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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71화 (271/372)

271화

블루가 같이 가달라고 해서 온 거지, 내가 데려온 건 아닌데. 실비아가 목덜미를 긁으며 머쓱하게 대답하자 왕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계단 위로 올라가자 밑에선 보지 못했던 공간이 나타났다. 왕좌만 있는 줄 알았더니 뒤에 여럿이 앉아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이 보였다. 동양풍 무늬가 새겨진 소파와 테이블이 멋스러웠다.

“이야기를 좀 할까. 아, 잠시. 그대들은 이만 물러가게. 이 아이들과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말이야.”

블루의 아버지는 신하들에게 물러가라는 듯 간단하게 손짓했다. 놀랍게도 그의 손짓에 신하들이 순식간에 가오리, 문어 등 여러 기타 해양 생물로 변해서 뻥 뚫려있는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공중을 빠르게 헤엄쳐 올라가더니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여기가 바닷속인 것처럼 공중을 유영하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멍하니 사라진 이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실비아는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얼른 정신 차렸다. 평온해진 얼굴의 블루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몰라도 그 덕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실비아와 블루가 왕을 따라 소파에 앉자 잠시 후 시종이 다과를 내왔다. 혹시나 해초 과자거나 하면 곤란했을 텐데, 다행히 달콤한 맛의 평범한 과자와 따뜻한 차를 맛볼 수 있었다.

“실비아 양, 다시 한번 우리 아들을 데려와 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블루가, 음 블루라고 해도 될지….”

원래 이름이 있는데, 블루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지어 준 이름을 불러도 될까. 실비아가 블루를 힐끗대며 주저하자 이를 알아챈 용왕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자네가 제국어로 지어 준 이름이 블루라는 건 이미 아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 드래곤의 고대 언어는 인간이 발음할 수 없으니 편하게 블루라고 부르게나.”

“아,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아드님을… 블루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실비아의 공손한 언사에 왕이 흡족해하며 질문했다.

“실비아 양, 우리 아들과는 무슨 사이인가? 아들은 친구 사이라는데, 흐음. 정말 그런가?”

“어휴, 그럼요! 저와 블루는, 음. 친구 사이가 맞아요.”

‘친구’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 줄 몰랐던 방구석 은둔 백수 블루와 달리 용왕은 ‘친구’라는 단어의 정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려면 오랜 세월 유희를 다녔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실비아가 눈치껏 냉큼 대답하자 용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친구라고. 그렇단 말이지….”

용왕의 눈이 블루에게로 향했다. 친구 사이라기엔 아들이 인간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주 묘했다. 뭐, 둘 사이의 일은 둘이서 알아서 할 일이지.

실비아는 새삼스럽게 옆에 앉은 블루와 그의 아버지를 번갈아 봤다. 어쩌다가 자신이 신비의 종족 드래곤 두 명과 이야기를 나누는 영광을 누리게 된 건지 인식하고 나니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거기다가 그냥 드래곤도 아니고 심해 왕국의 로열패밀리! 잠시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감동을 즐기던 실비아는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용왕님. 이렇게 한 자리에 함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는 이곳의 오염된 기운을 정화하러 왔습니다만, 잠시 둘러본 바로는 이 왕국은 용왕님의 가호 아래 무척 평화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혹시…. 근래에 수상한 기운을 못 느끼셨나요?”

실비아가 혹시나 실례가 될까 조심스럽게 묻자, 용왕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아….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야. 드래곤은 신의 지혜를 나눠 가진 종족, 태고의 드래곤은 강한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전설이 있네. 후세에 와서는 그 예지능력이란 게 자신의 앞날이 어떨지 희미하게 느끼는 것일 뿐이라고 하네만….”

용왕은 블랙드래곤과 블루드래곤의 혼혈 1세로 동족들보다 조금 더 기민한 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조만간 신탁을 받은 영웅이 이곳으로 올 거라는 강한 예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층 어른스러워진 아들과 함께, 영웅인 실비아가 이렇게 테이블에서 자신과 함께 얘기를 나누는 예지몽까지 꿨다고.

그리고 보다시피 이 왕국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오염된 기운으로 바다에 잠겨버린 도시가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도시요?!”

던전 입장권의 이름이 <심해에 잠긴 도시>인 이유가 있었구나. 이 왕국이 아니라 바다에 잠긴 도시가 따로 있었던 거였어. 용왕의 말을 들은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도시. 원래 그곳은 우리 드래곤들에게 정말 의미가 깊은 곳이지…. 성지라고나 할까. 예전과 달리 그 도시에 거주하는 수인들은 이제 없지만, 꾸준히 관리를 위해 왕국의 관리들이 오갔지. 그러나 일 년 전부터 중간통로가 이상해졌어. 오염된 기운이 그 통로를 이상하게 바꿔놓은 것이지….”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던전화가 된 도시를 원래대로 복구해 드릴게요. 던전 공략 경험이 두 번이나 있으니, 믿고 맡겨주세요!”

실비아가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동안의 던전 공략 경험과 용왕의 말로 확실해졌다. 실비아의 몫으로 남겨진 메인 던전들은 다른 오염된 던전들과 다르게, 그녀가 아니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인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 던전은 나 말고는 공략할 수 없지!’

플레이어만 받을 수 있는 입장권이 있으니 그곳으로 블루와 함께 가면 입장할 수 있을 터. 인간 여자의 다람쥐같이 똘망똘망한 눈을 보며 용왕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우리 아들이 정말 좋은 친구를 사귄 것 같구나. 실비아 양이 너에게 지어준 이름이 블루…라고 했나?”

“네, 아버지.”

“앞으로는 우리 아들을 블루라고 불러야겠어. 블루야, 이 친구랑 같이 던전을 갈 거니?”

용왕의 눈이 블루를 향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던전은 책으로만 접했고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제 전투력이면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실비아를 혼자 보낼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 같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용왕은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겉모습은 둥지를 떠날 때와 비슷했지만, 그때보다 확연히 자라난 내면이 느껴졌다.

세월이 흐른 덕은 아니었다. 몇십 년의 세월은 인간에게는 영원 같지만, 드래곤들에게는 찰나와도 같은 순간. 백 년 만에 봐도 어제 본 것처럼 똑같은 제 친구들과 비교하면 아들의 성장은 놀라웠다. 이건 전부 눈앞의 인간 여자의 영향이겠지.

지금은 친구라고 했나? 용왕은 둘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들과 인간 여자가 조만간 친구보다 더 소중한 관계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드래곤들은 독립적인 종족. 아들이 인간을 만나든, 던전을 돌던 드워프랑 연애를 하든 그는 참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참견하진 않아도 뿌듯한 마음은 가질 수 있는 것. 옆에 있는 인간 여자를 바라볼 때 깊어지는 아들의 눈빛을 보며 속으로 흐뭇해지는 건 부모의 본능이었다.

속내를 숨긴 그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실비아에게 물었다.

“아들도 함께 따라간다니 하니 그대가 잘못될 걱정은 없을 것 같네. 내 감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럼 던전은 언제 갈 셈인가?”

“오늘 당장 가려고요. 아직 바다 밖은 환한 대낮이기도 하고, 저는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지상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진심으로 오늘 당장 가야 했다. 굼뜨게 굴다가 참을성이 동난 노엘과 루카가 실비아를 빼고 만나게 된다면 곤란했으니까. 둘 다 자신을 믿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지만, 전서구로 연락해서 토닥일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무척 불안한 마음이었다. 그와 더불어 부모님 변명을 대며 미뤄둔 황궁 입성도 빨리해야 했고.

“뭐? 당장? 허, 허허!”

당장 가겠다는 그녀의 말에 용왕이 입을 살짝 벌리며 놀라더니 크게 소리 내며 웃었다. 드래곤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도 않지, 던전을 가는 건 경험자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당장 가겠다니!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하는 것 같길래 유약한 성정이라고 짐작했더니 잘못된 판단이었다. 눈앞의 인간은 예상과 달리 미친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안하게 여기저기 살피길래 무서워하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군. 아주 용감한 심장을 가지고 있구나.”

“네? 아, 뭐 그렇죠….”

‘뭐지, 그냥 신기해서 구경한 건데. 거참, 순진해 보이는 겉껍데기가 또 오해를 불러일으켰구만.’

실비아는 대충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해명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였다.

용왕은 그 표정을 또 어떻게 해석한 건지 더 미소가 짙어졌다.

“정말 대단하구나. 그대 같은 인간은 몇 번 유희를 가졌던 나로서도 처음 보는 유형인걸? 그래, 오늘 당장 가겠다고. 그럼 도움을 안 줄 수가 없지.”

용왕은 손짓해 시종을 가까이 부르곤 은밀하게 속삭였다. 잠시 기다리자 시종이 보랏빛 벨벳 천에 싸인 상자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놨다. 시종이 정중한 손길로 천을 걷자 상자에 담긴 휘황찬란한 물건들이 보였다.

‘세상에, 예상치 못한 득템! 블루의 아버지가 아이템을 줄 줄이야.’

실비아는 기뻐서 날뛰려는 걸 겨우 참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용왕을 힐끗댔다. 용왕은 마음껏 살펴보라는 듯 상자를 그녀 쪽으로 밀어주었다.

“원하는 물건을 골라서 써도 좋네.”

“아, 네….”

다 줄 생각은 아니었나 보네? 이놈의 게임이 그럼 그렇지. 루카의 백지수표도 그렇고 뭐 하나 양껏 퍼주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어 실비아는 침을 꼴깍 삼키며 상자 속에 든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살폈다.

그 사이에 블루가 머뭇거리더니 제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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