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퍽퍽, 깡깡깡! 경쾌한 소리가 한참 울리고 다행히 보스 몬스터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치웠다. 애초부터 공벌레 자체가 움직임이 느렸는데, 보스 몬스터도 같은 종인지라 빨라봤자 도긴개긴이라서 공략이 쉬웠다.
‘여기서 처음 나오는 보스 몬스터라 그런가. 생각보단 할 만하네.’
보스 몬스터에게서 획득한 아이템은 <방충망 텐트>로, 모기에 잘 물리는 체질인 그녀에게 요긴한 아이템이었다. 실생활 꿀템을 남겨준 심해 공벌레들에게 잠시 애도를 표한 그녀는 블루에게 부탁해 함께 바닥에 떨어진 구슬을 주웠다. 제3 메인 던전이라서 그런지 구슬의 색깔이 달라졌다. 오묘한 붉은 색을 띠는 게, 팔면 기존의 구슬들보다 더 많은 값을 받을 것 같았다.
블루는 아빠가 심해 왕국의 왕이 되는 바람에 이제 로열 드래곤이었으니, 구슬은 몽땅 실비아가 가지기로 했다. 실비아는 혹시나 블루가 뒤늦게 구슬을 탐낼까 봐 눈치를 봤다.
“내가 다 가진다? 혹시나 다른 말하기 없기야!”
『응, 너 다 가져. 난 네가 같이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걸?』
혹시나 항의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블루는 이제 왕자님으로 벼락출세했기 때문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너그러운 그의 모습에 실비아는 괜히 머쓱해졌다.
———————————————
[축하합니다! 레벨이 1 상승했습니다.]
———————————————
전투가 끝나고 실비아의 레벨이 1 올랐다. 블루가 해치운 것도 파티를 맺은 효과가 있어 일정 부분 경험치가 오른 덕이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이 던전에서 레벨을 많이 올리고 돌아가야 하는데.’
실비아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여기서 레벨 10 정도는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근데 이 필드에서 고작 1이 오르다니, 실망스러웠다.
『물속에선 내 물속성 마법을 못 쓰겠어. 네가 가지고 있는 망치가 부러워.』
“맨주먹으로도 잘 싸우던데? 서둘러서 앞으로 가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시로 올라가야 하니까 말이야. 아무리 <임시 아가미>를 달고 있다고 해도 바닷속에서 자는 건 무리일 거야.”
고개를 끄덕인 블루가 헤엄을 시작했다. 한참 앞으로 가자 이번엔 또 다른 심해생물이 나타났다. 멀리서 뭔가가 나타나는 것과 함께 필드명이 떠올랐다.
———————————————
[심해동굴이 좀 심해 2]
———————————————
새롭게 나타난 생물은… 좀 많이 기괴했다. 물고기인데 발이 세 개나 달려 있었다. 실비아는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 거치대에 폰을 걸고 X튜브를 보다가 추천 영상으로 떠서 봤던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것이었다.
‘어휴, 뭔 놈의 물고기가 발이 세 개야, 끔찍해!’라고 비명을 지르며 영상을 껐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에 야식으로 노릇노릇하게 구운 열빙어와 맥주를 즐겼던 경험이 있었다.
띠링.
———————————————
[구워 먹기 딱 좋은 세발치]
———————————————
‘그 영상에 나온 게 저런 이름이었던가? 어우, 하여튼 정말 생김새가….’
초록색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렸다. 물고기의 몸엔 가느다란 거미 다리 같은 게 세 개 달려 있었다. 그 생선은 처음에 유유히 헤엄쳐서 다가오더니, 코앞에 와서는 거미 다리 같은 세 발로 당당하게 섰다. 가까이서 찬찬히 관찰해보니 생각보다는 덜 징그러웠지만, 그래도 께름칙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구워 먹기 좋다는 수식어가 붙어있어서 죄책감은 덜 하겠네.’
아까도 죄책감 없이 신나게 공벌레를 두들겨 팼던 실비아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실비아와 블루는 이번에도 열심히 세발치를 때렸다. 구워 먹기 딱 좋다는 수식어에 알맞게 세발치는 <말린 생선>과 <세발치 속젓>을 뱉었다. 속젓은 둥그런 용기에 담겨서 나왔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비릿하면서 그리운 냄새가 났다.
‘속젓이면 갈치속젓 같은 젓갈인가?’
한동안 한국의 전통음식을 잊고 살던 실비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심해어인 세발치로 젓갈을 만들다니, 좀 찜찜했지만 여기서는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 게임 세계에서 언제 젓갈을 맛볼 수 있겠는가. 어차피 입에 넣으면 다 똑같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실비아는 고기와 함께 먹을 요량으로 젓갈을 챙기고, 말린 세발치… 생선도 다리 세 개 떼고 먹으면 어차피 일반 생선이랑 구별 안 될 것 같았기에, 빠짐없이 인벤토리에 넣었다.
‘살림살이를 많이 챙겼네. 세비스가 엄청 좋아하겠어. 과소비했으니 이런 걸로라도 양심의 가책을 덜어야지.’
사실, 실비아의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는 과소비를 했다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분위기를 타서 안 써도 될 돈을 마구 쓰게 되는 날.
비밀상점에 간 실비아는 수중에 돈이 많아 한창 들떠있었고, 이를 귀신같이 눈치챈 시크릿이 신기한 아이템들을 꺼내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 바람에 잠들어있던 욜로족의 욕구가 고개를 들었고 흥청망청 돈을 써버린 것이다.
이틀 정도가 지난 지금, 그 소비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솟구쳐 올랐지만 어찌하랴. 이미 사버린걸.
‘황궁에 들어가면 우라엘 황태자가 보석을 주겠지…. 에이, 설마 자기 식구 됐다고 안 준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우라엘 황태자가 보석을 쉽게 줄 거라고 믿고 마구 써버린 거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미래수익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지나가던 제국민일 때야 선심 쓰듯 선뜻 보석을 줬지만, 황궁 소속 사람이 되어도 그럴까? 황궁 소속이 되면 월급을 받는다는 걸 우라엘 황태자도 알 텐데 말이다.
‘평소에 보석을 퍼줬다면 황궁 재정이 휘청휘청할 텐데, 안 줄 수도 있겠는데.’
너무 현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놈의 게임은 무척 현실적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우라엘 황태자가 황궁인들에게도 돈을 막 퍼다 주는 스타일이라면 황실 재정이 멀쩡하지 못할 터였다.
어쨌든 이런저런 현실 파악이 뒤늦게 그녀를 찾아왔다. 돈을 너무 막 썼다는 걸 인지하고 나니, 손해를 메꿔야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 때문에 결국 던전에서 몬스터가 뱉은 세발치 젓갈에도 환호성을 지르는 처지가 된 것이다.
‘휴우. 지나간 과오는 어쩔 수 없지. 여기서 최대한 레벨 업하고 좋은 것도 많이 얻어가야겠어. 제3 메인 던전이니까 얻는 것도 꽤 있을 테고, 공략하고 나면 블루 아버지가 뭘 또 주겠지.’
혹시나 빠트리는 던전이 있지 않게 꼼꼼히 다 돌아야 했다. 그래야 살림살이를 많이 모을 테니까 말이다. 아쉽게도 이 던전에서는 경험치가 부족했는지 바로 레벨이 오르지 않았고, 보스 몬스터도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절망했지만, 그녀에겐 레벨 업을 여러모로 도와줄 고마운 친구, 블루가 있었기에 든든했다.
‘얘를 공략하면 레벨이 오를 테니까 말이야…. 블루랑은 조만간 실컷 하게 될 테니까 우선 던전부터 돌아다니자.’
입가에 흐를 뻔한 침을 급하게 훔친 실비아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블루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왜 이렇게 간지럽지?’ 하고 혼잣말했다.
음흉한 생각도 잠시, 다시 바쁘게 심해동굴을 돌아다닌 둘은 <심해동굴이 심해 3>에서 <유령 해파리>들을 만났고 열심히 때렸다. 거기서 레벨이 1 올라갔고, <톡 쏘는 해파리냉채>를 얻을 수 있었다.
“오, 대박. 냉채라니!”
해산물을 좋아하는 실비아에게 이 던전은 노다지와 다름없었다. 수도에서도 보지 못한 산해진미가 보상 아이템으로 잔뜩 떨어진다니 정말 최고였다.
‘이것저것 많이 얻었네. 나중에 수육만 만들면 삼합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겠어.’
그렇게 던전 공략을 3까지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내 심해동굴 구석진 곳, 두 남녀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일까?
“후우, 그래. 블루야, 거기, 그래. 좋아….”
『아아, 드디어, 후우…. 내 차례네.』
설마 던전 한가운데에서 역사가…! 그러나 아쉽게도 전혀 아니었다.
“그래, 여기에 코를 들이밀어!”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신 실비아는 블루에게 바람이 흘러들어오는 지점을 가르쳐 주었다. 고개를 위로 치켜든 블루는 황홀한 표정으로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혹시나 앞의 대화를 보고 오해하지 마시라. 그들은 지금 아주 건전하게 공기 마시기를 하는 중이다.
몬스터와 마주치기 위해 던전을 돌아다니던 둘은 어느 높은 지대에 이르러 바깥 공기가 느껴지는 지점을 발견했다. 동굴의 천장, 조그만 구멍에서 공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찰랑찰랑한 수면 위까지 헤엄쳐 올라간 둘은 낭떠러지 같은 바위에 올라선 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맑은 공기를 들이켰다.
원래 생선이 아니라 포유류인 그들에게 <임시 아가미>가 있다고 해도 장시간 잠수는 점점 힘겹게 느껴지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호흡할 기회가 나타난 것이다.
“너무 좋아. 흐읍. 아아!”
『그러게, 아, 좋아….』
실컷 공기를 들이마신 그들은 다시 생기를 되찾고 수중탐험을 시작했다. 그녀는 사이사이 나침반을 꺼내 드래곤 신전의 위치를 확인했다.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 맞는 거 같은데, 대체 언제까지 물속에 있어야 하는 건지 답답했다.
모니터로 봤다면 ‘신비한 심해동굴이네! 잘 만들었네.’하고 말았을 텐데, 아무래도 실제로 공략하려니 점점 온몸이 팅팅 부는 느낌에 힘들었다.
“어? 물의 흐름이 바뀐 것 같아.”
『저기서 물이 엄청나게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가보자.』
블루가 말한 곳으로 가보니 커다란 동굴 입구에서 강한 해류가 느껴졌다. 나침반의 바늘이 그 안을 가리켰다. 여기로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밀어내는 해류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밀어내는 흐름이 너무 센데?”
『어쩌지. 좁은 동굴에서 본체화를 할 수도 없고.』
인간의 몸으로는 거슬러 들어가기 힘든 강한 해류였다. 반짝! 그 순간 실비아의 시야에 동굴 벽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재빨리 다가가 보니 돌로 된 레버가 보였다.
혹시 이걸 당기면 되는 걸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게임을 하면서 반짝이는 걸 건드려서 손해 본 적은 없었다.
드르륵! 예상대로 레버를 당기자 물의 흐름이 반대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