 나와야지?’
그녀가 제자리를 돌며 떨어진 아이템이 없나 살피는 와중에, 살짝 얻어맞은 거북이 석상이 흔들리더니 위엄있는 목소리가 분수대 위로 울려 퍼졌다.
“누구인가. 누가 망치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전데요.”
“뭐야, 실비아. 지금 거북이 석상이 소리를 낸 거야? 무슨 일이야?”
실비아가 냉큼 손을 들며 대답하자 거북이가 그녀를 응시했다. 블루가 옆에서 무슨 일이냐고 속삭였지만, 실비아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줬다.
거북이 석상은 머리에서 돌가루를 휘날리며 눈을 희번득하게 떴다. 그는 실비아를 가만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내 머리를 깨트린 자가 일반인이었다면 도륙을 내주었겠지만, 영웅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다행히 실비아의 비범함을 알아본 거북이 석상이 관대함을 보였다. 실비아는 굽신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유, 그건 죄송합니다. 저 혹시, 당신께서 진리를 안다는 거북이 수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