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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73화 (273/372)

273화

그는 실비아를 위해 친절하게 제국어로 다시 말했다. 실비아가 드래곤어를 다 알아듣는 걸 알면서도 배려하는 모습이 의외였다. 눈치 없는, 아니 없었던 블루와 달리 유희를 여기저기 다니며 사회화를 오래 한 나이 많은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블루도 나이가 들면 이런 성격이 될까? 뭔가 배려심 많은 블루라, 상상이 가질 않아.’

“그렇군요. 새 망치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우선 갑옷에다가 이 물건 두 개를 더 주신 것만 해도 충분한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얻을 수 있을 걸세. 생각보다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실비아 양, 오른손에 든 것은 물에 잠긴 도시의 중간 통로를 지날 때 써야 하는 <임시 아가미>, 그리고 왼손에 든 것은 언제든 바로 이 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귀환 스크롤>이네.”

“우와아! …정말 좋네요.”

실비아는 환호성을 지르다가 순간 당연히 던전 공략할 때 있어야 할 아이템임을 깨닫고 버퍼링이 걸렸다. 이것들이 있어야 물에 잠긴 도시로 갈 수 있을 것 아닌가? 실컷 고르라면서 설레게 해놓고 준 게 고작 이거라니, 불만이 치밀었지만, 용왕이 입을 벌리며 미소 지을 때 순간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 때문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는 시종을 불러 상자를 들고 가라고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삶은 매 순간 선택이라네. 그대가 선택하지 않은 물건 중에는 앞으로 인생을 훨씬 쉽게 살 수 있는 물건도 있었지. 아쉽게도 그것들을 고르지 못했지만, 그런 게 없더라도 노력한다면 원하는 길에 다다를 거야.”

“예…. 갑옷만 해도 고마운데 두 개나 더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소중한 인생의 교훈을 하나 더 얻었으니까, 최고네요. 정말, 최고….”

실비아는 어금니를 꽉 물지 않으려 노력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인생을 더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을 눈앞에서 놓치다니, 왜 그걸 주지 않는 거냐는 소리가 목끝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래,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지. 이놈의 게임은 뭐 하나 공짜로 퍼주는 법이 없으니까….

그래도 갑옷을 얻은 게 어디인가. 거기다가 이 필수 물건들을 고르지 않았다면 이 물건들이 공짜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고생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실비아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표정 관리를 하며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혹시나 숨겨진 효과는 없나 싶어서 상세 설명을 봤지만, 용왕이 한 말 외에 부가적인 기능은 없었다. 아이템을 챙기고 있는데, 옆에 있던 블루가 일어나더니 실비아를 재촉해왔다.

『시간이 많이 지났어. 빨리 가자.』

“어? 그래.”

농땡이 부리는 거 좋아하는 애가 웬일로 부지런을 떨까. 떨떠름하게 몸을 일으킨 실비아는 던전에 블루의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닌 척했지만, 엄마를 빨리 보고 싶었던 거로구나. 귀여운 자식.’

그녀는 앞서가는 하늘색 머리를 보며 귀여워 죽겠다는 듯, 손을 꽈악 쥐었다 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나주평야 같은 너른 등판을 보고 있으려니 상자 속 아이템 고르기 농락의 아픔이 씻은 듯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던전 공략 얼른 완수하고 나서 블루를 마음껏 따먹을 것이다.

실비아는 내일만 사는 욜로족 출신답게 수도로 돌아가면 닥칠 걱정거리나, 역하렘 여주의 모럴리스에 대한 고찰을 했던 걸 까맣게 잊었다. 그건 뇌 주름 어딘가에 깊숙이 저장해두고 현재는 곧 공략할 블루의 뒷모습을 보며 군침을 흘릴 뿐이었다.

‘후우, 정말 기다리기 힘들단 말이지? 모니터 앞이었다면 알현실 한가운데에서 덮치기를 시도해 봤을 텐데, 아쉬워라. 얼른 던전부터 공략해야겠다.’

그녀는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서 역하렘 여주를 하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마치 아가리 다이어터처럼 매일 심각하게 제 상황을 걱정하다가도 맛난 걸 보면 우선 실컷 먹고 나서 뒷일은 미래의 나에게 맡겨 버리는, 어찌 보면 역하렘 짓거리를 하기에 최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녀 자신은 아니라며 격렬하게 부정하겠지만 말이다.

용왕이 떠나려는 그들을 불러세운 뒤, 도시로 가는 길목을 알려주었다.

“그 도시는 이 왕국의 동쪽, 물가로 들어가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아까 준 나침반을 이용하면 쉽게 찾을 수 있지. 아까 내가 얘기했던가? 물에 잠긴 도시라는 건 가는 길이 잠겨있다는 소리네. 그 중심부로 가면 멀쩡한 도시가 있을 거야. 들어가보려고 수하들이 몇 번 시도 해봤지만 오지 말라는 듯 번번이 길이 달라지더군. 그렇지만 신의 가호를 받은 그대라면 무리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단 예감이 들어.”

“제가 신의 가호를 받았단 걸 어떻게 아시나요?”

실비아가 깜짝 놀라자 용왕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까 말했듯이 예지능력 덕분이지. 내 감이 맞아떨어진 걸 보니, 아직 실력이 녹슬지 않은 것 같아 뿌듯한데.”

용왕은 몇백 년을 산 데다가 블랙과 블루드래곤의 혼혈인지라 동족들보다 예지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눈앞의 인간 여자가 무사히 던전 공략을 마치고 돌아올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럼 오랜만에 자신도 아내를 볼 수 있겠지.

쓴웃음을 삼킨 그는 아들과 실비아를 왕궁 입구까지 배웅했다. 실비아는 어쩐지 울적해 보이는 용왕의 얼굴에 기분이 묘해졌다.

‘왜 저런 표정이실까?’

이제 떠날 때가 됐다. 실비아는 우선 새로 얻은 갑옷을 입어보기로 했는데, 일반 갑옷과 달리 인벤토리에서 클릭하자마자 착용 완료됐다는 메시지가 떴다. 마치 착용하자마자 투명해졌던 <동정 레이더>처럼 몸에 갑옷을 껴입는 감각이 순간 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세상에! 대박이야. 게임 빙의 두 달 만에 직접 입어야 하는 갑옷이 아닌 클릭만 해도 착용이 되는 갑옷이 생기다니, 우와!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정말 망할 놈의 게임이네!’

두 달간 그녀는 기본 갑옷을 입고 벗었으며, 그다음에 얻은 미역 원피스도 직접 착용한 뒤 전투했다. 정말, 게임에 빙의된 건 치곤 너무나도 낙후된 시스템이었다. 바로 착용이 가능한 아이템이 나타난 걸 보면 시스템이 할 수 있는데 안 한 것일 터.

이제 욕하기도 입 아플 정도의 수준인 시스템이라, 그녀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욕을 참았다.

시종들이 블루와 실비아가 던전에 가서 먹을 간단한 요깃거리와 이것저것 생필품들을 준비해 주었다. 중간에 블루에게 뭔가 몇 가지를 더 주는 시종의 모습을 실비아는 새 갑옷에 감탄하느라 발견하지 못했다.

블루와 실비아는 각자의 저장공간에 시종들이 건네준 것을 담은 뒤 동쪽 끝까지 타고 갈 해마까지 얻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곤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 며칠 몫의 식량과 생필품을 챙기라 일렀네. 돌아오면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출발해 볼게요.”

“아버지, 금방 갔다 올게요.”

스무스하게 움직이는 해마를 타고 둘은 동쪽으로 향했다. 해마는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것 같은 환상적인 승마감을 자랑했다.

왕국의 동쪽 끝으로 가까워질수록 인가는 다 사라지고 꼴뚜기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달린 해마는 어두운 바닷가에 도착했다. 검은빛에 가까운 바다는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커메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좀 무서운걸.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비주얼이네.’

해마에서 내리자마자 그것들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실비아는 아까 받았던 <임시 아가미>를 착용했다. 그러곤 블루를 돌아봤다. 그는 어쩐지 아까부터 낯빛이 좋지 않았다.

“블루야, 기분이 안 좋아?”

『어? 아니, 아니야.』

“왜, 말해 봐.”

몇 번 별거 아니라고 대답하던 블루는 거듭되는 재촉에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던전 안에 계신다는 게 뭔가 불길해서…. 아버지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아….”

블루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드래곤 신전은 성지라서 오염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한다지만, 어째서 블루의 어머니가 그곳에 계시는 걸까? 아까 용왕이 던전에 대해 얘기할 때, 별로 아내를 구출해야겠다는 절실함은 없어 보였다. 상식적으로 아내가 갇혀 있다면 어떻게든 구하려고 애를 쓰는 게 정상인데 말이다.

그건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드래곤 특유의 여유로움인 걸까? 아니면….

생각을 이어가던 실비아는 곧 고개를 저었다. 미리 걱정해봤자 소용없으니 가서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게 옳았다. 아들이 함께 가는 여정인데, 설령 숨겨둔 비밀이 있다고 해도 둘에게 해를 입힐 종류의 것은 아닐 듯했다.

“가서 보면 알겠지. 그리고 설마, 아버지가 너한테 해가 될 걸 숨기셨겠어?”

『그건 맞아. 부모님이 어린 날 놔두고 떠나긴 했지만, 편지도 꼬박 보내주셨었고, 그때 난 이미 해츨링을 벗어난 상태였으니까 아무 문제가 없었지. 근데, 해를 입힐 건 아니지만, 뭔가…. 음, 아니야. 네 말대로 가서 보면 알겠지.』

블루는 손바닥으로 제 뺨을 짝짝 치며 잡념을 물리쳤다. 그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져서 실비아가 엄마 미소를 지었다. 아까 한껏 기품있는 목소리를 내길래 하루아침에 환골탈태했나 싶었더니, 아직 깜찍한 구석이 남아있었다.

‘으음, 뭔가, 여기 와서 여러 모습을 보니까 색다른 것이…. 블루가 예전보다 더 사랑스러워진 것 같은걸.’

실비아는 군침을 흘리며 블루의 뒷모습을 훑었다. 음식도 원래 냅다 짜고 달기만 한 것보다 단짠단짠한 게 매력적인 법. 솔티드 캐러멜 같은 블루의 모습에 실비아의 호감이 올라갔다. 거기다가 대충 싼마이 비지떡인 줄 알았던 블루가 왕자, 그것도 드래곤 왕자로 신분상승 했으니, 비싼 음식이 더 맛있는 법이라 입맛이 도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공략이 코앞이라 생각하니 더 달달해 보이는걸.’

근데 얘는 어쩜 안 된다고 할 때는 잘 들이대더니 공략이 가까워져 올수록 담백해지는 걸까. 이렇게 둘이 있을 때 라커룸에서 했던 것처럼 화끈하게 이것저것 하면 좋잖아, 인적도 없는 게 일치기 딱 좋은 공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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