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도움을 요청하려던 실비아의 뇌리에 방금 보았던 메시지가 스쳐 지나갔다. 메시지에 ‘스스로 힘으로’라는 구절이 있지 않았던가? 괜히 도움을 받았다간 원하는 걸 얻지 못할지도 몰랐다.
“아냐! 내가 알아서 할게. 거기 가만히 있어!”
『뭐? 혹시 힘들면 말해! 당장 건너갈 테니까.』
블루는 다시 건너오려다가 그녀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격하게 손사래를 치자, 걸음을 멈췄다. 두리번거리며 해결책을 찾던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걸 쓰면 되겠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낙엽 더미. 오염된 기운으로 인해 갑자기 거리가 이상하게 변하긴 했지만, 원래는 오래 방치된 도시였던지라 길 구석에 낙엽들이 쌓여있었다. 오랫동안 쌓인 낙엽의 양은 구덩이를 충분히 덮을 정도였다. 마침 가로수 옆에 쓰라고 놔둔 듯 끌개도 하나 보였다.
실비아는 끌개를 들고 낙엽을 미친 듯이 빠르게 웅덩이에 퍼넣기 시작했다.
“에잇!”
‘디딤돌을 꼭 딛고 가란 법은 없지. 엉덩방아를 안 찧거나 발목만 안 잠기면 된다고 했잖아. 이 낙엽 더미로 웅덩이를 메우고 지나가겠어.’
『실비아! 너 지금 뭐하…. 헉!』
실비아가 끌개로 낙엽을 퍼넣기 시작하자 당황해하던 블루는 그녀의 미친 듯한 속도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맞아, 실비아에겐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기술이 있었지. 드래곤인 자신이 보기에도 경악스러운 탈 인간급 기술을 잠시 잊고 있었다.
“잉차!”
실비아는 마치 쌍끌이 어선처럼 이 도시에 있는 낙엽은 다 끌어모을 기세로 미친 듯이 빠르게 낙엽을 날랐다. 그녀는 한 달 굶은 거지가 입속에 밥을 퍼넣듯 낙엽을 정신없이 웅덩이에 퍼넣는 걸 반복했다.
“읏차차, 읏차!”
『세상에….』
손짓이 너무 재빠르다 보니 낙엽이 끌려가는 게 아니라 그냥 공중에서 날아가는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운이 좋게도 볏짚 더미도 몇 개 끈으로 정리돼 있었는데, 지금 가진 힘 스탯으로도 쉽게 들어 올릴 정도였다.
『뭐야!』
블루는 제 눈을 의심했다. 자기 몸의 세배는 될 법한 볏짚을 들고 빠르게 이동하는 실비아의 모습에서 쇠똥구리가 똥을 굴리는 환상이 보였다.
노력은 빛을 발했다. 열심히 나른 낙엽 더미와 볏짚 더미는 얕은 웅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마치 실비아가 이용하길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양의 낙엽과 볏짚 더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와아! 다 메웠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온종일 걸려도 못 할 일을 실비아는 채 2분이 되지 않아서 해냈다. 가히 무서운 스킬이라고 할만했다.
「저게 무슨… 인간 맞아? 흠흠, 크흠!」
실비아가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확성기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이 한 말에 깜짝 놀라 헛기침을 하면서 금방 사라졌지만.
실비아는 메워진 웅덩이 위를 사뿐사뿐 무사히 건넜다. 스스로 해내서 더욱 뿌듯했다. 그러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블루의 팔을 낚아채곤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뛰어! 신전도 가야 하고 할 거 많아.”
『어어, 그래. 정말, 네 기술은 다시 봐도 대단해.』
“서두르자. 도시 전체가 던전인데, 웬만하면 여기서 자고 싶지 않아. 적어도 신전 안으로 들어가야 해!”
그들은 묵묵히 도시를 한 바퀴 돌았다. 타잔처럼 줄타기를 하며 건물 사이사이를 누비고, 그물을 누워서 엉금엉금 건넜으며, 불바다가 된 거리를 앗뜨, 앗뜨 하면서 껑충거리며 뛰었다. 블루가 물마법으로 불을 끄려고 시도했으나 마법을 쓰는 순간 실격이라고 확성기가 협박했다. 때문에 둘은 발에서 숯불 향이 나는 고통을 견디는 과정을 견뎌야 했다.
실비아는 실비아대로 상태 이상이 오지 않게 하려고 <손은 눈보다 빠르다>를 껐다 켰다 하면서 활용하느라 고생했다.
“너무, 너어무! 힘들어.”
『나도…. 어지간하면 힘들다고 안 하는데 좀 힘드네.』
징징거리는 게 일상이었던 블루가 실비아의 말에 동의했다. 오버 조금 보태서 산 넘고 바다 건너 해저 이만리를 지나고 나자 철인 3종경기인지 유격 훈련인지 모르겠는 지옥 길의 끝이 보였다.
『저기가 끝인 거 같은데….』
“하아….”
만신창이가 된 둘의 눈앞에 ‘도착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현수막이 보였다. 실비아와 블루는 눈물을 글썽이며 현수막 밑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마법도 쓰지 말라고 하고 날아다니지도 말라고 하니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몬스터가 있는 필드를 열 군데 도는 게 낫지, 철인3종경기라니.
개고생하며 도시를 한 바퀴 돌았더니 실비아의 오동통하던 뺨이 홀쭉해졌다. 벼락출세를 해 왕자님이 된 블루의 낯도 거지꼴이 다 된 건 물론이었다.
「축하합니다! 철인 3종경기를 완료하시다니, 많이 즐거우셨나요? 저희도 즐거웠습니다!」
확성기의 들뜬 목소리, 그리고 다시 사위가 고요해졌다. 뭐야, 이게 끝이야? 정말 끝이냐고!
“보상 같은 거 없어?!”
흉흉한 눈빛이 된 실비아는 우선 품속에 넣어둔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당연하게도 일만 보가 꽉 차 있었다. 일만 보는 달성했으니 이제 건물 어디든 들어갈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신전도 들어갈 수 있는 건데, 기왕지사 이렇게 된 김에 확성기 속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라고 하는 걸 보니 무리인 듯한데, 그들이 아마도 오염된 기운으로 이지를 잃은 고위 몬스터들일 테니까.
힘없이 널브러져 있던 실비아가 블루의 귓가에 겨우 입을 가져갔다.
“블루야. 우릴 농락한 확성기 속 주인공들을 잡아야 할 텐데, 어떻게 잡을 방법이 없을까?”
『음, 저 확성기에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져. 일방적으로 안내하는 게 아니라, 우리 행동을 보면서 반응하는 걸 보니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나 봐.』
“그러게. 말 걸면 대답할 것 같기도 하고?”
『응. 확성기에서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마나를 사용하는 거 같은데…. 실비아, 네가 계속 확성기에게 말을 걸어 봐. 그 사이에 난 어디서 마나가 넘어오는지 찾아볼게.』
블루의 말에 실비아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은 지상의 어느 종족보다 마나의 흐름에 민감했기에, 오감을 집중하면 마나의 근원지를 알아내는 것도 가능했다.
둘은 몸을 털고 일어섰다. 블루가 고개를 내린 채 눈을 지그시 감은 걸 확인한 뒤 실비아가 확성기의 목소리에게 시비를 걸었다.
“즐겁다고? 누구는 이렇게 쌩고생을 하는데! 너희 대체 정체가 뭐야.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나와!”
「싫은데요! 나가면 저희가 손해 볼 게 뻔한데, 안 나가죠.」
예상대로 확성기는 곧장 대꾸했다. 실비아는 건들거리는 자세로 확성기를 째려보았다.
“허,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러다가 나중에 후회할걸!”
실비아가 시비를 슬슬 걸자 확성기 속에서 살짝 빈정 상한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후회할 일 없을 거 같은데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실비아는 실없이 계속 시비를 걸었다. 확성기 속 목소리는 수상하다고 느끼지 못한 건지 따박따박 말대꾸가 돌아왔다. 그 사이에 블루가 마나 감지를 끝낸 건지 눈을 번쩍 떴다.
「당신들이야말로 좋은 말할 때 여기서 나가시…. 쾅! 뭐, 뭐야!」
확성기가 떠드는 데 정신이 팔린 사이 블루가 땅을 박차고 초고속으로 날아갔고, 그대로 낮은 기와집 중에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에 다다랐다.
그는 팔을 뒤로 한껏 젖혔다가 풀스윙으로 지붕을 갈겼다. 와장창! 하는 엄청난 소리가 나면서 지붕이 부서지더니 그 안에 있던 확성기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였다.
겉보기엔 인간 같았지만, 바다 내음이 진하게 나는 게 해양생물 수인이었다.
“으악! 뭐, 뭐야, 당신! 어떻게 여길 안 거…. 켁!”
『따라 나와.』
블루는 수인의 멱살을 바로 잡아챈 뒤 실비아가 있는 곳으로 휭 날아왔다. 갑작스럽게 공중에 떠오르는 바람에 공포에 질린 수인의 비명이 도시를 크게 울렸다.
“으아아아아아!! 수인 살려! 날짐승이 사람 죽이네!”
『이걸로 안 죽어!』
블루에게 멱살을 잡힌 수인은 순식간에 실비아 앞에 배달됐다. 확성기로 건방지게 떠들어대던 그는 한껏 겁을 집어먹었는지 오돌오돌 떨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당한 건 실비아와 블루인데 본인이 피해자인 양 떨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블루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실비아에게 속삭였다.
『이 수인은 마법을 못 쓰는 것 같아. 마도구를 써서 확성기를 썼던 건가 봐. 올라가서 보니까 저 건물 꼭대기에 마도구가 많더라.』
“그래?”
실비아는 수인을 관찰했다. 잡혀왔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못하는 걸 보니 블루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도시를 통째로 바꿀 수 있는 마법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진작에 공격하고도 남았겠지.
‘두루마리나 확성기나 원래 도시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들인가 보구나. 용왕님이 충분히 걸어야 한다고 블루에게 말했다고 하니까, 그럴 확률이 높지. 도시에 이런 시설이 있단 걸 이미 알고 우리를 골려 먹으려고 시설을 이용한 거군.’
“얘! 너 정체가 뭐니?”
실비아가 수인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수인은 일반 사람보다 덩치가 작았는데, 겉으로 보기엔 어떤 생물의 수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수인이 입을 동그랗게 모으더니 시커먼 먹물을 내뿜었다. 먹물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실비아가 으악! 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자 블루가 수인에게서 그녀를 막아섰다.
“으으! 기분 나빠.”
『실비아, 괜찮아? 얼굴이 완전히 시커매졌어.』
다행히 먹물을 맞으니 기분만 나쁠 뿐, 치명타는 없었다. 수인이 화풀이를 할 요량으로 먹물을 뿌린 것이다. 블루가 이공간에서 꺼낸 수건을 건네자 실비아가 신경질을 내며 얼굴을 닦았다.
“에이! 오징어 아니면 문어네.”
“오징어라니! 난 문어 수인이야. 먹물 더 뿌려 버린다! 가까이 오지 마!”
제 정체를 밝힌 문어 수인이 씩씩댔다. 화가 나서 그런지 그의 소매 사이에서 촉수, 아니 문어발이 몇 개 삐져나왔다. 다행히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엄청 징그러운 비주얼은 아니었다. 난동을 부리려는 그의 곁으로 다시 다가간 실비아는 수건을 그의 입 앞에 들이댔다. 먹물 발사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너만 있는 건 아닐 텐데? 동료들은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